1.백마고지의 영웅 임익순 대령 회고록 내 심장의 파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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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6-03 18:26 조회3,93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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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내 나이가 70살이 넘고 보니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저절로 과거의 일들이 머리에 떠올라 더러는 뚜렷하게 더러는 희미하게 눈앞에 아물거리기에 두서없이 고생스러웠던 일들과 즐거웠던 일들을 기록으로 남기려한다.
나의 성격이 어려서부터 강직해서 불의와 타협할 줄 몰랐고 따라서 절친한 친구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또한 청렴을 신조로 했기에 재물에 관심이 적어서 재산을 축적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이 세상은 나의 그러한 뜻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지는 않았다. 불의와 타협 하지 못하고 그것을 배격하면 오히려 중상모략이 되어 돌아오기도 했다. 청렴을 신조로 살다보니 금전이나 재산이 부정한 존재로도 보였고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 어쩔 수 없는 필요악이라고 생각했다. 정당하지 못하게 들어오는 금품을 물리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내가 재물을 싫어하니 재물도 나를 싫어했는지 지금까지 여유 있게 살아본 적이 없으나 후회는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의 호도 청강(淸强)이라고 정했다. 맑고도 강하다는 뜻이 담겨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학교선생님이나 부모님으로부터 남을 속이거나 남의 물건을 탐내면 안 된다고 배워왔다. 그런데 내가 살아온 세상은 그렇지가 않았다. 부정을 하는 자가 정직하게 사는 사람들보다 오히려 더 출세하고 부당한 방법으로 축재도 많이 할 수 있는 세상이었다. 나는 어느 저명하신 스님께 이 모순에 대하여 물었다. “불교에서는 ‘인과응보’라는 말이 있어서 좋은 일을 하면 좋은 결과가 있고 나쁜 일을 하면 나쁜 결과가 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으니 어찌 된 일이냐?”고 물었다.
그가 말하기를, “사람에게는 전세와 현세 그리고 내세가 있어서 전세에서 적선을 많이 한 자는 현세에서 좋지 않은 일을 조금만 해도 전세에서의 적선으로 상쇄가 된다.”고 했다. 그러니 “현세에서 적선을 많이 하면 내세에 가서 잘 살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 말에 나는 반신반의 했다. 나는 인간의 내세라는 것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무종교주의는 결코 아니다. 나의 종교관은 내세 즉, 극락이나 천당을 위한 것이 아니고 현세를 위한 것이다. 성인 석가모니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잘 배우고 그대로 선을 행하면 스스로 마음이 편하고 세상을 아름답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름다운 세상에서 마음이 편하다면 그 곳이 바로 극락이고 천국이리라.
나의 이러한 인간성을 알고서 이 글을 읽는다면 이해에 도움이 될 줄 안다. 또한 이 글은 문학적인 것이 아니기에 문장에 미사여구를 쓰지 않았다. 그저 내가 생각나는 그대로를 기록했고 나는 한글세대가 아니어서 철자법이나 띄어쓰기가 충분하지 않아 남의 도움을 받았다. (나의 자손들이) 이 글을 읽고 느끼는 점이 한 가지라도 있다면 돋보기를 쓰고 떨리는 손으로 어깨, 팔의 통증을 참아가며 쓴 일에 다소나마 보람을 느끼리라.
2. 유년기
마한의 고도인 익산 읍은 북쪽으로는 미륵산이 펼쳐져있고 동쪽으로는 용화산과 시대산의 봉우리가 이어져 북풍을 막아주며 서쪽으로는 오금산이 서해에서 불어오는 해풍을 가려주고 남쪽으로는 바다와 같이 광활하게 펼쳐지는 만경평야가 자리 잡고 있다. 주위 산에는 아름드리 노송들이 빼곡하게 서있었고 읍내 북단을 흐르는 시냇물은 바닥의 모래가 훤히 보일 정도로 맑아서 붕어와 메기 등 물고기들이 많이 뛰놀았다. 아름드리 버드나무와 느티나무는 그 잎이 마치 구름처럼 풍성했다. 읍내를 가로질러 흐르는 개울에서는 파란 물새가 송사리 사냥을 하는 풍경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읍내 중앙에는 이 고을 수령의 집무실인 등현과 육방관속의 관아를 비롯하여 객사, 곡간 등이 즐비했고 동구 밖 산기슭에는 행교가 자리 잡고 그 위엄을 떨치고 있었으며 남쪽에는 선비 한량들이 문무를 연수하는 사정이 있었다.
평화스러웠던 그곳이 나의 9대 조부님 때부터 정착한 곳이며 따라서 나의 고향이다. 선대 조부님들께서는 대대로 관직벼슬을 지내시어 형편도 무난 하셨고 재산도 천석꾼까지는 못되었어도 지방거족으로 풍요롭게 사셨다.
내가 뵌 3대 조부님 즉 증조부님은 호리호리한 키에 하얀 수염이 인상적이었는데 여름철 하얀 모시소단에 통영갓 차림으로 푸른 들판 두렁길을 지나가실 때는 흡사 신선과도 같았다. 그 어른은 벼슬이 정3품에 이르렀고 재산도 몇 백석은 하신 듯 했다. 또한 문장과 문필이 그 지방에서는 따를 자가 없었다고 한다. 더구나 신학문을 이해하시고 구한말에는 계명학교라는 사립초등학교를 세우셨는데 후에 공립으로 개편됨과 동시에 교장에 취임하셨다. 그 학교가 나도 다닌 금마공업보통학교이다. 나는 나의 증조부님이 창립하신 학교의 19기 졸업생이다.
이렇듯 이조말기까지 평화스럽기만 하던 우리 집안이 기울어지기 시작한 것은 외세의 침략이 그 원인이었다. 증조부님 슬하에는 4남 1녀가 계셨다. 그 장남이 나의 조부님이시다. 조부님은 부잣집 맏아들로 호강하며 자랐고 독서당을 차리고 글공부도 하셨다고 한다. 적령기에 결혼도 하시어 나의 아버지이신 큰 아들을 낳으셨다. 그러나 그 시대의 사정은 우국지사들을 평화롭게 두지 않았다. 나의 조부님도 기울어가는 국운을 바로 세우겠다는 충정으로 고향과 부모형제 그리고 처자를 모두 버리고 집을 나서게 되셨다. 그리고 국내외로 동분서주 하셨으나 세월이 흐르며 대세가 더 기울어져 결국 한일은 합병이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부님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조국독립과 주권회복에 심신을 바쳤고 3.1만세 당시에는 민족대표 48인 가운데 한 명으로 일본에 특사로 건너가셨던 사실은 우리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광복 후에 정부로부터 건국과 독립유공자로 훈장도 추서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 사람들은 일본에 아부하지 않고 적대시하는 자들은 정신 못 차리는 놈으로 몰아 낙인을 찍고 배척하기 일쑤였다. 조부님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증조부님은 장손인 나의 아버지가 계신대도 불구하고 일본말도 잘 하고 일본인에 밀착하고 친일하는 막내아드님인 종조부님에게 적지 않은 재산을 물려주셨다. 나의 아버지는 소년 시절에는 부잣집 장손으로 어려움 없이 글도 배우고 자라셨으나 그 후로는 이러한 가정적 변화로 인하여 희망도 깨지고 그의 숙부의 모진 학대와 박해로 조모님을 모시고 집을 나오셨다. 거기에 일본경찰들의 지독한 감시까지 받으며 살아야 했다.
그때부터 모진 가난과 싸워야 하는 조모님과 아버지의 고생은 참혹함 그 자체였다. 글도 끝까지 배우지 못했고 물론 농사일도 익히지 못하신 아버지는 소위 ‘반거청이’가 되어야 했으나 어머님 한 분 모셔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모든 역경을 감당하신 것 같았다.
설상가상으로 일본경찰은 독립운동가의 자식이라고 아무런 혐의도 없는데 그들의 국경일이 다가오면 예비검속이라는 명분으로 아버지를 주재소 유치장에 구금하기도 했다. 조모님도 일갓집을 두루 돌며 허드레 일을 해주고 연명하셨다고 하고 아버지는 객지로 방황하시며 일정의 탄압을 피하셨다고 들었다.
모자는 수십 년간 이러한 풍진 속에서 이사를 거듭하다가 아버지 나이 27세에 결혼하셨다. 그 당시 27세 총각이라면 환갑진갑 다 지난 노총각이었다. 모두가 가난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그 혼인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조부님의 헌신적인 조국독립운동을 흠모하시던 외조부님이 고이 기른 큰따님을 노총각에게 선뜻 내주시어 사위를 삼으시고 독립지사와 사돈의 인연을 맺었다고 들었다.
그 후 젊은 어머니는 친가 바로 옆에 초가삼간을 마련하시어 조모님을 모시고 신접살림을 꾸렸으나 아버지는 역시나 정착할 수가 없었는지 집에 머무는 날이 많지 않았다. 세 분의 고생이 여전한 가운데 세월은 흘러 5년 후에 내가 태어났다. 1917년 6월 3일 정사년 4월 13일이었다. 내가 태어난 날도 역시 아버지는 집에 안 계셨고 내 나이 세 살 때 비로소 집으로 돌아오셨다.
불이 나고 홍수가 밀려와도 유실될 재산이 없는 철저히 가난한 집에 태어난 나는 바로 이웃인 외가에서 유년기의 대부분을 보냈다. 당시 외가에는 어린아이가 없어 유난히 어린이를 귀여워하시는 외조부님과 큰 외숙 내외분들에게 둘러싸여 어려움 없이 자랐다. 외가는 중농쯤 되어서 생활형편은 비교적 넉넉했다.
외조모님은 어머님이 소녀시절에 작고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외숙모들의 우애와 화목으로 집안이 늘 조용하고 평화스러웠다. 나는 이런 평화스러운 집안의 사랑을 한 몸에 독차지하고 버릇없이 자랐고 귀하게만 지낸 탓인지 성격은 고집쟁이가 되었다. 어머니는 나의 고집스러운 성격을 많이 걱정하셨으나 아버지는 오히려 나를 두둔해주셨다. “사나이라면 일단 마음먹고 시작한 일을 무슨 일이 있어도 끝장을 보아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다.
다섯 살 때라고 기억한다. 이른 봄에 오산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갔다. 가산을 물려받으신 종조부께서 그곳으로 자리를 옮기시고 농사를 많이 지으시며 아버지에게 함께 농사를 짓자고 제안을 하셨다. 이사는 갔으나 농사를 지을 농토를 주는 것이 아니고 행랑방 한 칸을 주며 하인 부리듯 했고 어머니는 그 댁 식모나 다름없이 혹사만 당했다. 사실은 모자라는 일손을 채우기 위한 종조부의 간교한 수작이었던 것이었다. 머슴을 두어도 추수가 끝나면 새경이라고 해서 일 년 치 노임을 지불하는데 우리는 겨우 네 식구 먹고 사는 것으로 그만이었다. 주야로 일만 하느라 헤어진 옷을 갈아입을 새 옷 한 벌 지을 돈도 주지 않아서 누더기 같은 옷을 걸치고 있던 부모님의 몰골이 지금도 뚜렷하게 내 기억에 남아있다.
부모님은 이듬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셨다. 그 때부터 아버지는 집을 비우거나 객지로 나가는 일을 삼가 하셨다. 자그마한 밭을 얻어 농사짓는 일과 철 따라 장사를 하시면서 나와 내 동생들을 기르셨다.
나는 다섯 살 때부터 한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글을 배워야 하는지 몰랐다. 어른들이 가르쳐주는 대로 앵무새처럼 외우기는 했으나 글자의 뜻을 몰랐다. 가끔 어머니의 무서운 회초리를 맞기도 했다. 발갛게 피가 맺힌 종아리를 끌어안고 울고 있으면 아버지께서 찬물로 씻어주시고 장터에서 사온 신식 약을 발라주시며 주머니에서 슬며시 눈깔사탕을 꺼내주셨다. 이러는 사이에 천자문과 동문선습 등 초급한문을 습득했다. 반면 골목대장으로도 활약을 하는 유년기를 보냈다.
보통학교 개구쟁이
조모님께서 지어주신 검정색 광목 두루마기에 검정 고무신을 신고 외조부님의 손을 잡고 고을에 있는 보통학교에 갔다. 보통학교라지만 교실이라고는 네 칸 밖에 없었고 옛날 원님(군수)이 정사를 보던 동현의 옛 건물이 몇 채 있을 뿐이었다. 운동장도 없었고 군데군데 물이 고인 웅덩이가 있는 조그마한 뜰이 있을 뿐인데도 제법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거렸다. 그런 소란 속에서 어렴풋이 나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누군가가 내 손을 왈칵 끄는 충격으로 정신을 차리고 보니 큼직한 돌 위에 서신 곰보선생님 한 분이 명부를 들여다보며 내 이름을 다시 불렀다.
외조부님이 대답하라고 나지막한 소리로 말씀하셨으나 목구멍이 막히기라도 한 듯 말소리가 나오지를 않았다. 가까스로 “예.”라고 대답하며 나서니 “허, 그놈, 장군이 하나 왔구나!” 하며 내려다 보셨다. 아마 그 때 내가 쓰고 간 모자가 눈에 뜨인 듯 했다. 서울에 계신 조부님께서 맏손자가 어느덧 자라서 학교에 들어간다고 하니 모자를 한 개 사서 보내주신 것이다. 지금도 그 모자가 눈에 선명하게 보이는 듯하다. 진남색 벨벳모자는 앞에 채양이 달려있고 화려한 금줄로 장식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번쩍거리는 모표가 붙어있었다. 입학생 사오십 명 중 이런 신식 모자를 쓴 아이는 나 하나밖에 없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최창규 선생님을 따라 교실로 들어가 지정된 자리에 앉았다. 내 자리는 가장 앞줄에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나보다 모두 몸집이 크고 키도 크고, 코 밑이 거무스름한 아이도 있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장가를 가 자식을 둔 유부남이었다. 채 씨 성을 가진 아이와 내가 가장 키가 작았고 나이도 가장 어렸다. 나는 내가 작은 것이 불만스러웠고 자존심 상하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무엇이든 제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보다 다들 키도 크고 기운도 셌다. 그래서 나는 운동장에서 놀 때는 상급생하고만 놀았고 싸워도 나보다 큰 녀석들만 골라서 싸웠다. 싸우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나보다 크고 비단옷을 입고 거들먹거리는 녀석들이 어찌나 아니꼽게 보이는지 그런 녀석들만 골라서 싸웠다.
한 번은 숙명적인 싸움을 했다. 읍에서 조금 떨어진 농촌의 지주 아들인데 얼굴도 곱상하고 공부도 잘 했으나 운동장에 나오면 자기 집 소작인 자식들을 못살게 굴었다. 그 놈의 그런 행위가 어찌나 역겨운지 참다못해 흠씬 두들겨 주었다. 그 자는 나보다 체격도 크고 힘도 셌지만 나의 분노에는 당해내지를 못했다.
당시 같은 반에는 소위 행세 좀 한다는 양반의 자식과 지주의 자식, 서민의 자식, 무당, 백정, 소작인의 자식들이 골고루 섞여 있었다. 즉 누구나 글을 배울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당에는 양반자식들만이 다녔기에 비교가 되었다. 이야기가 잠시 옆길로 나갔지만 숙명적인 싸움이 다름 아닌 해방 이후로 연결된다.
그 녀석은 부모덕으로 일본까지 가서 대학도 다녔다. 그런데 어디서 어떻게 물이 들었는지 새빨간 물이 든 공산당이 되어 나와 총을 맞대고 싸워야 하는 처지가 되었고 끝내는 나의 부하의 총탄에 의해 저 세상으로 보내졌지만 그래도 어린 시절 친구를 처단해야 한다는 상황에 고민도 했었다.
이야기는 제자리로 돌아가서, 학교에 간다는 것이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그저 가야하니 가는 것이구나.’라는 단순한 생각으로 아침이 되면 책 보따리를 옆구리에 끼고 학교로 향했다. 웬만큼 익숙해질 무렵 나 혼자서 학과시간표를 볼 줄 알게 되었다. 그 전까지는 부모님께서 그날 배우는 교과서와 공책을 시간표대로 골라서 책보에 싸주시면 그대로 가지고 다녔다. 그러던 중 한 번은 벽에 붙은 시간표를 무심코 들여다보니 무엇을 뜻하는지 알 것 같았다. 어찌나 좋은지 어머니를 불러대며 월화수목! 하며 시간표를 읽어 내려갔다. 어머니도 신기해하시며 대견스러워 하셨다.
한 번은 큰 소동이 벌어졌다. 어린 아이들은 대개가 공부하며 뛰어노느라 고단해서 늦잠을 자게 마련이다. 시간이 되면 어머니가 나를 깨워서 세수를 시키고 밥을 먹여 등교시간에 늦지 않게 보내는 게 일상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은 잠을 깨보니 집안에 인기척이 없고 해는 중천에 떠있었다. 나는 이만저만 당황한 게 아니었다. ‘아차, 늦었구나! 학교시간에 지각 아니 아마 끝났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니 울음도 안 나오고 막연하다 못해 말문이 막혀버렸다. 우두커니 책보만 끌어안고 앉아있으니 밖에서 어머니 말소리가 들렸다. 어머니가 들어오시더니 “많이도 잤구나.”하시며 아무런 걱정의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이런 대사건에 이리도 무관심 하실까.’ 생각하니 어머니마저 미워졌다. 어머니의 태연함에 더욱 겁이 났다. 그러자 조모님이 들어오셨다.
조모님은 가난하기는 해도 양가집 며느리답게 곱게 늙으셨으며 조부님 즉 남편의 소위 ‘속 못 차리는 행위’로 몸과 마음고생을 많이 하셔서 조금은 겁도 많으셨지만 첫손자인 나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치 귀여워 하셨다. 이렇게 귀여운 손자가 갑자기 벙어리가 되어버린 것 같아 일대소동이 일어나서 집안은 물론이고 온 동네가 떠들썩해졌다.
그러나 나는 이제부터 학교도 못 가고 산에 가서 나무나 해야 할 일을 생각하니 말문이 영원히 닫히고 말 것 같았다. 돌연한 소동에 외가의 막내딸이자 보통학교에 다니는 이모가 달려왔다. 이모를 어머니 다음으로 좋아하는 나는 이모를 보자마자 의아했다. 어째서 이모도 학교에 가지 않았는지? 아니면 학교가 이미 끝나서 돌아온 건지? 나는 속삭이듯 “이모, 학교 갔다 왔어?”하고 물었다. 옆에서 당황하고 계시던 조모님께서 “얘가 벙어리가 된 게 아니구나!” 하시면서 기쁨의 울음을 터뜨리셨다. 이모는 “애가 공일인 줄도 모르고 있네.” 하며 알밤을 하나 주었다. 그 알밤이 아픈 줄도 몰랐다. 나는 그제야 ‘공일이라는 것이 있었구나.’ 하며 처음으로 일요일을 알았고 일요일은 학교에 가지 않고 노는 날이며 정말로 좋은 날도 다 있다고 생각했다. 그 사건의 원인은 공일이었다.
일요일이라 어머니는 나를 깨우지 않으셨고 나는 한나절까지 늦잠을 자다가 벙어리가 될 뻔하고 그 후로는 어머니가 깨워주지 않으셔도 스스로 일어나 그 날 시간표대로 책을 챙겨 학교에 가는 꼬마가 되었다. 조모님은 늦잠을 자는 동생들에게 “늦잠 자면 벙어리가 된다.”고 새로운 이론(?)으로 꾸중을 하셨다. 이래서 늦잠 자는 버릇도 없어지고 벙어리 소동도 잊혀졌다.
2학년 때였던 것 같다. 학교에서 무슨 행사가 있던 날로 기억된다. 교실칸막이를 터서 강당을 만들고 전교생이 모두 모여 앉았고 읍내 높은 어른들도 모두 와서 옆자리에 앉았다. 수백 명이 모였는데도 대단히 조용했다. 무슨 행사인지는 모르나 누군가를 불러내고 서고 앉고 하며 행사가 진행되었다. 그러던 중 사회를 보던 선생님이 갑자기 내 이름을 부르셨다. 그러자 우리 반 최 선생님이 어리둥절 하는 나에게 빨리 나오라고 손짓을 하시기에 영문도 모르고 대머리 일본인 교장 앞으로 나갔다. 무엇인지 모르지만 꽤 크고 빳빳한 종이에 붓글씨로 굵은 글자가 쓰인 종이 한 장을 주기에 받아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내빈석 앞을 지나오는데 평소 호랑이처럼 무서워하던 이 고을 면장님(집안 할아버지)이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며 칭찬하시는 듯 하는 말씀을 했지만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집에 돌아오니 이모와 외삼촌이 와 있었다. 그리고 개근상을 탔다는 것을 처음 알았고 또 개근상이란 일 년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학교에 다닌 것을 칭찬하는 상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공부를 잘 해서 받은 상이 아니라서 매우 섭섭했다. 내년에는 나도 큰 아이들보다 공부를 잘 해서 우등상을 타리라고 혼자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러나 우등상은 한 번 밖에 타지 못했다.
38등 우등생
나보다 몸도 크고 나이도 많은 아이들 틈에 끼어서도 그런대로 공부를 했다. 일학년 일 학기가 끝나고 여름방학이 왔다. 이모가 방학을 하면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러면 시냇가에 가서 붕어도 잡고 맑은 물에서 멱도 감을 수 있어서 생각만 해도 날아갈 듯 좋았다. 그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방학이었다.
방학 날 선생님이 무슨 그림책 같은 것과 공책크기의 빳빳한 종이 한 장 씩 나누어 주셨다. 무엇인지 모르나 한문과 숫자가 쓰여 있었다. 도장도 두어 개 찍혀있었다. 선생님이 주시는 대로 받아가지고 집에 돌아오니 마루에서 바느질을 하시던 어머니가 통신표를 내놓으라고 하셨다. “통신표?” 통신표가 무엇인지 몰랐다. 선생님이 주신 그림책과 종이를 드렸다. 어머니는 그 종이를 보시고 한 숨을 길게 쉬시며 무서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셨다. 그렇게 무서운 어머니의 눈은 세상에 태어나 처음이었다. 일학년 40명 중에서 38등이란다. 그 게 무슨 말인지 몰랐다. 그게 무엇이냐고 물으니 어머니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시며 “너의 반 40명 중에서 네가 38번째로 공부를 잘 했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어머니의 무서운 눈초리가 없어진 것과 몇 번째가 되었든 잘 했다는 말씀에 그만 우쭐했고 할머니께도 자랑했다. 밖에서 돌아오신 아버지에게 매달리며 내가 학교에서 38번째로 공부를 잘 했다고 자랑하며 상으로 새 고무신을 사달라고 졸라댔다. 아버지는 “잘 했다. 잘 했어!” 하시며 슬그머니 나가시더니 새 고무신을 사들고 오셨다. 운동화가 아직 없었던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다음 이 학기에서는 좀 더 잘 하고 삼 학기에는 10번째 안에 들어야 한다.”며 자세하게 가르쳐주셨다. 그 때는 일 년이 3학기로 나누어져 있었다.
지금 생각하며 호랑이처럼 무서우면서도 인자하신 아버지가 그리워진다. 그리고 혼자서 곰곰이 생각하니 뜀박질을 해도 먼저 가는 놈이 일등이니 공부도 잘 하는 놈이 1등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학기부터는 외가 이모한테 가서 공부를 했더니 26등을 했다. 어머니의 무서운 눈초리는 안 보였지만 그리 만족한 얼굴은 아니었다. 3학기는 더 잘하리라고 혼자서 다짐하고 열심히 했으나 21등 밖에 못했다.
‘나의 능력이 이게 전부구나.’라는 생각도 했다. 2학년이 되어서는 첫 학기에 19등을 했다. 몸도 크고 나이도 많은 아이들과 경쟁을 하기에는 너무나 힘겨웠다. 그 후 10등에서 20등 사이를 오르내리며 보통학교를 졸업했다.
3. 소년기
진학의 꿈
방 안에서 웅크리고 앉아있으니 졸업식 노래인 ‘호사루노 히커리’가 들려왔다. 졸업식 날인데 나는 수업료 3개월 치가 밀려 정학을 당해 등교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학교 앞으로 가 나무사이로 낡은 목조건물의 교실을 바라보았다. 아직 3월이라 유리 창문이 닫혀있어 실내가 잘 보이지 않았지만 학생들 모두가 검정색 두루마기를 입고 있어 실내가 더 어둡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조금 있으니 출입구를 통해 검정두루마기들이 손에 커다란 종이를 한 장씩 들고 쏟아져 나왔다. 그중에는 학부형들도 섞여있었다. 그들이 내가 서 있는 정문 쪽으로 몰려나오기에 나는 길가의 큰 버드나무 고목 뒤에 몸을 숨기고 그들을 부럽게 바라보았다.
그때 누군가 나의 어깨를 툭 쳤다. 돌아보니 아이아빠였다. “이거, 선생님이 너 같다주래.”하며 종이 한 장을 건네주었다. 신문지보다는 조금 작은 크기에 두툼한 종이에 적힌 졸업장이었다. 선생님이 아닌 친구를 통해 전달받은 졸업장을 받아드니 지난 6년간의 희로애락이 머릿속으로 스쳐지나갔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흘러 졸업장으로 떨어졌다. 놀란 아이아빠가 소맷자락으로 내 얼굴을 닦아주는 바람에 나는 정신이 들었다. 그와 나는 개울의 돌다리에 앉았다. 이제는 아이아빠도 더 이상 못 본다고 생각하니 또 다시 눈물이 나왔다. “형은 고등보통학교(중고등학교를 통합한 5년제 중등학교)에 간다지?”하며 물었다. 그는 “응, 방도 하나 구해서 살림도 다 갖다놓고 며칠 있으면 이사를 갈 거여.”라며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지금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중학교 1학년생이 처자와 함께 살림을 하면서 공부를 한다니 말이다. 그러나 그 시대에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나는 가난 때문에 보통학교를 힘들게 졸업했지만 상급학교로 진학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기숙사비용만 내면 학비가 면제되는 공업학교도 있었고 사범학교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 집안형편으로 한 달에 50원쯤 하는 기숙사 비용을 내기는 무리였다. 고민을 하다가 서울에 가서 고학이라고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책 보따리를 짊어지고 조부님이 계시는 서울로 향했다.
당시 조부님은 어느 출판사에서 일하셨다. 국문사전을 집필하시는 것 같았다. 나는 서울로 온 뜻을 조부님께 말씀드렸다. 그러나 조부님은 D신문사에서 일하시는 당숙부님을 부르시더니 나를 S상업학교에 입학시키라고 분부하셨다. 그러나 당숙은 내가 거처할 곳이 없어 그럴 수가 없다고 말했다. 조부님은 서조모님의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있어 방이 여유가 없었고 결국 당숙이 나에게 방을 한 칸 내주어야 하는데 그게 못마땅한 것이었다.
2, 3일 후 조부님께서는 상황이 어려우니 나더러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하셨다. 누구의 도움 없이 고학을 하겠다는 각오로 상경했는데 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일이 이상하게 전개됐다. 어느 곳이라도 좋으니 일자리를 소개해달라는 나의 부탁마저도 당숙은 거절했다. 그렇다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무작정 거리로 나서서 굶주림과 추위에 헤매다가 일본인이 운영하는 고급 하숙집에 일자리를 얻었다. 굶주림과 노숙은 면했지만 공부할 시간은 전혀 없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고 잠자는 시간도 서너 시간에 불과했으니까.
그러나 그 집에서 밥 짓는 법이나 간단한 음식 만드는 법도 배웠다. 아침식사가 끝나면 온 집안을 청소해야 했다. 여주인이 어찌나 까다로운지 마루에 티끌만한 먼지 한 톨만 있어도 난리를 쳤다. 빗자루로 쓸고 난 후 손바닥으로 다시 쓸어 확인해가며 청소를 해야 했다. ‘남의 밥을 얻어먹는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금쪽같은 시간을 허비하면서 밥이나 얻어먹자고 서울에 온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곳을 그만 두었다. 일본인 세탁소나 사진관 등등으로 전전해보았으나 역시 공부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차라리 집에 돌아가 부모님을 도와가며 독학을 하는 편이 낫겠다 싶은 생각으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내가 서울에서 겪은 이야기를 들으신 조모님은 격노하셨다. “조실부모하고 고아가 된 어린 것을 거두어 가르쳐놓으니 배은망덕한 자로구나!”라며 당숙부를 비난하셨다.
나는 철도원이 될 생각으로 철도강의록을 주문해 공부했다. 1년 과정의 교과내용을 6개월 만에 마치고 보통학교 시절 나의 담임이었던 일본인 선생님을 찾아가 의논했다. 선생님은 나의 실력을 테스트하더니 “이 정도면 용인(철도 최하급직원)시험은 합격할 것이다.”며 인정해주었다. 나는 용기를 얻어 철도당국에 서류를 갖추어 원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서류는 되돌아왔다. 철도 고위층의 추천서가 없다는 것이 서류 반송의 이유였다. 그 당시에는 그런 자리들까지도 일본인들이 독차지하려고 조선인을 배척했다.
그럭저럭 1년을 허송세월하는 사이 조모님이 돌아가시고 동생들도 더 태어났다. 집안형편은 갈수록 더 어려워지기만 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자인 내가 집안일을 돕는 것이 급선무라는 것을 깨닫고 공부는 나중으로 미루게 되었다.
장남
아버님이 하시는 일도 신통치가 않았다. 배고프다고 우는 동생들을 보면서 나는 장남으로서의 책임감을 저버릴 수 없었다. 내 한 몸 입신양명하기 보다는 집안을 가난에서 구하는 일을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했다. ‘자본 없이도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나 같은 소년을 고용하는 노동판은 없는가?’ 여러 각도로 고민을 해보았으나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생각 끝에 조부님께 장사밑천으로 십 원만 주실 것을 부탁드리는 편지를 드렸다. 며칠 후 당숙으로부터 답장이 왔다. 내용은 ‘계란 한 개를 병아리로 부화시켜 기르면 큰 닭이 되고 그 닭이 또 알을 낳고 또 부화시키면 병아리가 되고......’라는 사연이었다. 옳은 말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달걀 한 개도 수중에 없었고 닭을 기를 동안 먹고 살 것도 없는 형편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조부님은 나에게 돈을 보내주라고 당숙부에게 분부하셨는데 당숙부는 위의 사연만 보내온 것이었다.
나는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절대로 남에게 의지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궁리 끝에 장터 자전거포로 가서 하루에 25전씩 내기로 하고 자전거 한 대를 빌렸다. 그리고 제과점에 가서 과자를 외상으로 얻었다. 센베이와 눈깔사탕, 박하사탕, 꽃사탕 등을 봉지에 한 근씩 담아 대나무 통에 담아 자전거에 싣고 산간벽지 구멍가게로 다니며 한두 봉지씩 팔았다. 하루에 스물대여섯 근 정도 팔면 수입이 괜찮았다. 자동찻길도 없는 두메산길로 다니다가 인심이 후한 구멍가게 주인을 만나면 더러 점심밥을 얻어먹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점심을 굶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하루 장사를 마치고 과자 값과 자전거 세를 지불하면 15전에서 20전 정도의 이익이 남는다. 남은 돈으로 쌀을 한 봉지 사서 집으로 들어가면 동생들이 까만 눈동자를 깜박이며 제비들처럼 나를 기다리고 있다. 바로 아래 여동생은 제법 밥도 잘 지었다. 여동생이 부엌에서 쌀을 씻어 밥솥에 불을 지피고 있으면 어머니가 어디를 다녀오시는지 힘없이 돌아오신다. 아마 이웃집에 쌀을 빌리러 가셨다고 빈 손으로 돌아오시는 듯 했다. 쌀 한 봉지로 두 끼니를 먹어야 해서 저녁에는 야채를 넣어 죽을 끓여 먹어야하는 때도 있었다.
과자장사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내 경쟁자가 나타나고 나처럼 자전거를 세내어 다니는 사람보다 자기 소유의 자전거를 가지고 장사를 하는 사람이 경쟁에서 유리했다. 나는 과자장사를 포기하고 숙부님에게 빌린 3원으로 중고자전거를 한 대 구입했다. 자전거에 사각형 대나무바구니를 달아 생선을 싣고 다니며 장사에 나섰다. 내가 사는 곳에서 백리쯤 떨어진 어항에 가서 생선을 사다가 산골마을 사람들에게 판매하니 과자장사보다는 이익이 조금 더 많았다. 우리읍내에 일본인들이 아홉 가구나 사는데 이들과 단골이 되면 좋으련만 그들의 입맛에 맞는 고급생선을 살 수 있는 자금이 없었다. 조선인들이 좋아하는 싸구려 생선만 사다가 판매하니 이익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새벽부터 집에서 출발해 어항에 다녀오면 늦은 저녁이 된다. 다음날 이른 아침부터 생선을 팔아야 다시 어항에 가서 생선을 사올 수 있었다. 하루는 새벽부터 비가 내려 전날 사온 생선을 팔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도 비를 맞으며 집집마다 돌았다. 어느 집 싸리문을 무의식적으로 열고 들어가니 집주인이 마루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그만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자세히 보니 일가친척 되는 아저씨였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집에서 나왔다.
그런데 길에서 김 선생님을 만났다. 나중에 공산당 사건에 연류 되어 고생하신 분인데 비에 흠뻑 젖은 나를 보시더니 “무슨 일이냐?”고 물으셨다. 비가 와서 생선을 못 팔고 있다고 대답하니 자기 집으로 가자고 하셨다. 생선 있는 것 모두를 바닥에 털어놓고 부인을 부르시더니 소금에 절여두라고 하시며 생선 값도 후하게 주셨다. ‘하물며 남도 이렇게 후하게 정을 베푸는데 일가친척이라는 자들이 그렇게 야박하게 할 수 있을까.’ 어린 소견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한 번은 어항에 갔더니 주꾸미가 많이 잡혀왔다. 그 다음날이 우리 읍내 장날이기도 해서 이걸 사다 팔아야겠다는 생각으로 한 통을 샀다. 밤늦게까지 먹통을 떼어내어 다듬고 씻었다. 동생들이 옆에서 먹고 싶어 하기에 조금씩 먹이고 다음날 장터에 나가 화로에 숯불을 피우고 귀 떨어진 큼직한 냄비에 데쳐서 양념장과 함께 내놓으니 작은 것은 1전, 큰 것은 2전씩 받아도 얼마 지나지 않아 동이 났다. 원가 1원을 제외하고도 1원 50전이 남았다. 다른 생선에 비해 팔기도 쉽고 이익도 더 많이 남았다. 이익금으로 쌀을 한 말 사고 나무도 한 짐 사니 마치 부자라도 된 기분이었다. 장남으로서의 임무를 조금은 해낸듯했다.
그러나 ‘생선장수를 하는 것이 나의 전부는 아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장래에는 남보다 앞선 사람이 되어야한다는 생각을 저버리지 않았다.
4. 청년기
이렇게 부모님을 돕고 동생들을 보살피는 사이 소년기도 거의 지나고 청년기에 접어들기 시작하면서 아버지의 형편도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았다. 그때 나는 결심했다. 발전이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다가는 평생 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좀 더 안정된 생활을 위해 기반을 쌓아야했다. 그래서 집을 떠나기로 했다. 아버지 나이도 50세가 넘지 않으셨으니 아직 활동을 할 수 있고 집안형편도 좀 나아졌으니 새로운 일을 도모해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K라는 동창이 있었다. 그의 집 사정은 우리보다는 나은 편이었으나 중학교에 갈 형편은 못되었다. 그는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화물자동차 조수로 들어가 운전을 배웠다. 이제는 면허도 취득해 어엿한 운전수로 일하며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사람들보다 월급도 더 많이 받았다. 나도 운전수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그에게 찾아가 사정이야기를 했더니 그는 쾌히 승낙을 하고 다음날부터 나를 자기의 조수로 채용했다. 그런데 호사다마라고 회사가 망하는 바람에 그와 나는 졸지에 실직자가 되고 말았다. 8원씩 받던 월급도 못 받게 되어 막막했다.
그러나 이왕이면 큰 도시로 가자고 생각하고 서울로 갔다. 서울의 한 소형자동차 정비공장에 일자리를 얻었다. 사장인 고 씨는 나를 잘 보았는지 무척 아껴주었고 월급도 적지 않게 주었다. 매월 월급을 받으면 숙식비와 용돈을 제외하고 집에도 조금씩 보내드렸다. 장남의 구실을 하기 위해서였으리라. 일도 그다지 어려운 것은 아니었지만 운전수나 정비사로 일생을 보낼 수 없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다. 해방 후 그를 다시 만났을 때 그는 고백이라도 하듯 말했다. “내게 아들이 없어서 자네를 잘 길러 내 후계자로 삼을 생각이었네.”라며 아쉬워했다.
27전
두 차례에 걸쳐 서울 생활을 하는 동안 여러 직장을 경험했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나올 때마다 주인들은 나를 붙잡으며 더 있어 줄 것을 간곡히 청했다. 내가 특별한 인재도 아닌데 왜 그러는 것일까 생각해보니 굳이 이유가 있다면 무슨 일이든 정성스럽고 알뜰하게 내 일처럼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의 성격이 어릴 적부터 꼼꼼하고 완벽주의였다는 것을 내 자신도 알고 있다.
고 씨의 공장에서 약 1년을 지냈다. 정비기술도 많이 익혔고 신참신분도 면하니 고참들에게 괄시도 덜 받게 되었다. 그때도 역시 일을 차근차근 잘 처리했기 때문에 고참들도 어려워하는 일을 해낼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사장이나 고참들도 나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정비사라는 직업에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 무렵 북지사변(**1937년 7월 7일 화베이에서 일어난 제2차 중일전쟁)이 확장일로에 있었다. 우리 공장에서 함께 일하던 일본인 한 사람이 병역에 소집되어 젊은 아내와 낳은 지 두 달 밖에 되지 않은 딸을 두고 떠나는 모습을 보았다. 전쟁이란 이런 몰인정한 것이런가. 개인의 사정은 도외시 하고 막강한 군대를 동원해 남의 나라를 침략하여 강탈하고 정복자로 군림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일본에 강점당한 우리 조선도 막강한 군대가 있다면 침략자를 물리치고 국토를 되찾을 수 있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지자 ‘나도 만주에 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한 계획이나 목적은 없었지만 그저 가보고 싶었고 가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때는 9월 초였지만 아직 여름 날씨였다. ‘무작정 상경’이 아닌 ‘무작정 도만’이 되었다. 여분의 내의나 양말 한 켤레 챙기지 않은 채 맨주먹으로 경성(서울)을 떠났다. 우선 신경(장춘)까지 차표를 끊어 기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는 어김없이 떠났다. 차창 밖으로 차츰 낯선 풍경들이 보이기 시작하니 갑자기 겁이 났다.
수중에 돈도 없고 친척이나 친구도 없는 낯설고 말조차 통하지 않는 타국으로 가고 있는 것이었다. 중간에 차에서 내려 돌아갈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남아가 한번 뜻을 세우고 떠난 길 어찌 그대로 돌아갈 것 인가.’ 하는 옛 시 한 구절을 마음속으로 낭송하며 결심을 더욱 다졌다. 그 다음날 저녁 무렵이 되어 압록강 철교를 건넜다. 그때 무심코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니 동전이 잡혔다. 27전이 남아있었다. 다시 한 번 겁이 났다. 새삼 내가 무모한 일을 저지르고 있다고 느껴졌다.
27전은 찐빵 서너 개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잠은 어디서 잘 것이며 끼니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나를 기다리는 이 아무도 없고 자리를 비워두고 나를 기다리는 직장도 없다. 그러나 후일 생각하니 그 27전이 내 인생을 반전시킨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27’이라는 숫자를 좋아한다.
그 다음날 아침에 봉천(신양)에서 도중하차했다. 그곳의 사정을 알아볼 생각이었다. 완연한 가을 날씨였다. 찐빵 세 개로 하루를 지내고 신경(장춘)행 밤차를 탔다. 아침에 도착하니 봉천보다 더 추웠다. 영락없는 늦가을 날씨였다. 집 잃은 개처럼 하루 종일 거리를 헤매다보니 날이 저물었다. 조선 사람으로 보이는 행인을 붙잡고 일자리를 물었으나 성과가 없었다. 직업소개소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날은 저물었지만 찐빵 한 개로 끼니를 해결하고 종일 거리를 걷다보니 배도 고프고 극도의 피로가 엄습했다. 변두리로 가니 자동차 폐차장이 있었다. 폐차에 들어가 앉으니 배고픈 것도 잊은 채 잠이 먼저 찾아왔다. 정신없이 자다 몹시 추워 잠을 깼다. 입고 있는 옷이 여름옷이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거기다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새벽부터 내리기 시작했다. 아침이 되었으나 갈 곳이 없었다.
중국인 늙은이가 폐차장으로 오더니 무어라고 지껄이며 나를 차에서 끌어 내 밖으로 쫒아냈다. 나는 하는 수없이 비 내리는 시내로 다시 발길을 돌렸다. 빗물과 눈물이 범벅이 되어 배고프고 추위에 떠는 현재의 상황이 고달프고 고향의 부모님이 그립기만 했다. 무작정 걷다보니 어느 뒷골목을 지나고 있었다. 쓰레기통 위에 도시락 같은 것이 하얀색 종이에 싸여진 채 놓여있었다. 뜯어보니 나무껍질로 만든 도시락에 하얀 쌀밥과 고급 요리가 빼곡하게 들어있었다. 어느 일본인이 새벽까지 연회를 하고 돌아가는 길에 선물로 받은 것을 놓고 간듯했다. 나는 생각할 틈도 없이 고기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고기를 씹으려는 순간 ‘거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 굶어 죽을지언정 거지는 되지 말자.’며 입에 들어있던 고기조각을 뱉어냈다. 나는 도시락을 다시 덮어두고 그 골목을 빠져나왔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만큼은 배가 고프다는 생각이 사라졌다.
저녁 무렵까지 비를 맞으며 정처 없이 거리를 헤매다가 ‘일본 영사관 경찰서’라고 쓰인 간판을 발견했다. ‘그렇다면 이곳 어디엔가 조선인이 살고 있겠지.’라고 생각하는 찰나 추위와 굶주림에 기진맥진 했는지 길바닥에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마침 경찰서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보초의 도움으로 초소 안으로 안내를 받았다. 뜨거운 엽차를 한 모금 마시니 정신이 조금 드는 듯 했다.
조선 땅의 일본 순경보다 복장도 화려했지만 인상도 좋고 친절했다. 같은 일본인인데 판이하게 다른 것이 정말 일본인 순경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나의 사정을 다 들은 순경은 어디론가 전화를 하더니 나에게 약도를 한 장 그려주었다. 상세하게 잘 그려준 약도 덕분이기도 하고 거리가 잘 정돈되어 있는 곳이라 그다지 헤매지 않고 목적지를 찾을 수 있었다.
그곳은 ‘자강회(自彊會)’라는 곳이었다. 일본인 협객이 운영하는 일종의 구호기관이었다. 사무실로 들어가니 중년의 일본여인이 나를 반가이 맞이했다. 비에 흠뻑 젖은 나의 몰골이 불쌍했는지 난로 옆으로 나를 앉히고 따끈한 차를 한 잔 날라다주었다. 여인은 우선 내 이름 석 자를 장부에 적게 한 후 실내를 안내해주었다. 어느 문을 열고 들어가니 15평가량 되어 보이는 크기의 식당에 간이 식탁이 몇 개 놓여있고 한쪽에는 그릇장과 큰 솥이 서너 개 걸려있었다.
주방에서는 한 남자가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수수죽을 끓이고 있었다. 눈썹이 진하고 키가 작지만 뚱뚱한 것으로 보아 일본인이 틀림없었다. 다른 문을 열고 들어가니 10여 평 되는 다다미방이었다. 노인에서 젊은이까지 여섯 명 정도가 방에 앉아있었다. 중국인도 조선인도 아닌 듯 했다. 체구가 건장한 젊은이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일본인들이었다.
부인이 방의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하고 나는 선입자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여인에게 잠옷을 한 벌 빌려 입고 비에 젖은 내 옷은 벗어서 난방기 옆에 걸려있는 줄에 널었다. 잠시 후 철판을 치는 소리가 들리자 누군가가 식사를 하러 가자고 했다. 잠옷 차림으로 그들을 따라나서니 좀 전에 지나온 식당으로 들어갔다. 중국식 대접에 수수죽이 가득 담겨 식탁에 놓여있었다. 단무김치 몇 조각을 곁들여 먹었다. ‘고량진미’가 바로 이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맛이 있었다. 내가 하도 맛있게 먹고 있으니 옆에 앉은 노인이 “모자라면 통에 있으니 더 먹어도 괜찮다.”며 친절하게 귀띰해주었다. 그러나 나는 더 먹고 싶지도 않았고 더 먹을 수도 없었다. 며칠을 굶다시피 하다 따뜻하고 구수한 죽을 먹으니 배가 금방 불러왔다.
한편 일본인도 이렇게 좋은 일을 하는 자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일어나려고 하니 옆 노인이 자기 식기는 각자 씻어서 그릇장에 넣어두는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그가 말 한대로 내 식기를 정리하고 방으로 돌아오니 노인이 61번이 적힌 옷장을 가리키며 침구가 들어있다고 알려주었다. 옷장을 열어보니 감색 이불과 요, 베게가 들어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두세 명 씩 모여 앉아 신문이나 잡지를 읽기도 하고 책을 가운데 놓고 나지막한 소리로 토론을 하기도 했다. 나는 난방기 옆에 앉아 있다가 그동안의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오는 듯 꾸벅거리고 있었다. 친절한 노인이 다시 다가와 “고단하면 먼저 자도 괜찮소.‘라고 했다. 그래도 나보다 모두 나이가 많은 사람들만 있었기에 정중히 사양하고 취침시간이 오기를 기다리겠다고 했다. 그러자 어느 한 중년 일본인이 나를 들여다보며 ”조선양반의 자제인가 보구려.“라며 말을 걸었다.
무심코 주위를 둘러보니 방 한쪽 구석에서 짐을 챙기는 사람이 있었다. ‘이곳을 떠나는 사람인가보다.’라고 혼자 생각하며 그를 물끄러미 보고 있는데 그가 다가왔다. 조금 전에 본 그 건장한 조선청년이었다. 그는 일본말을 했지만 억양이 조선 사람의 일본말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는 북지나에 직장을 구해서 내일 새벽에 떠날 예정이라고 했다. 이곳 회장이 일자리를 알선해주었다는 것이다. 그는 만나자마자 이별이라고 아쉬워하며 자신이 쓰던 비누와 수건, 치약 등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하찮은 물건이지만 그 때만큼 동포애를 강하게 느낀 적이 없으리라.
다음 날 새벽 누군가가 나를 깨웠다. 일본여인이었다. 새로 들어온 사람은 청소를 하는 것이 규칙이라며 함께 청소를 하자고 했다. 우선 화장실을 쓸고 물을 뿌리고 나서 조그마한 정원을 비로 쓰는 것이 전부였다. 청소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오니 모두들 일어나 각자의 침구를 챙겨 옷장에 넣고 있었다. 노인의 침구는 한 젊은이가 정리해주었다. 이런 곳에도 경로사상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아침식사도 수수죽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5,6명 씩 한 조가 되어 어디론가 나가려고 했다. 나도 그 중 한사람으로 헌 작업복과 ‘지가다비’라고 하는 노동할 때 신는 신발을 신고 무리를 따라나섰다. 일본인들은 담배도 피우고 잡담도 하며 때로는 콧노래도 흥얼거리며 3km쯤 떨어진 변두리 철도기관 창고가 있는 거리에 도착했다.
인적이 드물고 통행하는 자동차도 없는 곳에 자리한 대형 창고 뒤편으로 가서 손수레를 끌고 나와 도로 청소와 드문드문 있는 가옥들 앞에 서있는 쓰레기통도 비웠다. 수레에 쓰레기가 가득 차면 부근 웅덩이로 끌고 가 버렸다. 열시쯤 되니 사람들은 더 이상 일을 하려고 하지 않았고 열한시쯤 되자 돌아가자고 했다. 숙소로 돌아와 손발을 씻고 점심식사를 했다. 놀랍게도 쌀밥이 듬뿍 담겨져 식탁이 차려져있었다. 반찬으로 일본식 배추김치와 된장국이 나왔다.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가 한 시간쯤 쉰 듯 했다. 오후 한 시쯤 되자 모두들 벽에 걸려있는 검도복을 입으며 내게도 입으라고 했다. 도복 입는 법을 잘 모르는 나에게 사람들은 친절하게 시범을 보여주었다. 죽도까지 한 개씩 들고 나오니 좀 전에 식당이었던 곳이 검도연습장으로 바뀌어있었다. 그곳에서 검도연습을 한 후 땀을 씻고 나니 오후시간은 자유롭게 즐길 수 있다고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외출을 하고 나와 노인만 숙소에 남아있었다. 나는 하룻밤 푹 자고 났더니 피로도 많이 풀린 듯 했다. 혼자 남아 쓸쓸해 보이는 노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더니 반갑게 대꾸해주었다. 그는 일본에 고향이 있지만 의지할 곳 없는 외톨이에다 나이가 많아서 일을 할 형편도 못되는 가련한 처지였다. 젊어서는 어떻게 지냈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의 아픈 곳을 건드리게 될까봐 그만 두었다.
나는 ‘자강회’라는 기관의 정체가 궁금해 노인에게 물었다. 생각보다 간단했다. 한 일본인에 의해 만들어진 기관으로 만주에 와 직업을 못 구한 사람이나 나처럼 무작정 불청객들을 구제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 ‘실업자 구호’라는 명분으로 시청에서 청소작업을 하청 받는데 그저 하는 척만 해도 되는 가벼운 일거리들이었다. 청소작업을 해주는 대가로 돈을 받는 것 때문에 구설수에도 오른다고는 하지만 오갈 곳 없는 자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것 자체는 선을 행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회장은 미남형의 건장한 중년 일본인인데 검도 5단의 실력자라고 했다. 그는 관동군 헌병사령부의 검도사범을 맡고 있었다. 관동군 헌병사령관이라면 그 세력이 관동군 사령관과 동등한 위치라는 것을 후일에 알았다.
여하간 자강회에 머물면서 위기를 면한 나는 일을 하고 조금씩 받는 일당을 모아 두툼한 내의와 방한화 등을 마련했다. 중국인들이 운영하는 ‘쇼도루 시장’이라고 있었는데 당시에는 중국의 명물이었다. 좀도둑들이 훔쳐온 물건들을 판매하는 특수한 시장이라 가격도 놀라울 만치 저렴하다. 시장에서 사온 의복은 중고였기 때문에 깨끗하게 세탁을 하니 제법 고가품이어서 그 해 겨울을 비교적 춥지 않게 지낼 수 있었다.
자강회 생활이 어느덧 한 달쯤 지났을 때다. 회장부인이 상냥한 목소리로 나를 사무실로 불렀다. 통관업과 운송업을 하는 회사가 있는데 가보지 않겠느냐고 했다. 일단은 직업이 필요했던 나는 여인이 준 봉투를 들고 운수회사로 찾아갔다. 회사의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았으나 직원이 십여 명되고 중국인 노동자는 수십 명 되었다. 지금의 6톤 트럭만한 마차도 60여대나 있었다. 자동차가 없는 것이 이상했으나 그 곳은 마차가 보편화되어 있었다.
첫날은 숙소에서 귀엽게 생긴 중국인 소년들과 함께 목침대에서 쉬고 다음날 새벽부터 ‘쿠리’(중국인 노동자)의 점검에 나섰다. 사무실 뒤에 있는 공터에 약 100명가량이 모여 있었다. 나와 함께 나간 일본인이 그들의 등 뒤에 분필로 일련번호를 써 넣으라고 했다. 그리고 5명 혹은 10명 씩 조를 나누어 일본인 한 명이 그들을 데리고 어디론가 향해 갔다. 나는 며칠이고 같은 일을 반복했다. 우선 추운 겨울이나 지나면 다른 일을 찾아보기로 하고 그대로 그곳에서 일을 했다. 나의 임무는 자전거를 타고 세관이나 거래선에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이었다.
한 번은 어느 거리를 지나는데 규모가 꽤 큰 소학교가 있었고 교정에는 수백 명이 넘는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우리 조선말과 노래가 들려왔다. 그 시절 조선 땅에서는 초등학교에서도 조선말을 금지했었다. 아이 한 명당 딱지를 열 장씩 주고 아이들끼리 서로 감시를 하게 하는 것이다. 즉 어떤 아이가 조선말을 하면 옆에서 들은 아이는 딱지 한 장을 빼앗을 수 있다. 조선말을 자주 하면 그만큼 딱지를 빼앗기게 되는 것이다. 열 장의 딱지를 모두 빼앗긴 아이는 큰 벌을 받고 반대로 딱지를 많이 빼앗은 아이는 상을 받는다. 일본 놈들은 이런 비굴한 방법으로 우리말조차 말살하려고 했는데 중국의 그 학교에서는 어떻게 우리말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지 신기하기만 했다.
아이들의 조선말 노랫소리를 들으며 우두커니 서있는데 중년 사내 한 명이 엿목판을 메고 가위를 철컥거리며 다가왔다. 그도 분명히 조선 사람이었다. 학교 근처에 엿장수가 있는 것은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도 나도 모르게 그 모든 상황이 신기하기만 했다. 그 후부터 나는 틈만 나면 그 학교의 앞에서 서성거리다 돌아오곤 했다. 그러는 사이 그 부근이 조선 사람이 많이 사는 조선인촌이라는 것과 학교는 조선인만 다니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학교 앞에 갈 때마다 엿장수 사나이를 만났다. 자주 보게 되면서 눈인사도 하고 그에게서 엿도 사먹게 되었다. 나중에는 서로의 신상에 대해 이야기를 할 정도로 친해졌다.
그런데 그 엿장수는 행색이 남루하지만 느낌이 보통 엿장수와는 달랐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한번은 이런 말을 했다. “이곳의 일본인들은 조선 사람을 대하는 것이 부드럽더군요.”라고. 그러자 그의 대답은 의외였다. “이 대륙을 그들이 경영하기에는 그들의 숫자가 적고 또 중국인보다는 조선인이 훈련이 잘되어 있어 조선인을 자기네 앞잡이로 이용하려는 술책이요.”라는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나칠 정도로 일본인을 비난했다. 나는 슬그머니 겁이 났다. 혹시 이자가 일본인 첩자인데 나의 속셈을 떠보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의 말에 대꾸를 하지 않고 좀 더 두고 보기로 했다.
그와 접촉이 잦아지면서 우리는 결국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우리도 힘을 기르면 우리 땅에서 일본을 몰아낼 수 있다는 확신은 그도 나도 같았다. 그에게서 우리 독립군 이야기나 상해 임시정부 이야기도 들었다. 그를 알게 되고 두 달쯤 지나서인 것 같다.
하루는 어느 절의 경내에 있는 소나무 숲에서 그와 만났는데 나에게 정보를 한 가지 알려주었다. 봉천에 있는 야나세부대라고 하는 장갑차부대가 있는데 병사를 모집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부대는 공식적으로는 만주괴뢰정권의 군대지만 관동군의 촉탁기관으로 관동군의 보조역할을 하는 군대였다.
그는 나더러 그 부대에 지원하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물론 조선인도 지원이 가능한 군대였지만 나에게 일본군대에 지원하라고 하는 그의 말이 의심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그를 믿기로 하고 나 역시 원래부터 군인이 되고 싶었기 때문에 군인의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는 기회로 삼기로 하고 지원을 결심했다. 나는 소정의 서류를 구비해서 제출하고 12월 중순에 시험을 치렀다. 시험에서 상위권으로 합격하고 1938년 1월 1일에 입대했다.
그 당시의 상황을 정리해본다. 일본은 중국의 영토인 만주를 침략하고 소위 만주제국이라는 괴뢰정권을 세워 대륙침공의 발판으로 삼았다. 또한 관동군이라는 막강한 군대를 배치해 내부적 군정을 행했다. 관동군이라고 하면 울던 아이도 울음을 그친다고 할 정도로 그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국가행사나 의식 등이 치러질 때도 단상에는 소위 ‘만주국 황제’라는 자와 관동군 사령관이 나란히 자리를 하고 앉는다. 서로가 동등한 지위에 있음을 말하는 듯 했다. 그러나 관동군을 운영하는 군 예산은 만주국의 국민들이 내는 세금으로 충당했다.
그들의 전략은 ‘점’을 먼저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 점을 움직여 선을 만들고 다시 그 선을 움직여 면을 만드는 전술로 그처럼 광활한 만주 땅을 강점하고 괴뢰정권을 세워 군정을 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일본군의 자작극인 ‘노구교사건’을 구실로 만리장성의 남쪽 즉 북부중국까지 쳐들어가 북경을 거쳐 상해와 남경까지 진격했다.
그 무렵 일본 국내에서는 물론 조선에서까지도 전승기분에 도취되어 군국주의가 극도로 팽창해있었고 따라서 침략군의 군비조달로 혈안이 되어있었다. 일본은 특히 조선식민정책으로 우리글과 우리의 성씨, 이름까지 말살하려고 했고 모든 자원은 물론 노동력까지 착취하고 있었다. 헐벗고 굶주리는 환경에 처해있던 우리 민족은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또한 조선청년의 지원병제도는 우리의 젊은 청년들의 피와 생명을 강탈해갔다. 그뿐이랴. 모자라는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서 청장년을 징용이라는 명분 아래 무차별하게 끌고 갔다.
조선 국내에서는 그렇듯 긴장이 고조된 분위기에서 국민들이 살고 있었지만 만주에서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지원병 제도도 징병도 없었고 누구나 근면하게 일하면 잘 살 수 있는 환경이었다. 도시에서는 장사나 노동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고 도시를 떠나 오지로 가면 미개척지가 끝없이 펼쳐져있었다. 약간의 자본과 노동력만 있으면 농지를 무제한으로 개척할 수도 있었다.
나는 만주에 와있는 일본인들을 관찰했다. 조선에 있는 자들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우월감은 더러 보였으나 교만하거나 흉악하고 이유 없이 타민족을 학대하는 일은 다소 덜 했다. 또한 자기들에게 협조를 잘하고 착실한 조선 사람들에게는 동등한 대접을 해주기도 했다. 그런 분위기라면 돈도 모으고 입신출세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는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야 느낀 일들이다.
5. 야나세 부대 I
‘야나세 부대......’ 내 기억에 영원히 남아있는 단어일 것이다. 입대를 하기는 했지만 왠지 조국과 민족을 배신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단순히 군대지식을 배우고자 하는 목적이었을 뿐 일본에 충성하는 군인이 아니며 또 일본군의 군인이 아닌 것도 다행한 일이라고 자기변명과 자위를 하며 지내야했다.
입대절차가 끝나고 묘하게 생긴 군복을 배급받았다. 다섯 가지 색으로 그려진 별이 붙은 군모와 노란 콩알만 한 별 하나가 새겨진 자주색 계급장이 달린 두툼한 방한복 같은 군복으로 갈아있었다. 거기다 큼직한 방한화를 신고 나서니 흡사 사진에서나 보던 북극탐험대원처럼 보였다.
장교들은 거의가 일본인이었고 비전투원인 군의관이나 경리장교는 조선인이나 중국인이 대부분이었고 사병들은 조선인이 절반쯤, 일본인이 25퍼센트 가량 중국인이 그 나머지를 차지했다. 그 출신들을 살펴보면, 조선인은 나처럼 실업자가 대부분이었고 일본인은 일본군에서 탈락한자들이었다. 따라서 학력들이 대부분 낮았다. 그러나 중졸이나 대졸 출신도 더러 끼어있었다. 중국인은 놀랍게도 대부분이 친일파의 자제들로 학력도 높았고 일본말도 유창하게 했다.
이번에 지원한 인원은 약 2백 명 정도로 2개 중대로 편성되었다. 고참병이 약 1백 명 정도 있었으나 이들은 부대창설요원으로 사무행정이나 노역에 종사했기 때문에 군인답지가 않았다.
다음날부터 훈련이 시작되었다. 우선 소총을 한 자루씩 지급받아 그것을 들고 부동자세에서부터 시작했다. 기초에서부터 분대, 소대, 중대훈련을 한다고 했다. 오후에는 장갑차훈련이 있었다. 장갑차라고 하지만 대형 화물자동차 위에 철갑을 올려놓은 정도였다. 그리고 기관총 몇 자루와 50밀리 대전차포 한 대가 장비의 전부였다.
기관총이나 포의 사격훈련도 하겠지만 자동차 조종술부터 먼저 배워야 한다고 했다. 상차, 하차 즉 차에 오르고 내리는 것부터 시작해서 자동차 운전술, 자동차 공학 등 꽤 전문성 있는 과목들이었고 장갑차 전술도 익혀야 했다. 이 과목 역시 단독정찰에서 분대, 소대, 중대의 공격, 방어 등으로 내용이 다양했다.
교관은 일본인 장교였으며 조교는 조선인 하사관이 대부분이었다. 운전조교들은 전직 운전사 중에서 특채로 임명했고 군사조교는 타 전투부대에서 전입된 자들로 구성되었다.
내무반 생활을 살펴보기로 한다. 날도 채 밝기 전에 기상해서 점호를 마치고 간단한 체조가 끝나면 아침식사를 한다. 식사는 고량밥(잡곡밥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곳의 고량은 조선의 쌀과 다름없이 찰지고 맛도 있다.)에 간단한 반찬과 국 한 그릇이 나왔다. 양은 항상 모자랐다. 군대경험자는 알겠지만 신병 훈련기간에는 아무리 많이 먹어도 양이 모자란다. 배가 고파서가 아니고 마음이 고파서라는 표현이 맞을 듯싶다. 아침식사를 마치면 그날의 일과가 시작된다.
저녁에 내무반에 돌아와서는 식사당번이 배급하는 식사를 하고 식기를 씻어 주머니에 넣어 매달아둔다. 그리고 ‘에리후’라는 헝겊조각이 있는데 상의 목 부분에 때가 타지 않도록 부착하는 것으로 매일 깨끗한 것으로 바꿔 주어야 한다. 침구를 깔고 일석점호를 받는다. 까다로운 당직 장교에게 걸리면 곤욕을 치르기도 한다. 점호가 끝나면 약 30분 정도 자유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담배도 피울 수 있지만 말로만 자유시간이지 선임이 성화라도 부리면 그나마도 내 시간을 갖지 못한다.
밤 9시가 되어 취침나팔소리가 울리면 일제히 소등을 하고 취침을 한다. 새벽
내 나이가 70살이 넘고 보니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저절로 과거의 일들이 머리에 떠올라 더러는 뚜렷하게 더러는 희미하게 눈앞에 아물거리기에 두서없이 고생스러웠던 일들과 즐거웠던 일들을 기록으로 남기려한다.
나의 성격이 어려서부터 강직해서 불의와 타협할 줄 몰랐고 따라서 절친한 친구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또한 청렴을 신조로 했기에 재물에 관심이 적어서 재산을 축적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이 세상은 나의 그러한 뜻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지는 않았다. 불의와 타협 하지 못하고 그것을 배격하면 오히려 중상모략이 되어 돌아오기도 했다. 청렴을 신조로 살다보니 금전이나 재산이 부정한 존재로도 보였고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 어쩔 수 없는 필요악이라고 생각했다. 정당하지 못하게 들어오는 금품을 물리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내가 재물을 싫어하니 재물도 나를 싫어했는지 지금까지 여유 있게 살아본 적이 없으나 후회는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의 호도 청강(淸强)이라고 정했다. 맑고도 강하다는 뜻이 담겨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학교선생님이나 부모님으로부터 남을 속이거나 남의 물건을 탐내면 안 된다고 배워왔다. 그런데 내가 살아온 세상은 그렇지가 않았다. 부정을 하는 자가 정직하게 사는 사람들보다 오히려 더 출세하고 부당한 방법으로 축재도 많이 할 수 있는 세상이었다. 나는 어느 저명하신 스님께 이 모순에 대하여 물었다. “불교에서는 ‘인과응보’라는 말이 있어서 좋은 일을 하면 좋은 결과가 있고 나쁜 일을 하면 나쁜 결과가 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으니 어찌 된 일이냐?”고 물었다.
그가 말하기를, “사람에게는 전세와 현세 그리고 내세가 있어서 전세에서 적선을 많이 한 자는 현세에서 좋지 않은 일을 조금만 해도 전세에서의 적선으로 상쇄가 된다.”고 했다. 그러니 “현세에서 적선을 많이 하면 내세에 가서 잘 살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 말에 나는 반신반의 했다. 나는 인간의 내세라는 것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무종교주의는 결코 아니다. 나의 종교관은 내세 즉, 극락이나 천당을 위한 것이 아니고 현세를 위한 것이다. 성인 석가모니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잘 배우고 그대로 선을 행하면 스스로 마음이 편하고 세상을 아름답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름다운 세상에서 마음이 편하다면 그 곳이 바로 극락이고 천국이리라.
나의 이러한 인간성을 알고서 이 글을 읽는다면 이해에 도움이 될 줄 안다. 또한 이 글은 문학적인 것이 아니기에 문장에 미사여구를 쓰지 않았다. 그저 내가 생각나는 그대로를 기록했고 나는 한글세대가 아니어서 철자법이나 띄어쓰기가 충분하지 않아 남의 도움을 받았다. (나의 자손들이) 이 글을 읽고 느끼는 점이 한 가지라도 있다면 돋보기를 쓰고 떨리는 손으로 어깨, 팔의 통증을 참아가며 쓴 일에 다소나마 보람을 느끼리라.
2. 유년기
마한의 고도인 익산 읍은 북쪽으로는 미륵산이 펼쳐져있고 동쪽으로는 용화산과 시대산의 봉우리가 이어져 북풍을 막아주며 서쪽으로는 오금산이 서해에서 불어오는 해풍을 가려주고 남쪽으로는 바다와 같이 광활하게 펼쳐지는 만경평야가 자리 잡고 있다. 주위 산에는 아름드리 노송들이 빼곡하게 서있었고 읍내 북단을 흐르는 시냇물은 바닥의 모래가 훤히 보일 정도로 맑아서 붕어와 메기 등 물고기들이 많이 뛰놀았다. 아름드리 버드나무와 느티나무는 그 잎이 마치 구름처럼 풍성했다. 읍내를 가로질러 흐르는 개울에서는 파란 물새가 송사리 사냥을 하는 풍경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읍내 중앙에는 이 고을 수령의 집무실인 등현과 육방관속의 관아를 비롯하여 객사, 곡간 등이 즐비했고 동구 밖 산기슭에는 행교가 자리 잡고 그 위엄을 떨치고 있었으며 남쪽에는 선비 한량들이 문무를 연수하는 사정이 있었다.
평화스러웠던 그곳이 나의 9대 조부님 때부터 정착한 곳이며 따라서 나의 고향이다. 선대 조부님들께서는 대대로 관직벼슬을 지내시어 형편도 무난 하셨고 재산도 천석꾼까지는 못되었어도 지방거족으로 풍요롭게 사셨다.
내가 뵌 3대 조부님 즉 증조부님은 호리호리한 키에 하얀 수염이 인상적이었는데 여름철 하얀 모시소단에 통영갓 차림으로 푸른 들판 두렁길을 지나가실 때는 흡사 신선과도 같았다. 그 어른은 벼슬이 정3품에 이르렀고 재산도 몇 백석은 하신 듯 했다. 또한 문장과 문필이 그 지방에서는 따를 자가 없었다고 한다. 더구나 신학문을 이해하시고 구한말에는 계명학교라는 사립초등학교를 세우셨는데 후에 공립으로 개편됨과 동시에 교장에 취임하셨다. 그 학교가 나도 다닌 금마공업보통학교이다. 나는 나의 증조부님이 창립하신 학교의 19기 졸업생이다.
이렇듯 이조말기까지 평화스럽기만 하던 우리 집안이 기울어지기 시작한 것은 외세의 침략이 그 원인이었다. 증조부님 슬하에는 4남 1녀가 계셨다. 그 장남이 나의 조부님이시다. 조부님은 부잣집 맏아들로 호강하며 자랐고 독서당을 차리고 글공부도 하셨다고 한다. 적령기에 결혼도 하시어 나의 아버지이신 큰 아들을 낳으셨다. 그러나 그 시대의 사정은 우국지사들을 평화롭게 두지 않았다. 나의 조부님도 기울어가는 국운을 바로 세우겠다는 충정으로 고향과 부모형제 그리고 처자를 모두 버리고 집을 나서게 되셨다. 그리고 국내외로 동분서주 하셨으나 세월이 흐르며 대세가 더 기울어져 결국 한일은 합병이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부님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조국독립과 주권회복에 심신을 바쳤고 3.1만세 당시에는 민족대표 48인 가운데 한 명으로 일본에 특사로 건너가셨던 사실은 우리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광복 후에 정부로부터 건국과 독립유공자로 훈장도 추서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 사람들은 일본에 아부하지 않고 적대시하는 자들은 정신 못 차리는 놈으로 몰아 낙인을 찍고 배척하기 일쑤였다. 조부님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증조부님은 장손인 나의 아버지가 계신대도 불구하고 일본말도 잘 하고 일본인에 밀착하고 친일하는 막내아드님인 종조부님에게 적지 않은 재산을 물려주셨다. 나의 아버지는 소년 시절에는 부잣집 장손으로 어려움 없이 글도 배우고 자라셨으나 그 후로는 이러한 가정적 변화로 인하여 희망도 깨지고 그의 숙부의 모진 학대와 박해로 조모님을 모시고 집을 나오셨다. 거기에 일본경찰들의 지독한 감시까지 받으며 살아야 했다.
그때부터 모진 가난과 싸워야 하는 조모님과 아버지의 고생은 참혹함 그 자체였다. 글도 끝까지 배우지 못했고 물론 농사일도 익히지 못하신 아버지는 소위 ‘반거청이’가 되어야 했으나 어머님 한 분 모셔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모든 역경을 감당하신 것 같았다.
설상가상으로 일본경찰은 독립운동가의 자식이라고 아무런 혐의도 없는데 그들의 국경일이 다가오면 예비검속이라는 명분으로 아버지를 주재소 유치장에 구금하기도 했다. 조모님도 일갓집을 두루 돌며 허드레 일을 해주고 연명하셨다고 하고 아버지는 객지로 방황하시며 일정의 탄압을 피하셨다고 들었다.
모자는 수십 년간 이러한 풍진 속에서 이사를 거듭하다가 아버지 나이 27세에 결혼하셨다. 그 당시 27세 총각이라면 환갑진갑 다 지난 노총각이었다. 모두가 가난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그 혼인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조부님의 헌신적인 조국독립운동을 흠모하시던 외조부님이 고이 기른 큰따님을 노총각에게 선뜻 내주시어 사위를 삼으시고 독립지사와 사돈의 인연을 맺었다고 들었다.
그 후 젊은 어머니는 친가 바로 옆에 초가삼간을 마련하시어 조모님을 모시고 신접살림을 꾸렸으나 아버지는 역시나 정착할 수가 없었는지 집에 머무는 날이 많지 않았다. 세 분의 고생이 여전한 가운데 세월은 흘러 5년 후에 내가 태어났다. 1917년 6월 3일 정사년 4월 13일이었다. 내가 태어난 날도 역시 아버지는 집에 안 계셨고 내 나이 세 살 때 비로소 집으로 돌아오셨다.
불이 나고 홍수가 밀려와도 유실될 재산이 없는 철저히 가난한 집에 태어난 나는 바로 이웃인 외가에서 유년기의 대부분을 보냈다. 당시 외가에는 어린아이가 없어 유난히 어린이를 귀여워하시는 외조부님과 큰 외숙 내외분들에게 둘러싸여 어려움 없이 자랐다. 외가는 중농쯤 되어서 생활형편은 비교적 넉넉했다.
외조모님은 어머님이 소녀시절에 작고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외숙모들의 우애와 화목으로 집안이 늘 조용하고 평화스러웠다. 나는 이런 평화스러운 집안의 사랑을 한 몸에 독차지하고 버릇없이 자랐고 귀하게만 지낸 탓인지 성격은 고집쟁이가 되었다. 어머니는 나의 고집스러운 성격을 많이 걱정하셨으나 아버지는 오히려 나를 두둔해주셨다. “사나이라면 일단 마음먹고 시작한 일을 무슨 일이 있어도 끝장을 보아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다.
다섯 살 때라고 기억한다. 이른 봄에 오산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갔다. 가산을 물려받으신 종조부께서 그곳으로 자리를 옮기시고 농사를 많이 지으시며 아버지에게 함께 농사를 짓자고 제안을 하셨다. 이사는 갔으나 농사를 지을 농토를 주는 것이 아니고 행랑방 한 칸을 주며 하인 부리듯 했고 어머니는 그 댁 식모나 다름없이 혹사만 당했다. 사실은 모자라는 일손을 채우기 위한 종조부의 간교한 수작이었던 것이었다. 머슴을 두어도 추수가 끝나면 새경이라고 해서 일 년 치 노임을 지불하는데 우리는 겨우 네 식구 먹고 사는 것으로 그만이었다. 주야로 일만 하느라 헤어진 옷을 갈아입을 새 옷 한 벌 지을 돈도 주지 않아서 누더기 같은 옷을 걸치고 있던 부모님의 몰골이 지금도 뚜렷하게 내 기억에 남아있다.
부모님은 이듬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셨다. 그 때부터 아버지는 집을 비우거나 객지로 나가는 일을 삼가 하셨다. 자그마한 밭을 얻어 농사짓는 일과 철 따라 장사를 하시면서 나와 내 동생들을 기르셨다.
나는 다섯 살 때부터 한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글을 배워야 하는지 몰랐다. 어른들이 가르쳐주는 대로 앵무새처럼 외우기는 했으나 글자의 뜻을 몰랐다. 가끔 어머니의 무서운 회초리를 맞기도 했다. 발갛게 피가 맺힌 종아리를 끌어안고 울고 있으면 아버지께서 찬물로 씻어주시고 장터에서 사온 신식 약을 발라주시며 주머니에서 슬며시 눈깔사탕을 꺼내주셨다. 이러는 사이에 천자문과 동문선습 등 초급한문을 습득했다. 반면 골목대장으로도 활약을 하는 유년기를 보냈다.
보통학교 개구쟁이
조모님께서 지어주신 검정색 광목 두루마기에 검정 고무신을 신고 외조부님의 손을 잡고 고을에 있는 보통학교에 갔다. 보통학교라지만 교실이라고는 네 칸 밖에 없었고 옛날 원님(군수)이 정사를 보던 동현의 옛 건물이 몇 채 있을 뿐이었다. 운동장도 없었고 군데군데 물이 고인 웅덩이가 있는 조그마한 뜰이 있을 뿐인데도 제법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거렸다. 그런 소란 속에서 어렴풋이 나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누군가가 내 손을 왈칵 끄는 충격으로 정신을 차리고 보니 큼직한 돌 위에 서신 곰보선생님 한 분이 명부를 들여다보며 내 이름을 다시 불렀다.
외조부님이 대답하라고 나지막한 소리로 말씀하셨으나 목구멍이 막히기라도 한 듯 말소리가 나오지를 않았다. 가까스로 “예.”라고 대답하며 나서니 “허, 그놈, 장군이 하나 왔구나!” 하며 내려다 보셨다. 아마 그 때 내가 쓰고 간 모자가 눈에 뜨인 듯 했다. 서울에 계신 조부님께서 맏손자가 어느덧 자라서 학교에 들어간다고 하니 모자를 한 개 사서 보내주신 것이다. 지금도 그 모자가 눈에 선명하게 보이는 듯하다. 진남색 벨벳모자는 앞에 채양이 달려있고 화려한 금줄로 장식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번쩍거리는 모표가 붙어있었다. 입학생 사오십 명 중 이런 신식 모자를 쓴 아이는 나 하나밖에 없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최창규 선생님을 따라 교실로 들어가 지정된 자리에 앉았다. 내 자리는 가장 앞줄에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나보다 모두 몸집이 크고 키도 크고, 코 밑이 거무스름한 아이도 있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장가를 가 자식을 둔 유부남이었다. 채 씨 성을 가진 아이와 내가 가장 키가 작았고 나이도 가장 어렸다. 나는 내가 작은 것이 불만스러웠고 자존심 상하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무엇이든 제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보다 다들 키도 크고 기운도 셌다. 그래서 나는 운동장에서 놀 때는 상급생하고만 놀았고 싸워도 나보다 큰 녀석들만 골라서 싸웠다. 싸우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나보다 크고 비단옷을 입고 거들먹거리는 녀석들이 어찌나 아니꼽게 보이는지 그런 녀석들만 골라서 싸웠다.
한 번은 숙명적인 싸움을 했다. 읍에서 조금 떨어진 농촌의 지주 아들인데 얼굴도 곱상하고 공부도 잘 했으나 운동장에 나오면 자기 집 소작인 자식들을 못살게 굴었다. 그 놈의 그런 행위가 어찌나 역겨운지 참다못해 흠씬 두들겨 주었다. 그 자는 나보다 체격도 크고 힘도 셌지만 나의 분노에는 당해내지를 못했다.
당시 같은 반에는 소위 행세 좀 한다는 양반의 자식과 지주의 자식, 서민의 자식, 무당, 백정, 소작인의 자식들이 골고루 섞여 있었다. 즉 누구나 글을 배울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당에는 양반자식들만이 다녔기에 비교가 되었다. 이야기가 잠시 옆길로 나갔지만 숙명적인 싸움이 다름 아닌 해방 이후로 연결된다.
그 녀석은 부모덕으로 일본까지 가서 대학도 다녔다. 그런데 어디서 어떻게 물이 들었는지 새빨간 물이 든 공산당이 되어 나와 총을 맞대고 싸워야 하는 처지가 되었고 끝내는 나의 부하의 총탄에 의해 저 세상으로 보내졌지만 그래도 어린 시절 친구를 처단해야 한다는 상황에 고민도 했었다.
이야기는 제자리로 돌아가서, 학교에 간다는 것이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그저 가야하니 가는 것이구나.’라는 단순한 생각으로 아침이 되면 책 보따리를 옆구리에 끼고 학교로 향했다. 웬만큼 익숙해질 무렵 나 혼자서 학과시간표를 볼 줄 알게 되었다. 그 전까지는 부모님께서 그날 배우는 교과서와 공책을 시간표대로 골라서 책보에 싸주시면 그대로 가지고 다녔다. 그러던 중 한 번은 벽에 붙은 시간표를 무심코 들여다보니 무엇을 뜻하는지 알 것 같았다. 어찌나 좋은지 어머니를 불러대며 월화수목! 하며 시간표를 읽어 내려갔다. 어머니도 신기해하시며 대견스러워 하셨다.
한 번은 큰 소동이 벌어졌다. 어린 아이들은 대개가 공부하며 뛰어노느라 고단해서 늦잠을 자게 마련이다. 시간이 되면 어머니가 나를 깨워서 세수를 시키고 밥을 먹여 등교시간에 늦지 않게 보내는 게 일상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은 잠을 깨보니 집안에 인기척이 없고 해는 중천에 떠있었다. 나는 이만저만 당황한 게 아니었다. ‘아차, 늦었구나! 학교시간에 지각 아니 아마 끝났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니 울음도 안 나오고 막연하다 못해 말문이 막혀버렸다. 우두커니 책보만 끌어안고 앉아있으니 밖에서 어머니 말소리가 들렸다. 어머니가 들어오시더니 “많이도 잤구나.”하시며 아무런 걱정의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이런 대사건에 이리도 무관심 하실까.’ 생각하니 어머니마저 미워졌다. 어머니의 태연함에 더욱 겁이 났다. 그러자 조모님이 들어오셨다.
조모님은 가난하기는 해도 양가집 며느리답게 곱게 늙으셨으며 조부님 즉 남편의 소위 ‘속 못 차리는 행위’로 몸과 마음고생을 많이 하셔서 조금은 겁도 많으셨지만 첫손자인 나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치 귀여워 하셨다. 이렇게 귀여운 손자가 갑자기 벙어리가 되어버린 것 같아 일대소동이 일어나서 집안은 물론이고 온 동네가 떠들썩해졌다.
그러나 나는 이제부터 학교도 못 가고 산에 가서 나무나 해야 할 일을 생각하니 말문이 영원히 닫히고 말 것 같았다. 돌연한 소동에 외가의 막내딸이자 보통학교에 다니는 이모가 달려왔다. 이모를 어머니 다음으로 좋아하는 나는 이모를 보자마자 의아했다. 어째서 이모도 학교에 가지 않았는지? 아니면 학교가 이미 끝나서 돌아온 건지? 나는 속삭이듯 “이모, 학교 갔다 왔어?”하고 물었다. 옆에서 당황하고 계시던 조모님께서 “얘가 벙어리가 된 게 아니구나!” 하시면서 기쁨의 울음을 터뜨리셨다. 이모는 “애가 공일인 줄도 모르고 있네.” 하며 알밤을 하나 주었다. 그 알밤이 아픈 줄도 몰랐다. 나는 그제야 ‘공일이라는 것이 있었구나.’ 하며 처음으로 일요일을 알았고 일요일은 학교에 가지 않고 노는 날이며 정말로 좋은 날도 다 있다고 생각했다. 그 사건의 원인은 공일이었다.
일요일이라 어머니는 나를 깨우지 않으셨고 나는 한나절까지 늦잠을 자다가 벙어리가 될 뻔하고 그 후로는 어머니가 깨워주지 않으셔도 스스로 일어나 그 날 시간표대로 책을 챙겨 학교에 가는 꼬마가 되었다. 조모님은 늦잠을 자는 동생들에게 “늦잠 자면 벙어리가 된다.”고 새로운 이론(?)으로 꾸중을 하셨다. 이래서 늦잠 자는 버릇도 없어지고 벙어리 소동도 잊혀졌다.
2학년 때였던 것 같다. 학교에서 무슨 행사가 있던 날로 기억된다. 교실칸막이를 터서 강당을 만들고 전교생이 모두 모여 앉았고 읍내 높은 어른들도 모두 와서 옆자리에 앉았다. 수백 명이 모였는데도 대단히 조용했다. 무슨 행사인지는 모르나 누군가를 불러내고 서고 앉고 하며 행사가 진행되었다. 그러던 중 사회를 보던 선생님이 갑자기 내 이름을 부르셨다. 그러자 우리 반 최 선생님이 어리둥절 하는 나에게 빨리 나오라고 손짓을 하시기에 영문도 모르고 대머리 일본인 교장 앞으로 나갔다. 무엇인지 모르지만 꽤 크고 빳빳한 종이에 붓글씨로 굵은 글자가 쓰인 종이 한 장을 주기에 받아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내빈석 앞을 지나오는데 평소 호랑이처럼 무서워하던 이 고을 면장님(집안 할아버지)이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며 칭찬하시는 듯 하는 말씀을 했지만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집에 돌아오니 이모와 외삼촌이 와 있었다. 그리고 개근상을 탔다는 것을 처음 알았고 또 개근상이란 일 년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학교에 다닌 것을 칭찬하는 상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공부를 잘 해서 받은 상이 아니라서 매우 섭섭했다. 내년에는 나도 큰 아이들보다 공부를 잘 해서 우등상을 타리라고 혼자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러나 우등상은 한 번 밖에 타지 못했다.
38등 우등생
나보다 몸도 크고 나이도 많은 아이들 틈에 끼어서도 그런대로 공부를 했다. 일학년 일 학기가 끝나고 여름방학이 왔다. 이모가 방학을 하면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러면 시냇가에 가서 붕어도 잡고 맑은 물에서 멱도 감을 수 있어서 생각만 해도 날아갈 듯 좋았다. 그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방학이었다.
방학 날 선생님이 무슨 그림책 같은 것과 공책크기의 빳빳한 종이 한 장 씩 나누어 주셨다. 무엇인지 모르나 한문과 숫자가 쓰여 있었다. 도장도 두어 개 찍혀있었다. 선생님이 주시는 대로 받아가지고 집에 돌아오니 마루에서 바느질을 하시던 어머니가 통신표를 내놓으라고 하셨다. “통신표?” 통신표가 무엇인지 몰랐다. 선생님이 주신 그림책과 종이를 드렸다. 어머니는 그 종이를 보시고 한 숨을 길게 쉬시며 무서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셨다. 그렇게 무서운 어머니의 눈은 세상에 태어나 처음이었다. 일학년 40명 중에서 38등이란다. 그 게 무슨 말인지 몰랐다. 그게 무엇이냐고 물으니 어머니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시며 “너의 반 40명 중에서 네가 38번째로 공부를 잘 했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어머니의 무서운 눈초리가 없어진 것과 몇 번째가 되었든 잘 했다는 말씀에 그만 우쭐했고 할머니께도 자랑했다. 밖에서 돌아오신 아버지에게 매달리며 내가 학교에서 38번째로 공부를 잘 했다고 자랑하며 상으로 새 고무신을 사달라고 졸라댔다. 아버지는 “잘 했다. 잘 했어!” 하시며 슬그머니 나가시더니 새 고무신을 사들고 오셨다. 운동화가 아직 없었던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다음 이 학기에서는 좀 더 잘 하고 삼 학기에는 10번째 안에 들어야 한다.”며 자세하게 가르쳐주셨다. 그 때는 일 년이 3학기로 나누어져 있었다.
지금 생각하며 호랑이처럼 무서우면서도 인자하신 아버지가 그리워진다. 그리고 혼자서 곰곰이 생각하니 뜀박질을 해도 먼저 가는 놈이 일등이니 공부도 잘 하는 놈이 1등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학기부터는 외가 이모한테 가서 공부를 했더니 26등을 했다. 어머니의 무서운 눈초리는 안 보였지만 그리 만족한 얼굴은 아니었다. 3학기는 더 잘하리라고 혼자서 다짐하고 열심히 했으나 21등 밖에 못했다.
‘나의 능력이 이게 전부구나.’라는 생각도 했다. 2학년이 되어서는 첫 학기에 19등을 했다. 몸도 크고 나이도 많은 아이들과 경쟁을 하기에는 너무나 힘겨웠다. 그 후 10등에서 20등 사이를 오르내리며 보통학교를 졸업했다.
3. 소년기
진학의 꿈
방 안에서 웅크리고 앉아있으니 졸업식 노래인 ‘호사루노 히커리’가 들려왔다. 졸업식 날인데 나는 수업료 3개월 치가 밀려 정학을 당해 등교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학교 앞으로 가 나무사이로 낡은 목조건물의 교실을 바라보았다. 아직 3월이라 유리 창문이 닫혀있어 실내가 잘 보이지 않았지만 학생들 모두가 검정색 두루마기를 입고 있어 실내가 더 어둡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조금 있으니 출입구를 통해 검정두루마기들이 손에 커다란 종이를 한 장씩 들고 쏟아져 나왔다. 그중에는 학부형들도 섞여있었다. 그들이 내가 서 있는 정문 쪽으로 몰려나오기에 나는 길가의 큰 버드나무 고목 뒤에 몸을 숨기고 그들을 부럽게 바라보았다.
그때 누군가 나의 어깨를 툭 쳤다. 돌아보니 아이아빠였다. “이거, 선생님이 너 같다주래.”하며 종이 한 장을 건네주었다. 신문지보다는 조금 작은 크기에 두툼한 종이에 적힌 졸업장이었다. 선생님이 아닌 친구를 통해 전달받은 졸업장을 받아드니 지난 6년간의 희로애락이 머릿속으로 스쳐지나갔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흘러 졸업장으로 떨어졌다. 놀란 아이아빠가 소맷자락으로 내 얼굴을 닦아주는 바람에 나는 정신이 들었다. 그와 나는 개울의 돌다리에 앉았다. 이제는 아이아빠도 더 이상 못 본다고 생각하니 또 다시 눈물이 나왔다. “형은 고등보통학교(중고등학교를 통합한 5년제 중등학교)에 간다지?”하며 물었다. 그는 “응, 방도 하나 구해서 살림도 다 갖다놓고 며칠 있으면 이사를 갈 거여.”라며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지금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중학교 1학년생이 처자와 함께 살림을 하면서 공부를 한다니 말이다. 그러나 그 시대에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나는 가난 때문에 보통학교를 힘들게 졸업했지만 상급학교로 진학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기숙사비용만 내면 학비가 면제되는 공업학교도 있었고 사범학교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 집안형편으로 한 달에 50원쯤 하는 기숙사 비용을 내기는 무리였다. 고민을 하다가 서울에 가서 고학이라고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책 보따리를 짊어지고 조부님이 계시는 서울로 향했다.
당시 조부님은 어느 출판사에서 일하셨다. 국문사전을 집필하시는 것 같았다. 나는 서울로 온 뜻을 조부님께 말씀드렸다. 그러나 조부님은 D신문사에서 일하시는 당숙부님을 부르시더니 나를 S상업학교에 입학시키라고 분부하셨다. 그러나 당숙은 내가 거처할 곳이 없어 그럴 수가 없다고 말했다. 조부님은 서조모님의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있어 방이 여유가 없었고 결국 당숙이 나에게 방을 한 칸 내주어야 하는데 그게 못마땅한 것이었다.
2, 3일 후 조부님께서는 상황이 어려우니 나더러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하셨다. 누구의 도움 없이 고학을 하겠다는 각오로 상경했는데 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일이 이상하게 전개됐다. 어느 곳이라도 좋으니 일자리를 소개해달라는 나의 부탁마저도 당숙은 거절했다. 그렇다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무작정 거리로 나서서 굶주림과 추위에 헤매다가 일본인이 운영하는 고급 하숙집에 일자리를 얻었다. 굶주림과 노숙은 면했지만 공부할 시간은 전혀 없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고 잠자는 시간도 서너 시간에 불과했으니까.
그러나 그 집에서 밥 짓는 법이나 간단한 음식 만드는 법도 배웠다. 아침식사가 끝나면 온 집안을 청소해야 했다. 여주인이 어찌나 까다로운지 마루에 티끌만한 먼지 한 톨만 있어도 난리를 쳤다. 빗자루로 쓸고 난 후 손바닥으로 다시 쓸어 확인해가며 청소를 해야 했다. ‘남의 밥을 얻어먹는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금쪽같은 시간을 허비하면서 밥이나 얻어먹자고 서울에 온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곳을 그만 두었다. 일본인 세탁소나 사진관 등등으로 전전해보았으나 역시 공부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차라리 집에 돌아가 부모님을 도와가며 독학을 하는 편이 낫겠다 싶은 생각으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내가 서울에서 겪은 이야기를 들으신 조모님은 격노하셨다. “조실부모하고 고아가 된 어린 것을 거두어 가르쳐놓으니 배은망덕한 자로구나!”라며 당숙부를 비난하셨다.
나는 철도원이 될 생각으로 철도강의록을 주문해 공부했다. 1년 과정의 교과내용을 6개월 만에 마치고 보통학교 시절 나의 담임이었던 일본인 선생님을 찾아가 의논했다. 선생님은 나의 실력을 테스트하더니 “이 정도면 용인(철도 최하급직원)시험은 합격할 것이다.”며 인정해주었다. 나는 용기를 얻어 철도당국에 서류를 갖추어 원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서류는 되돌아왔다. 철도 고위층의 추천서가 없다는 것이 서류 반송의 이유였다. 그 당시에는 그런 자리들까지도 일본인들이 독차지하려고 조선인을 배척했다.
그럭저럭 1년을 허송세월하는 사이 조모님이 돌아가시고 동생들도 더 태어났다. 집안형편은 갈수록 더 어려워지기만 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자인 내가 집안일을 돕는 것이 급선무라는 것을 깨닫고 공부는 나중으로 미루게 되었다.
장남
아버님이 하시는 일도 신통치가 않았다. 배고프다고 우는 동생들을 보면서 나는 장남으로서의 책임감을 저버릴 수 없었다. 내 한 몸 입신양명하기 보다는 집안을 가난에서 구하는 일을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했다. ‘자본 없이도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나 같은 소년을 고용하는 노동판은 없는가?’ 여러 각도로 고민을 해보았으나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생각 끝에 조부님께 장사밑천으로 십 원만 주실 것을 부탁드리는 편지를 드렸다. 며칠 후 당숙으로부터 답장이 왔다. 내용은 ‘계란 한 개를 병아리로 부화시켜 기르면 큰 닭이 되고 그 닭이 또 알을 낳고 또 부화시키면 병아리가 되고......’라는 사연이었다. 옳은 말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달걀 한 개도 수중에 없었고 닭을 기를 동안 먹고 살 것도 없는 형편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조부님은 나에게 돈을 보내주라고 당숙부에게 분부하셨는데 당숙부는 위의 사연만 보내온 것이었다.
나는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절대로 남에게 의지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궁리 끝에 장터 자전거포로 가서 하루에 25전씩 내기로 하고 자전거 한 대를 빌렸다. 그리고 제과점에 가서 과자를 외상으로 얻었다. 센베이와 눈깔사탕, 박하사탕, 꽃사탕 등을 봉지에 한 근씩 담아 대나무 통에 담아 자전거에 싣고 산간벽지 구멍가게로 다니며 한두 봉지씩 팔았다. 하루에 스물대여섯 근 정도 팔면 수입이 괜찮았다. 자동찻길도 없는 두메산길로 다니다가 인심이 후한 구멍가게 주인을 만나면 더러 점심밥을 얻어먹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점심을 굶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하루 장사를 마치고 과자 값과 자전거 세를 지불하면 15전에서 20전 정도의 이익이 남는다. 남은 돈으로 쌀을 한 봉지 사서 집으로 들어가면 동생들이 까만 눈동자를 깜박이며 제비들처럼 나를 기다리고 있다. 바로 아래 여동생은 제법 밥도 잘 지었다. 여동생이 부엌에서 쌀을 씻어 밥솥에 불을 지피고 있으면 어머니가 어디를 다녀오시는지 힘없이 돌아오신다. 아마 이웃집에 쌀을 빌리러 가셨다고 빈 손으로 돌아오시는 듯 했다. 쌀 한 봉지로 두 끼니를 먹어야 해서 저녁에는 야채를 넣어 죽을 끓여 먹어야하는 때도 있었다.
과자장사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내 경쟁자가 나타나고 나처럼 자전거를 세내어 다니는 사람보다 자기 소유의 자전거를 가지고 장사를 하는 사람이 경쟁에서 유리했다. 나는 과자장사를 포기하고 숙부님에게 빌린 3원으로 중고자전거를 한 대 구입했다. 자전거에 사각형 대나무바구니를 달아 생선을 싣고 다니며 장사에 나섰다. 내가 사는 곳에서 백리쯤 떨어진 어항에 가서 생선을 사다가 산골마을 사람들에게 판매하니 과자장사보다는 이익이 조금 더 많았다. 우리읍내에 일본인들이 아홉 가구나 사는데 이들과 단골이 되면 좋으련만 그들의 입맛에 맞는 고급생선을 살 수 있는 자금이 없었다. 조선인들이 좋아하는 싸구려 생선만 사다가 판매하니 이익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새벽부터 집에서 출발해 어항에 다녀오면 늦은 저녁이 된다. 다음날 이른 아침부터 생선을 팔아야 다시 어항에 가서 생선을 사올 수 있었다. 하루는 새벽부터 비가 내려 전날 사온 생선을 팔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도 비를 맞으며 집집마다 돌았다. 어느 집 싸리문을 무의식적으로 열고 들어가니 집주인이 마루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그만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자세히 보니 일가친척 되는 아저씨였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집에서 나왔다.
그런데 길에서 김 선생님을 만났다. 나중에 공산당 사건에 연류 되어 고생하신 분인데 비에 흠뻑 젖은 나를 보시더니 “무슨 일이냐?”고 물으셨다. 비가 와서 생선을 못 팔고 있다고 대답하니 자기 집으로 가자고 하셨다. 생선 있는 것 모두를 바닥에 털어놓고 부인을 부르시더니 소금에 절여두라고 하시며 생선 값도 후하게 주셨다. ‘하물며 남도 이렇게 후하게 정을 베푸는데 일가친척이라는 자들이 그렇게 야박하게 할 수 있을까.’ 어린 소견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한 번은 어항에 갔더니 주꾸미가 많이 잡혀왔다. 그 다음날이 우리 읍내 장날이기도 해서 이걸 사다 팔아야겠다는 생각으로 한 통을 샀다. 밤늦게까지 먹통을 떼어내어 다듬고 씻었다. 동생들이 옆에서 먹고 싶어 하기에 조금씩 먹이고 다음날 장터에 나가 화로에 숯불을 피우고 귀 떨어진 큼직한 냄비에 데쳐서 양념장과 함께 내놓으니 작은 것은 1전, 큰 것은 2전씩 받아도 얼마 지나지 않아 동이 났다. 원가 1원을 제외하고도 1원 50전이 남았다. 다른 생선에 비해 팔기도 쉽고 이익도 더 많이 남았다. 이익금으로 쌀을 한 말 사고 나무도 한 짐 사니 마치 부자라도 된 기분이었다. 장남으로서의 임무를 조금은 해낸듯했다.
그러나 ‘생선장수를 하는 것이 나의 전부는 아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장래에는 남보다 앞선 사람이 되어야한다는 생각을 저버리지 않았다.
4. 청년기
이렇게 부모님을 돕고 동생들을 보살피는 사이 소년기도 거의 지나고 청년기에 접어들기 시작하면서 아버지의 형편도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았다. 그때 나는 결심했다. 발전이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다가는 평생 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좀 더 안정된 생활을 위해 기반을 쌓아야했다. 그래서 집을 떠나기로 했다. 아버지 나이도 50세가 넘지 않으셨으니 아직 활동을 할 수 있고 집안형편도 좀 나아졌으니 새로운 일을 도모해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K라는 동창이 있었다. 그의 집 사정은 우리보다는 나은 편이었으나 중학교에 갈 형편은 못되었다. 그는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화물자동차 조수로 들어가 운전을 배웠다. 이제는 면허도 취득해 어엿한 운전수로 일하며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사람들보다 월급도 더 많이 받았다. 나도 운전수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그에게 찾아가 사정이야기를 했더니 그는 쾌히 승낙을 하고 다음날부터 나를 자기의 조수로 채용했다. 그런데 호사다마라고 회사가 망하는 바람에 그와 나는 졸지에 실직자가 되고 말았다. 8원씩 받던 월급도 못 받게 되어 막막했다.
그러나 이왕이면 큰 도시로 가자고 생각하고 서울로 갔다. 서울의 한 소형자동차 정비공장에 일자리를 얻었다. 사장인 고 씨는 나를 잘 보았는지 무척 아껴주었고 월급도 적지 않게 주었다. 매월 월급을 받으면 숙식비와 용돈을 제외하고 집에도 조금씩 보내드렸다. 장남의 구실을 하기 위해서였으리라. 일도 그다지 어려운 것은 아니었지만 운전수나 정비사로 일생을 보낼 수 없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다. 해방 후 그를 다시 만났을 때 그는 고백이라도 하듯 말했다. “내게 아들이 없어서 자네를 잘 길러 내 후계자로 삼을 생각이었네.”라며 아쉬워했다.
27전
두 차례에 걸쳐 서울 생활을 하는 동안 여러 직장을 경험했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나올 때마다 주인들은 나를 붙잡으며 더 있어 줄 것을 간곡히 청했다. 내가 특별한 인재도 아닌데 왜 그러는 것일까 생각해보니 굳이 이유가 있다면 무슨 일이든 정성스럽고 알뜰하게 내 일처럼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의 성격이 어릴 적부터 꼼꼼하고 완벽주의였다는 것을 내 자신도 알고 있다.
고 씨의 공장에서 약 1년을 지냈다. 정비기술도 많이 익혔고 신참신분도 면하니 고참들에게 괄시도 덜 받게 되었다. 그때도 역시 일을 차근차근 잘 처리했기 때문에 고참들도 어려워하는 일을 해낼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사장이나 고참들도 나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정비사라는 직업에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 무렵 북지사변(**1937년 7월 7일 화베이에서 일어난 제2차 중일전쟁)이 확장일로에 있었다. 우리 공장에서 함께 일하던 일본인 한 사람이 병역에 소집되어 젊은 아내와 낳은 지 두 달 밖에 되지 않은 딸을 두고 떠나는 모습을 보았다. 전쟁이란 이런 몰인정한 것이런가. 개인의 사정은 도외시 하고 막강한 군대를 동원해 남의 나라를 침략하여 강탈하고 정복자로 군림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일본에 강점당한 우리 조선도 막강한 군대가 있다면 침략자를 물리치고 국토를 되찾을 수 있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지자 ‘나도 만주에 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한 계획이나 목적은 없었지만 그저 가보고 싶었고 가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때는 9월 초였지만 아직 여름 날씨였다. ‘무작정 상경’이 아닌 ‘무작정 도만’이 되었다. 여분의 내의나 양말 한 켤레 챙기지 않은 채 맨주먹으로 경성(서울)을 떠났다. 우선 신경(장춘)까지 차표를 끊어 기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는 어김없이 떠났다. 차창 밖으로 차츰 낯선 풍경들이 보이기 시작하니 갑자기 겁이 났다.
수중에 돈도 없고 친척이나 친구도 없는 낯설고 말조차 통하지 않는 타국으로 가고 있는 것이었다. 중간에 차에서 내려 돌아갈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남아가 한번 뜻을 세우고 떠난 길 어찌 그대로 돌아갈 것 인가.’ 하는 옛 시 한 구절을 마음속으로 낭송하며 결심을 더욱 다졌다. 그 다음날 저녁 무렵이 되어 압록강 철교를 건넜다. 그때 무심코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니 동전이 잡혔다. 27전이 남아있었다. 다시 한 번 겁이 났다. 새삼 내가 무모한 일을 저지르고 있다고 느껴졌다.
27전은 찐빵 서너 개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잠은 어디서 잘 것이며 끼니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나를 기다리는 이 아무도 없고 자리를 비워두고 나를 기다리는 직장도 없다. 그러나 후일 생각하니 그 27전이 내 인생을 반전시킨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27’이라는 숫자를 좋아한다.
그 다음날 아침에 봉천(신양)에서 도중하차했다. 그곳의 사정을 알아볼 생각이었다. 완연한 가을 날씨였다. 찐빵 세 개로 하루를 지내고 신경(장춘)행 밤차를 탔다. 아침에 도착하니 봉천보다 더 추웠다. 영락없는 늦가을 날씨였다. 집 잃은 개처럼 하루 종일 거리를 헤매다보니 날이 저물었다. 조선 사람으로 보이는 행인을 붙잡고 일자리를 물었으나 성과가 없었다. 직업소개소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날은 저물었지만 찐빵 한 개로 끼니를 해결하고 종일 거리를 걷다보니 배도 고프고 극도의 피로가 엄습했다. 변두리로 가니 자동차 폐차장이 있었다. 폐차에 들어가 앉으니 배고픈 것도 잊은 채 잠이 먼저 찾아왔다. 정신없이 자다 몹시 추워 잠을 깼다. 입고 있는 옷이 여름옷이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거기다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새벽부터 내리기 시작했다. 아침이 되었으나 갈 곳이 없었다.
중국인 늙은이가 폐차장으로 오더니 무어라고 지껄이며 나를 차에서 끌어 내 밖으로 쫒아냈다. 나는 하는 수없이 비 내리는 시내로 다시 발길을 돌렸다. 빗물과 눈물이 범벅이 되어 배고프고 추위에 떠는 현재의 상황이 고달프고 고향의 부모님이 그립기만 했다. 무작정 걷다보니 어느 뒷골목을 지나고 있었다. 쓰레기통 위에 도시락 같은 것이 하얀색 종이에 싸여진 채 놓여있었다. 뜯어보니 나무껍질로 만든 도시락에 하얀 쌀밥과 고급 요리가 빼곡하게 들어있었다. 어느 일본인이 새벽까지 연회를 하고 돌아가는 길에 선물로 받은 것을 놓고 간듯했다. 나는 생각할 틈도 없이 고기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고기를 씹으려는 순간 ‘거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 굶어 죽을지언정 거지는 되지 말자.’며 입에 들어있던 고기조각을 뱉어냈다. 나는 도시락을 다시 덮어두고 그 골목을 빠져나왔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만큼은 배가 고프다는 생각이 사라졌다.
저녁 무렵까지 비를 맞으며 정처 없이 거리를 헤매다가 ‘일본 영사관 경찰서’라고 쓰인 간판을 발견했다. ‘그렇다면 이곳 어디엔가 조선인이 살고 있겠지.’라고 생각하는 찰나 추위와 굶주림에 기진맥진 했는지 길바닥에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마침 경찰서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보초의 도움으로 초소 안으로 안내를 받았다. 뜨거운 엽차를 한 모금 마시니 정신이 조금 드는 듯 했다.
조선 땅의 일본 순경보다 복장도 화려했지만 인상도 좋고 친절했다. 같은 일본인인데 판이하게 다른 것이 정말 일본인 순경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나의 사정을 다 들은 순경은 어디론가 전화를 하더니 나에게 약도를 한 장 그려주었다. 상세하게 잘 그려준 약도 덕분이기도 하고 거리가 잘 정돈되어 있는 곳이라 그다지 헤매지 않고 목적지를 찾을 수 있었다.
그곳은 ‘자강회(自彊會)’라는 곳이었다. 일본인 협객이 운영하는 일종의 구호기관이었다. 사무실로 들어가니 중년의 일본여인이 나를 반가이 맞이했다. 비에 흠뻑 젖은 나의 몰골이 불쌍했는지 난로 옆으로 나를 앉히고 따끈한 차를 한 잔 날라다주었다. 여인은 우선 내 이름 석 자를 장부에 적게 한 후 실내를 안내해주었다. 어느 문을 열고 들어가니 15평가량 되어 보이는 크기의 식당에 간이 식탁이 몇 개 놓여있고 한쪽에는 그릇장과 큰 솥이 서너 개 걸려있었다.
주방에서는 한 남자가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수수죽을 끓이고 있었다. 눈썹이 진하고 키가 작지만 뚱뚱한 것으로 보아 일본인이 틀림없었다. 다른 문을 열고 들어가니 10여 평 되는 다다미방이었다. 노인에서 젊은이까지 여섯 명 정도가 방에 앉아있었다. 중국인도 조선인도 아닌 듯 했다. 체구가 건장한 젊은이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일본인들이었다.
부인이 방의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하고 나는 선입자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여인에게 잠옷을 한 벌 빌려 입고 비에 젖은 내 옷은 벗어서 난방기 옆에 걸려있는 줄에 널었다. 잠시 후 철판을 치는 소리가 들리자 누군가가 식사를 하러 가자고 했다. 잠옷 차림으로 그들을 따라나서니 좀 전에 지나온 식당으로 들어갔다. 중국식 대접에 수수죽이 가득 담겨 식탁에 놓여있었다. 단무김치 몇 조각을 곁들여 먹었다. ‘고량진미’가 바로 이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맛이 있었다. 내가 하도 맛있게 먹고 있으니 옆에 앉은 노인이 “모자라면 통에 있으니 더 먹어도 괜찮다.”며 친절하게 귀띰해주었다. 그러나 나는 더 먹고 싶지도 않았고 더 먹을 수도 없었다. 며칠을 굶다시피 하다 따뜻하고 구수한 죽을 먹으니 배가 금방 불러왔다.
한편 일본인도 이렇게 좋은 일을 하는 자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일어나려고 하니 옆 노인이 자기 식기는 각자 씻어서 그릇장에 넣어두는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그가 말 한대로 내 식기를 정리하고 방으로 돌아오니 노인이 61번이 적힌 옷장을 가리키며 침구가 들어있다고 알려주었다. 옷장을 열어보니 감색 이불과 요, 베게가 들어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두세 명 씩 모여 앉아 신문이나 잡지를 읽기도 하고 책을 가운데 놓고 나지막한 소리로 토론을 하기도 했다. 나는 난방기 옆에 앉아 있다가 그동안의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오는 듯 꾸벅거리고 있었다. 친절한 노인이 다시 다가와 “고단하면 먼저 자도 괜찮소.‘라고 했다. 그래도 나보다 모두 나이가 많은 사람들만 있었기에 정중히 사양하고 취침시간이 오기를 기다리겠다고 했다. 그러자 어느 한 중년 일본인이 나를 들여다보며 ”조선양반의 자제인가 보구려.“라며 말을 걸었다.
무심코 주위를 둘러보니 방 한쪽 구석에서 짐을 챙기는 사람이 있었다. ‘이곳을 떠나는 사람인가보다.’라고 혼자 생각하며 그를 물끄러미 보고 있는데 그가 다가왔다. 조금 전에 본 그 건장한 조선청년이었다. 그는 일본말을 했지만 억양이 조선 사람의 일본말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는 북지나에 직장을 구해서 내일 새벽에 떠날 예정이라고 했다. 이곳 회장이 일자리를 알선해주었다는 것이다. 그는 만나자마자 이별이라고 아쉬워하며 자신이 쓰던 비누와 수건, 치약 등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하찮은 물건이지만 그 때만큼 동포애를 강하게 느낀 적이 없으리라.
다음 날 새벽 누군가가 나를 깨웠다. 일본여인이었다. 새로 들어온 사람은 청소를 하는 것이 규칙이라며 함께 청소를 하자고 했다. 우선 화장실을 쓸고 물을 뿌리고 나서 조그마한 정원을 비로 쓰는 것이 전부였다. 청소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오니 모두들 일어나 각자의 침구를 챙겨 옷장에 넣고 있었다. 노인의 침구는 한 젊은이가 정리해주었다. 이런 곳에도 경로사상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아침식사도 수수죽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5,6명 씩 한 조가 되어 어디론가 나가려고 했다. 나도 그 중 한사람으로 헌 작업복과 ‘지가다비’라고 하는 노동할 때 신는 신발을 신고 무리를 따라나섰다. 일본인들은 담배도 피우고 잡담도 하며 때로는 콧노래도 흥얼거리며 3km쯤 떨어진 변두리 철도기관 창고가 있는 거리에 도착했다.
인적이 드물고 통행하는 자동차도 없는 곳에 자리한 대형 창고 뒤편으로 가서 손수레를 끌고 나와 도로 청소와 드문드문 있는 가옥들 앞에 서있는 쓰레기통도 비웠다. 수레에 쓰레기가 가득 차면 부근 웅덩이로 끌고 가 버렸다. 열시쯤 되니 사람들은 더 이상 일을 하려고 하지 않았고 열한시쯤 되자 돌아가자고 했다. 숙소로 돌아와 손발을 씻고 점심식사를 했다. 놀랍게도 쌀밥이 듬뿍 담겨져 식탁이 차려져있었다. 반찬으로 일본식 배추김치와 된장국이 나왔다.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가 한 시간쯤 쉰 듯 했다. 오후 한 시쯤 되자 모두들 벽에 걸려있는 검도복을 입으며 내게도 입으라고 했다. 도복 입는 법을 잘 모르는 나에게 사람들은 친절하게 시범을 보여주었다. 죽도까지 한 개씩 들고 나오니 좀 전에 식당이었던 곳이 검도연습장으로 바뀌어있었다. 그곳에서 검도연습을 한 후 땀을 씻고 나니 오후시간은 자유롭게 즐길 수 있다고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외출을 하고 나와 노인만 숙소에 남아있었다. 나는 하룻밤 푹 자고 났더니 피로도 많이 풀린 듯 했다. 혼자 남아 쓸쓸해 보이는 노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더니 반갑게 대꾸해주었다. 그는 일본에 고향이 있지만 의지할 곳 없는 외톨이에다 나이가 많아서 일을 할 형편도 못되는 가련한 처지였다. 젊어서는 어떻게 지냈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의 아픈 곳을 건드리게 될까봐 그만 두었다.
나는 ‘자강회’라는 기관의 정체가 궁금해 노인에게 물었다. 생각보다 간단했다. 한 일본인에 의해 만들어진 기관으로 만주에 와 직업을 못 구한 사람이나 나처럼 무작정 불청객들을 구제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 ‘실업자 구호’라는 명분으로 시청에서 청소작업을 하청 받는데 그저 하는 척만 해도 되는 가벼운 일거리들이었다. 청소작업을 해주는 대가로 돈을 받는 것 때문에 구설수에도 오른다고는 하지만 오갈 곳 없는 자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것 자체는 선을 행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회장은 미남형의 건장한 중년 일본인인데 검도 5단의 실력자라고 했다. 그는 관동군 헌병사령부의 검도사범을 맡고 있었다. 관동군 헌병사령관이라면 그 세력이 관동군 사령관과 동등한 위치라는 것을 후일에 알았다.
여하간 자강회에 머물면서 위기를 면한 나는 일을 하고 조금씩 받는 일당을 모아 두툼한 내의와 방한화 등을 마련했다. 중국인들이 운영하는 ‘쇼도루 시장’이라고 있었는데 당시에는 중국의 명물이었다. 좀도둑들이 훔쳐온 물건들을 판매하는 특수한 시장이라 가격도 놀라울 만치 저렴하다. 시장에서 사온 의복은 중고였기 때문에 깨끗하게 세탁을 하니 제법 고가품이어서 그 해 겨울을 비교적 춥지 않게 지낼 수 있었다.
자강회 생활이 어느덧 한 달쯤 지났을 때다. 회장부인이 상냥한 목소리로 나를 사무실로 불렀다. 통관업과 운송업을 하는 회사가 있는데 가보지 않겠느냐고 했다. 일단은 직업이 필요했던 나는 여인이 준 봉투를 들고 운수회사로 찾아갔다. 회사의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았으나 직원이 십여 명되고 중국인 노동자는 수십 명 되었다. 지금의 6톤 트럭만한 마차도 60여대나 있었다. 자동차가 없는 것이 이상했으나 그 곳은 마차가 보편화되어 있었다.
첫날은 숙소에서 귀엽게 생긴 중국인 소년들과 함께 목침대에서 쉬고 다음날 새벽부터 ‘쿠리’(중국인 노동자)의 점검에 나섰다. 사무실 뒤에 있는 공터에 약 100명가량이 모여 있었다. 나와 함께 나간 일본인이 그들의 등 뒤에 분필로 일련번호를 써 넣으라고 했다. 그리고 5명 혹은 10명 씩 조를 나누어 일본인 한 명이 그들을 데리고 어디론가 향해 갔다. 나는 며칠이고 같은 일을 반복했다. 우선 추운 겨울이나 지나면 다른 일을 찾아보기로 하고 그대로 그곳에서 일을 했다. 나의 임무는 자전거를 타고 세관이나 거래선에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이었다.
한 번은 어느 거리를 지나는데 규모가 꽤 큰 소학교가 있었고 교정에는 수백 명이 넘는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우리 조선말과 노래가 들려왔다. 그 시절 조선 땅에서는 초등학교에서도 조선말을 금지했었다. 아이 한 명당 딱지를 열 장씩 주고 아이들끼리 서로 감시를 하게 하는 것이다. 즉 어떤 아이가 조선말을 하면 옆에서 들은 아이는 딱지 한 장을 빼앗을 수 있다. 조선말을 자주 하면 그만큼 딱지를 빼앗기게 되는 것이다. 열 장의 딱지를 모두 빼앗긴 아이는 큰 벌을 받고 반대로 딱지를 많이 빼앗은 아이는 상을 받는다. 일본 놈들은 이런 비굴한 방법으로 우리말조차 말살하려고 했는데 중국의 그 학교에서는 어떻게 우리말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지 신기하기만 했다.
아이들의 조선말 노랫소리를 들으며 우두커니 서있는데 중년 사내 한 명이 엿목판을 메고 가위를 철컥거리며 다가왔다. 그도 분명히 조선 사람이었다. 학교 근처에 엿장수가 있는 것은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도 나도 모르게 그 모든 상황이 신기하기만 했다. 그 후부터 나는 틈만 나면 그 학교의 앞에서 서성거리다 돌아오곤 했다. 그러는 사이 그 부근이 조선 사람이 많이 사는 조선인촌이라는 것과 학교는 조선인만 다니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학교 앞에 갈 때마다 엿장수 사나이를 만났다. 자주 보게 되면서 눈인사도 하고 그에게서 엿도 사먹게 되었다. 나중에는 서로의 신상에 대해 이야기를 할 정도로 친해졌다.
그런데 그 엿장수는 행색이 남루하지만 느낌이 보통 엿장수와는 달랐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한번은 이런 말을 했다. “이곳의 일본인들은 조선 사람을 대하는 것이 부드럽더군요.”라고. 그러자 그의 대답은 의외였다. “이 대륙을 그들이 경영하기에는 그들의 숫자가 적고 또 중국인보다는 조선인이 훈련이 잘되어 있어 조선인을 자기네 앞잡이로 이용하려는 술책이요.”라는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나칠 정도로 일본인을 비난했다. 나는 슬그머니 겁이 났다. 혹시 이자가 일본인 첩자인데 나의 속셈을 떠보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의 말에 대꾸를 하지 않고 좀 더 두고 보기로 했다.
그와 접촉이 잦아지면서 우리는 결국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우리도 힘을 기르면 우리 땅에서 일본을 몰아낼 수 있다는 확신은 그도 나도 같았다. 그에게서 우리 독립군 이야기나 상해 임시정부 이야기도 들었다. 그를 알게 되고 두 달쯤 지나서인 것 같다.
하루는 어느 절의 경내에 있는 소나무 숲에서 그와 만났는데 나에게 정보를 한 가지 알려주었다. 봉천에 있는 야나세부대라고 하는 장갑차부대가 있는데 병사를 모집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부대는 공식적으로는 만주괴뢰정권의 군대지만 관동군의 촉탁기관으로 관동군의 보조역할을 하는 군대였다.
그는 나더러 그 부대에 지원하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물론 조선인도 지원이 가능한 군대였지만 나에게 일본군대에 지원하라고 하는 그의 말이 의심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그를 믿기로 하고 나 역시 원래부터 군인이 되고 싶었기 때문에 군인의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는 기회로 삼기로 하고 지원을 결심했다. 나는 소정의 서류를 구비해서 제출하고 12월 중순에 시험을 치렀다. 시험에서 상위권으로 합격하고 1938년 1월 1일에 입대했다.
그 당시의 상황을 정리해본다. 일본은 중국의 영토인 만주를 침략하고 소위 만주제국이라는 괴뢰정권을 세워 대륙침공의 발판으로 삼았다. 또한 관동군이라는 막강한 군대를 배치해 내부적 군정을 행했다. 관동군이라고 하면 울던 아이도 울음을 그친다고 할 정도로 그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국가행사나 의식 등이 치러질 때도 단상에는 소위 ‘만주국 황제’라는 자와 관동군 사령관이 나란히 자리를 하고 앉는다. 서로가 동등한 지위에 있음을 말하는 듯 했다. 그러나 관동군을 운영하는 군 예산은 만주국의 국민들이 내는 세금으로 충당했다.
그들의 전략은 ‘점’을 먼저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 점을 움직여 선을 만들고 다시 그 선을 움직여 면을 만드는 전술로 그처럼 광활한 만주 땅을 강점하고 괴뢰정권을 세워 군정을 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일본군의 자작극인 ‘노구교사건’을 구실로 만리장성의 남쪽 즉 북부중국까지 쳐들어가 북경을 거쳐 상해와 남경까지 진격했다.
그 무렵 일본 국내에서는 물론 조선에서까지도 전승기분에 도취되어 군국주의가 극도로 팽창해있었고 따라서 침략군의 군비조달로 혈안이 되어있었다. 일본은 특히 조선식민정책으로 우리글과 우리의 성씨, 이름까지 말살하려고 했고 모든 자원은 물론 노동력까지 착취하고 있었다. 헐벗고 굶주리는 환경에 처해있던 우리 민족은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또한 조선청년의 지원병제도는 우리의 젊은 청년들의 피와 생명을 강탈해갔다. 그뿐이랴. 모자라는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서 청장년을 징용이라는 명분 아래 무차별하게 끌고 갔다.
조선 국내에서는 그렇듯 긴장이 고조된 분위기에서 국민들이 살고 있었지만 만주에서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지원병 제도도 징병도 없었고 누구나 근면하게 일하면 잘 살 수 있는 환경이었다. 도시에서는 장사나 노동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고 도시를 떠나 오지로 가면 미개척지가 끝없이 펼쳐져있었다. 약간의 자본과 노동력만 있으면 농지를 무제한으로 개척할 수도 있었다.
나는 만주에 와있는 일본인들을 관찰했다. 조선에 있는 자들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우월감은 더러 보였으나 교만하거나 흉악하고 이유 없이 타민족을 학대하는 일은 다소 덜 했다. 또한 자기들에게 협조를 잘하고 착실한 조선 사람들에게는 동등한 대접을 해주기도 했다. 그런 분위기라면 돈도 모으고 입신출세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는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야 느낀 일들이다.
5. 야나세 부대 I
‘야나세 부대......’ 내 기억에 영원히 남아있는 단어일 것이다. 입대를 하기는 했지만 왠지 조국과 민족을 배신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단순히 군대지식을 배우고자 하는 목적이었을 뿐 일본에 충성하는 군인이 아니며 또 일본군의 군인이 아닌 것도 다행한 일이라고 자기변명과 자위를 하며 지내야했다.
입대절차가 끝나고 묘하게 생긴 군복을 배급받았다. 다섯 가지 색으로 그려진 별이 붙은 군모와 노란 콩알만 한 별 하나가 새겨진 자주색 계급장이 달린 두툼한 방한복 같은 군복으로 갈아있었다. 거기다 큼직한 방한화를 신고 나서니 흡사 사진에서나 보던 북극탐험대원처럼 보였다.
장교들은 거의가 일본인이었고 비전투원인 군의관이나 경리장교는 조선인이나 중국인이 대부분이었고 사병들은 조선인이 절반쯤, 일본인이 25퍼센트 가량 중국인이 그 나머지를 차지했다. 그 출신들을 살펴보면, 조선인은 나처럼 실업자가 대부분이었고 일본인은 일본군에서 탈락한자들이었다. 따라서 학력들이 대부분 낮았다. 그러나 중졸이나 대졸 출신도 더러 끼어있었다. 중국인은 놀랍게도 대부분이 친일파의 자제들로 학력도 높았고 일본말도 유창하게 했다.
이번에 지원한 인원은 약 2백 명 정도로 2개 중대로 편성되었다. 고참병이 약 1백 명 정도 있었으나 이들은 부대창설요원으로 사무행정이나 노역에 종사했기 때문에 군인답지가 않았다.
다음날부터 훈련이 시작되었다. 우선 소총을 한 자루씩 지급받아 그것을 들고 부동자세에서부터 시작했다. 기초에서부터 분대, 소대, 중대훈련을 한다고 했다. 오후에는 장갑차훈련이 있었다. 장갑차라고 하지만 대형 화물자동차 위에 철갑을 올려놓은 정도였다. 그리고 기관총 몇 자루와 50밀리 대전차포 한 대가 장비의 전부였다.
기관총이나 포의 사격훈련도 하겠지만 자동차 조종술부터 먼저 배워야 한다고 했다. 상차, 하차 즉 차에 오르고 내리는 것부터 시작해서 자동차 운전술, 자동차 공학 등 꽤 전문성 있는 과목들이었고 장갑차 전술도 익혀야 했다. 이 과목 역시 단독정찰에서 분대, 소대, 중대의 공격, 방어 등으로 내용이 다양했다.
교관은 일본인 장교였으며 조교는 조선인 하사관이 대부분이었다. 운전조교들은 전직 운전사 중에서 특채로 임명했고 군사조교는 타 전투부대에서 전입된 자들로 구성되었다.
내무반 생활을 살펴보기로 한다. 날도 채 밝기 전에 기상해서 점호를 마치고 간단한 체조가 끝나면 아침식사를 한다. 식사는 고량밥(잡곡밥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곳의 고량은 조선의 쌀과 다름없이 찰지고 맛도 있다.)에 간단한 반찬과 국 한 그릇이 나왔다. 양은 항상 모자랐다. 군대경험자는 알겠지만 신병 훈련기간에는 아무리 많이 먹어도 양이 모자란다. 배가 고파서가 아니고 마음이 고파서라는 표현이 맞을 듯싶다. 아침식사를 마치면 그날의 일과가 시작된다.
저녁에 내무반에 돌아와서는 식사당번이 배급하는 식사를 하고 식기를 씻어 주머니에 넣어 매달아둔다. 그리고 ‘에리후’라는 헝겊조각이 있는데 상의 목 부분에 때가 타지 않도록 부착하는 것으로 매일 깨끗한 것으로 바꿔 주어야 한다. 침구를 깔고 일석점호를 받는다. 까다로운 당직 장교에게 걸리면 곤욕을 치르기도 한다. 점호가 끝나면 약 30분 정도 자유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담배도 피울 수 있지만 말로만 자유시간이지 선임이 성화라도 부리면 그나마도 내 시간을 갖지 못한다.
밤 9시가 되어 취침나팔소리가 울리면 일제히 소등을 하고 취침을 한다.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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