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백마고지의 영웅 임익순 대령 회고록 내 심장의 파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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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6-03 18:35 조회5,085회 댓글1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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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제주도
사단장 김종오 장군도 백마고지 전승의 공로(?)로 일 계급 특진되어 타처로 영전되어 옮겼다. 나의 연대는 그 후로도 크고 작은 작전을 수행했다. 그러던 중 나는 참모총장의 특별한 배려로 제주도 모슬포의 제1훈련소로 가게 되었다. 그동안 고생이 심했으니 후방에 가서 잠시 쉬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해 성탄절 전날 제주도에 도착했다.
그날 저녁 근래에 보기 드문 호화판 성탄파티에 참석하는 영광을 얻었다. 늦게까지 마시고 놀다가 허름한 여인숙에 들어가서 밤을 지냈다. 그 날 훈련소 본부에 나가서 소장에게 신고도 하고 잘 아는 얼굴들과 인사도 나누었었다. 그런데 모두들 태엽이라도 풀린 듯 인상들이었다. 직접적인 위협이 없어 긴장이 풀린 탓도 있겠으나 나태한 분위기가 심각한 정도였다.
<하사관 학교>나는 그날로 하사관 학교 교장에 임명되었다. 내가 전선에서 근무하면서 가장 절실하게 바랐던 바는 하급지휘관의 질적인 향상이었다. 나의 숙원을 풀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훈련소에서 사병훈련을 마친 자들 가운데 성적이 우수한 자들 선발해 2개월간 분대장 교육을 시켜 분대장요원으로 배출하는 일이 하사관 학교의 임무였다. 그런데 살펴보니 교육내용이나 교장시설, 구성 등이 우리의 전선에서 요구하는 실정과는 맞지 않는 점이 많았다. 나는 과감하게 이것들을 수정하고 정리해나갔다. 그러자 미군고문관이 대단한 기세로 항의를 했다. 그는 미국식 교육을 주장했다. 나는 “우리는 미국사람도 아니고 미국군인은 더욱 아니며, 우리가 싸우고 있는 곳은 바로 우리나라 땅이다.”라고 일축했다. 얼마 후 그는 본국으로 돌아갔고 나의 의도대로 교육이 실시되었다.고등전술이라면 모르지만 분대 전투는 우리의 실정에 적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두 달 남짓 후 소장 오덕준 장군이 전선을 시찰하고 돌아와서 대단히 만족해하며 치하를 아끼지 않았다. 일선의 지휘관들이 이구동성으로 “최근에 보충되는 하사관들이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우수한 분대장 후보들이다.”고 좋아했다며 하사관 교육은 성공적이라고 했다.제주도에서의 병영생활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훈련을 마친 신병들 중에서 조금 낫다는 자들을 골라 교육을 시켜 내보내고 하는 과정이 마치 시계바늘 돌아가는 듯이 반복되었다. 지금의 제주도는 지상낙원 같다는 표현을 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말 그대로 절해고도였다. 일과를 마치면 발전기를 돌려 밝힌 희미한 전등불 아래에 가까운 친구들끼리 모여앉아 막걸리 한 잔씩 기울이는 정도 외에는 위락시설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사회였다. 일주일에 한 번씩 열리는 고문관클럽의 파티에도 파트너가 없으면 그림의 떡이었다. 간혹 육지에서 건너 온 여성 중에 춤이라도 좀 추는 사람이 있으면 심한 쟁탈전이 벌어지기도 했다.거리에서는 더러 화사한 옷차림에 진한 화장을 한 여인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장교부인이거나 미군 위안부들이라고 했는데 분간할 수는 없었다. 그러자 운전병이 차이점을 알려주었다. 손톱에 물감을 칠한 여자는 미군 위안부이고 그렇지 않은 여자는 한국군인의 부인이라고 귀띔해주었다. 그 당시 그 부근에는 비행장과 병원, 포로수용소, 병참부대 등이 모여 있었고 미국 군인들과 훈련소 관계 한국군 장교도 수백 명이 머물고 있었다.<내가 본 제주도>제주도까지 왔는데 이왕이면 이 섬을 대략이나마 살펴보자고 마음먹었다. 하사관학교 영외 훈련장(숙영지) 대부분이 남제주 일대에 산재해있어 영외 훈련장만 돌아보아도 제주도 구경은 거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훈련장 부근에 제주도 특유의 막사가 지어져있고 그곳에서 수일간 머무르며 한 과목씩 훈련을 하고 떠났다. 그 막사라는 건물이 볼 만했다. 제주도 특유의 화강암을 쌓아올리고 한라산 기슭의 잡목을 베어다 지붕을 만들어 억새풀을 올리면 훌륭한 집이 된다. 웬만한 비에도 새는 일이 없고 강풍에도 잘 견뎌냈다. 바닥에 돌을 단단하게 고루 깔고 억새풀을 깔면 안락한 침대가 되었다. 나도 훈련병들과 함께 보리 섞인 밥에 싱싱한 배추김치로 배를 채우고 그 돌침대에 누우면 벽이나 천정 사이로 별이 보였다. 밤중이면 먼 곳에서 들리는 듯 천등소리와 같은 B29 증폭기 소리가 으르렁 거리며 들려왔다. 오키나와에서 발진한 폭격기가 전선의 적 후방을 폭격하러 가는 것이라고 선임하사관이 말해주었다. 그곳은 겨울에도 영하로 내려가는 날이 거의 없어서 겨울에도 밭에서 채소가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다.해안선에서 보면 그리 높지 않게 보이는 한라산도 해발 1950미터로 지리산의 1915미터보다 약간 높다. 한라산 머리에는 눈이 하얗게 덮여있었다. 그 당시까지도 4.3폭동의 여파로 400등고선 이상의 지역에는 민간인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끝이 보이지 않게 자라난 억새풀은 장관을 이루고 광활한 초원을 이루고 있었다. 이곳에 목장을 운영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옛날에는 감귤나무가 많아 임금님께 진상까지 했다고 전해오고 있다. 영상의 기후대라서 감귤농원은 될 것 같다고 상상해보았다. 꼭 한 번 해봄직한 사업이라고 확신이 들기도 했다. 언젠가는 이곳에 와서 목장도 감귤농장도 해보려니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저 나의 생각이었을 뿐 후에 재벌들이 들어가 목장과 농장을 경영하고 있다고 들었다. ‘군자여세출’이라고 했다. 내가 그곳에서 목장의 꿈을 꾸고 있을 때 지금의 목장주들은 꿈도 못 꾸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꿈으로 끝나고 그들은 현실의 목장주가 되어있으니 선견지명이라고 자위나 해두자.지금 생각하면 그런 비슷한 일들이 많았었다. 남들은 생각조차도 못하는 시기에 나는 생각하고 연구한 일이 많다. 내가 이미 오래전에 구상한 생각이 수년 혹은 수십 년 후에 다른 사람에 의해 실현되는 일들도 많다. 나의 아이디어나 생각들이 시기를 너무 앞섰다고 해두자. 영웅호걸도 시대를 타고나는 것이라고 옛사람들은 말했다. 나는 영웅도 호걸도 또 군자도 못되니 내게 해당되는 말은 아니리라. 이야기의 방향을 돌리자. 사람들은 제주도를 삼다도라 부른다. 돌, 바람, 여자가 많다는 의미인 듯하다. 바람이 많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나는 강한 바람을 싫어한다. 그 바람을 견디는 게 고통이라면 고통이었다. 바람이 많이 부니 땅바닥에 있는 흙이 날아간다. 그러면 바닥에 묻혀있던 돌들이 밖으로 나온다. 그래서 돌이 많아진다. 농사꾼들이 경작지에서 돌을 주워내도 바람이 불면 또 돌이 생겨나니 아예 돌을 주워내려고 하지 않는다고 했다.실제로는 여자가 그리 많은 것 같지는 않아 보였는데 여자가 많아 보이는 이유는 여자들이 가정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남지 못지않게 일터에 나와서 근로에 종사했고 일의 마무리도 여자들이 주로 했다. 연장을 들고 다닌다거나 소달구지 고삐를 잡고 간다거나 무거운 물건도 여자가 짊어지고 나르는 풍경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여자가 노동을 많이 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삼다도가 된 듯하다.제주도 여성들이 생활력이 강하다는 것은 맞는 말인 것 같았다. 내가 묵고 있던 집에 딸이 있었다. 서울 모 여대에 재학 중인데 겨울방학이 되어 집에 왔다. 여대생은 여장을 채 풀기도 전에 물통을 지고 바닷가 샘으로 물을 기르러 나갔다. 여자들 가운데 한가하게 노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한 듯하다. 바다에 나가 물질을 하고 밭일을 하며 때로는 군인들을 상대로 구멍가게나 행상도 부지런히 했다. 바닷바람에 얼굴이 가무잡잡하게 그을었지만 육지여성과는 대조적인 순수한 아름다움과 부지런함 속에 담긴 기쁨과 보람을 그들의 얼굴에서 읽을 수 있었다. 한번은 성산도라는 작은 어촌에 들렸다. 제주도 가장 동쪽에 위치한 곳으로 일출봉이라고 하는 작은 봉우리가 바닷가에 솟아있다. 봉우리 안쪽으로 길이가 약 1백 미터쯤 되고 경사가 45도 가량 되는 경사지에 잔디가 곱게 깔려있었다. 겨울인데도 잔디의 색이 파릇파릇 싱싱했다. 걸어서 올라가기는 어려운 지형이었다. 그런데 그 마을 꼬마 녀석들인지 봉우리를 끼고 옆으로 돌아서 올라가 작은 판자를 미끄럼틀처럼 타고 내려오곤 했다. 강원도 산골 아이들이 눈썰매를 타고 내려오는 풍경과 흡사했다. 반대편 바닷가를 보니 100미터는 넘어 보이는 바위 절벽이 서있다. 바위가 그 자리에 언제부터 서있는지 가늠할 수는 없으나 모진 바람과 거센 파도와의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바람과 파도의 성화에 못이긴 듯 바위는 골격만 앙상하게 남아 마치 괴물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런 바위도 지금은 육지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관광지가 되었다고 하니 무엇이든 세월과 시간이 지배하는 듯하다.그 섬을 한 바퀴 돌아보아보니 웅장한 폭포와 기암절벽, 길이가 미처 확인되지 않은 굴도 있었다. 당시에는 제주시와 서귀포 등 두세 지역 정도만 개척이 된 듯했으나 나머지 지역은 거의가 원시의 모습 그대로였다. 이 섬이 더 이상 때 묻지 않고 원래의 모습 그대로를 고이 간직하기를 마음으로 간절히 기원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관광이라는 명분 아래 그 아름다운 자연이 원래의 모습을 잃고 현대인들의 오염된 구둣발에 짓밟히고 있다고 한다. 오염되어서는 안 될 성역이 오염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하고 아쉬워하는 이는 나 혼자뿐일까?<예감>어느덧 제주도에서의 삶도 4개월이 지나고 봄이 오고 있었다. 남쪽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훈훈한 바람은 푸른 삼다도를 더욱 푸르게 했다. 5월 초 어느 날이었다. 출근길 자동차 안에서부터 무슨 일인지는 모르나 마음이 설레기 시작했다. 사무실에 도착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무언가 나의 신상에 변화가 생길 것 같은 그런 예감이었다.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이상이 생기거나 서울 처자들에게 문제가 생기기라도 할 것 같은 불길한 생각들이 꼬리를 물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무슨 일인가가 꼭 닥칠 것 같은 예감이었다. 이런 잡념을 떨치려고 명상에 잠겼다. 그 때 갑자기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러나 나는 겁이 나 수화기를 들지 못했다. 옆방에 있던 부관이 들어와서 전화를 받았다. 그는 소본부 인사참모의 전화라고 말했다. 내가 수도사단 부사단장으로 발령이 났으니 속히 부임하라는 전갈이었다. 시간이 없었다. 부교장에게 그동안의 사무를 대충 인계하고 오덕준 소장 등과 작별인사를 하고 그곳을 출발했다. 30여 년을 순탄하게 살아온 것도 아니지만 그때처럼 영감에 사로잡혔던 일도 드물다. 그 때는 나 자신도 남들도 영전이라고 축하해주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하니 내 운명의 전환을 뜻한 영감이었을 줄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했었다.대한해협 상공을 날라 예정대로 부임해 부사단장으로 취임했다. 승승장구하는 오르막길에서 180도로 추락하는 실추의 길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26. 청룡의 실추1953년 5월 5일자로 수도사단 부사단장에 취임했다. 나의 또래들과 비교할 때 파격적인 인사였으며 가까운 장래에 장군으로의 진급을 암시하는 예비단계인 것이었다. 사단장 C(최창언) 준장은 실전경험이 적고 성격이 외골수여서 매사가 원만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전선은 소강상태로 수개월간 적과 접촉이 없어 적정에 어두웠다. 상부에서도 포로나 한 놈 잡으라고 성화했지만 무력수색은 엄하게 금하고 있었기 때문에 포로를 잡거나 적의 정보를 얻는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7월 13일 적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습격을 당한 것이다. 이 전투가 나의 승승장구하던 무운을 여지없이 꺾어놓고 내 운명을 뒤집어놓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채 나는 전선으로 나갔다. 당연히 사단장이 나가야 할 전선으로 말이다. 주방어선인 연대지휘소에 도착하니 때는 이미 늦었다. 그러나 예비대의 운영만 잘 했어도 전황이 조금은 달라졌을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 지휘관의 결정이 변경되었다는 것과 예비연대장의 명령불이행이 실패의 원인이었다. 분초를 다투는 극한 상황에서 금쪽같은 연대는 총 한발 쏘아보지도 못하고 걷잡을 수 없이 분산되어 전투력을 상실하고 말았으며 전선은 여지없이 적에게 유린되고 말았다. 연대지휘소에서 최후의 순간까지 버티던 나는 벙커 밖에서 적의 수류탄이 무수히 터지면서야 부득이 후퇴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적의 중앙에 포위된 상태였다. 때마침 비가 쏟아지고 칠흑 같은 어둠이 주변을 에워쌌다. 약 2킬로미터쯤 후퇴했을까. 평소에는 물 한 방울 없던 계곡 개울에 거센 물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전에 들었던 강원도 산골물인 듯싶었다. 이 물을 건너면 우군의 8인치 포진지가 있다. 날은 이미 밝았다. 몹시 거센 물결을 가로질러 야전용전선이 몇 가닥 늘어져있었다. 전선을 당겨보니 제법 튼튼했다. 헤엄을 못 치는 나는 이 전선을 붙들고 물을 건널 생각으로 그 전선줄에 매달렸다. 그 줄이 끊어져버렸다면 차라리 나에게는 다행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줄은 나를 무사히 강 건너편으로 옮겨주었다. 그곳에서부터 고개만 하나 넘으면 우군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낮에 행동에 옮길 것인가, 풀 속에 숨어 있다가 밤에 다시 움직일 것인가 고민하며 주위를 살펴보니 소위 한 명과 하사관 두 명이 옆에 있었다. 소란스럽던 꽹과리나 피리, 호루라기 소음 같은 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어디까지가 적지이며 우군진지는 어디인가? 주위가 너무나 조용했다. 동녘으로는 어김없이 1953년 7월 14일의 아침 해가 돋아 오르고 있었다. 강물을 건넜으니 8인치 포가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돌아보니 높은 언덕 너머로 8인치 거포의 끝부분이 쫑긋거리며 보였다. 원래대로라면 그곳은 분명 아군지지여야 한다. 그러나 아군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지옥문>
우선 산의 숲속으로 몸을 숨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몸을 일으켜 산 쪽으로 몸을 돌리려는 순간 운명의 신은 나를 냉정하게 내동댕이쳐버렸다. 돌연 등 뒤에서 따발총 소리가 들리며 나의 발 앞으로 총탄이 일직선을 그리며 지나가는 광경이 마치 서부영화에서나 보는 그런 장면이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중공군 병졸들 약 20명이 우리 일행을 원형으로 둘러싸고 좁혀오고 있었다.
몸에 아픈 곳이 없는 것으로 보아 총에 맞은 것 같지는 않았다. 함께 있던 사병들도 무사했다. 그 순간 나는 적에게 잡힌 포로가 된 것이다. ‘포로’가 된다는 것을 일본인들은 최대의 수치로 여겼다. 자결이라도 해야지 살아서 포로가 된다는 것은 용납이 되지 않았다. 부상이라도 당해 어쩔 수 없이 포로가 되었다고 해도 불명예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미국인들의 포로에 대한 개념은 달랐다. 그들은 명예스럽게 생각한다. 전투에서 최후까지 싸웠다는 의미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생명을 존중하는 그들의 견해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관념은 어떤 것이었을까?
나는 전쟁 중 십여 차례를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극한 상황에서도 기적적으로 극복하고 살아났었다. 약간 과장하자면 웬만한 산골짜기는 뛰어서 넘을만한 기개와 체력도 가지고 있었다. 20대의 청년 부하장교들도 산을 타는 일에 있어서는 감히 나를 앞서지 못했었다. 그 때의 나는 희망과 정열에 불타며 사명감으로 가득한 30대 중반의 청년장교이자 지휘관이었다.
탈출을 시작해서 5,6시간이면 충분히 안전지대까지 도착했을 텐데 겨우 2킬로미터 남짓 빠져나와서 이런 꼴을 당하다니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유는 단 하나였다. 체력이 극도로 쇠약해져있었다는 사실을 나 자신도 모르고 있었고 이전과 다를 바 없이 나의 체력이 건강하고 왕성하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는 달랐다. 마치 진흙탕에라도 빠진 듯 다리에서 힘이 빠져나가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뛰는 것은 더 어려웠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나의 체력이 그처럼 쇠약해졌는가? 돌이켜보니 그 무렵 2개월 동안 밤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식사도 정상적으로 하지 못했었다. 밤을 못자고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증상은 누구나 마음속에 근심걱정이 있을 때 나타난다. 그런데 그 무렵의 나는 승승장구로 운이 좋은 편이었고 가까운 장래에는 군인의 최고 명예도 약속되어 있었다. 그런데 무슨 고민이 있느냐고 사람들은 의아해할 것이다.
나는 그 이유를 이 회고록에 남길 것인가 그대로 묻어둘 것인가를 고민하느라 한동안 회고록 쓰는 일을 중단하고 여러 날 동안 생각에 잠겼다. 나의 운명을 180도로 바꾸어놓고 순탄했던 등용의 문턱에서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 원인을 사실대로 기록으로 남길 것인가, 아니면 영원히 덮어둘 것인가? 여러 날 고민을 거듭하고 결론을 내렸다. 이왕 나 한 사람 희생되었는데 이제 와서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래도 덮어두는 것이 옳은 일이리라. 이렇게 결심을 하고나니 머리도 한결 가볍고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하다. 그래서 여러 날 만에 다시 원고지를 대한다. 그럼 지옥으로 떨어져가는 과정을 되새겨보자.
그 때 나는 도도하게 흐르는 강의 모래사장에 서있었다. 계급장에 그려진 철모와 군복에 부착된 계급장, 주머니에 들어있던 신분증 등은 모두 버렸다. 한 젊은이가 국군작업복을 걸친 채 허수아비처럼 서있는 처량한 몰골이었다. 그 와중에도 나는 양손을 위로 들어 항복을 표시하지 않았다. 죽이려면 죽여라 하는 심정으로 죽어도 네놈들 공산주의 사냥개에게는 항복하지 않겠다는 고집스러운 태도였으리라.
밤새도록 비를 맞아 피부 속까지 젖은 듯했고 갑자기 허기가 났다. 등 뒤에서 중국놈 병정이 나의 등을 밀쳤다. 한 발을 내딛는 순간 발이 몹시도 아팠다. 군화 속에 흙과 모래가 들어간 것이다. 신발에 모래가 들어있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해방 전에 익혀둔 중국말이 창피한 수준이기는 했지만 의사소통은 되어야겠기에 “내 군화에 모래가 들어있어 걷기에 불편하니 잠시 쉬어 씻고 가자.”고 했더니 그들은 자기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를 하는 나를 다시 보더니 승낙을 했다. 나는 물가로 내려가 천천히 군화를 벗고 씻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앉은 중국병사들은 자기들끼리 중얼거렸다. 나에게 위협감을 주는 내용의 대화는 아니었다.
나는 불현듯 일본군들이 포로를 대하는 행동이 생각났다. 일본군은 비전투원인 양민을 잡아도 심하게 괴롭히고 죽이기까지 했다. 일명 ‘섬멸작전’이라고 해 지목된 양민부락에 쳐들어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살육과 강간을 일삼고 심지어 갓난아기의 발을 잡은 채 나무기둥에 후려치는 만행도 저질렀다. 장교 놈들은 숨겨둔 보약이나 골동품, 고서화를 찾느라 혈안이 된다. 하물며 비전투원들도 그렇게 무자비하게 다루는데 전투에서 잡은 포로들은 그 자리에서 즉결 처분하는 것은 지극히 일반적인 것이다. 그들의 잘난 일본도를 가지고 <타메시기리>라고 하는 칼날을 시험하는 일도 많았다. 신병들을 상대로 총검술 실습도 서슴지 않는다. 그런 야만적인 일본군을 상기할 때 이들은 그나마 대륙성 민족의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을 씻고 강둑에 서있는 나의 신세가 처량하기만 했다. 하룻밤 사이에 몸무게가 5킬로그램은 빠져나간 듯 다리가 후들거리고 머릿속에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권총은 허리띠까지 벗어 던진 후라 언뜻 보기에는 무기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나는 그때 바지 뒷주머니에 모젤 3호 소형권총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나의 최후를 장식할 무기였다.
나는 그들과 함께 8인치 포대로 들어갔다. 포들은 조준상태로 포탄이 장전된 채로 방치되어 있었고 거대한 포 견인차도 시동이 걸린 채 그대로 서있었다. 천막 안으로 들어가 보니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모포와 피복류, 소화기총 심지어 카메라도 식탁 위의 음식도 그대로 놓여있었다. 기습을 당한 것일까? 더욱이 자체 경비를 한 흔적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완전 무방비상태였던 것이다.
도대체 무엇을 믿고 자체경비도 하지 않은 채 거액의 군 장비를 고스란히 적에게 넘겨준단 말인가? 이것이 미국인의 낙천주의라는 것인가? 과연 우리가 그들을 믿고 의지해도 되는 것인가? 그 순간 나는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모든 장비가 그래도 있는 정황으로 보아 적의 습격은 거의 없었다고 판단이 되었다. 부상자나 전사가가 한 명도 없었으니 말이다. 앞에 있던 보병부대가 무너지니 그대로 놓아두고 도망을 간 것이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대형 타월 한 장과 내의 두세 벌을 챙겼다. 언제 비가 왔었나 싶을 정도로 쾌청한 날씨에 적병 3,4명의 감시를 받으며 나는 북쪽 길을 따라갔다. 다리를 건널 때 포차 옆에서 한국군 장교 한 사람이 두 눈이 빠진 채 단말마의 고통에 포차 모서리에 스스로 머리를 부딪쳐 죽어가는 모습도 보였다. 조금 더 가니 미국소년병이 논두렁에 앉아있었다. 비가 아직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그 병사는 옆에 있는 움막에 들어가도 되냐고 물었다. 들어가 보라고 했더니 그는 움직이지를 못했다. 살펴보니 양쪽 다리에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를 부축해서 움막 안으로 옮겨주고 나는 다시 길을 걸었다.
한참을 가니 한국군 105밀리 포진지가 나타났다. 이곳 역시 좀 전에 지나온 8인치 포진지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 옆으로 연발 로켓이 서있었고 앞으로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신병기도 세워져있었다. 그리고 어젯밤 이곳에서 우왕좌왕 하던 연대의 흔적도 남아있었다. 사단 예비대였던 Y대령이 지휘하던 연대였는데 장갑차와 트럭 등이 타이어가 터진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이러한 고성능의 병기들을 송두리째 적에게 넘겨주어야 했던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나는 다시 걸었다. 눈썹이 진하고 키가 작은 한국군 중령 한 사람이 길가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알아보기라도 한 듯 나에게 다가와 자신은 이곳 105밀리 포 대장이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우리는 헤어졌다. 산모퉁이를 돌아서니 우리군 병사들 약 50명가량이 잡혀와 있었다. 나도 그들이 있는 곳으로 보내졌다. 포로집결소 같은 곳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나의 신분이 들통 나고 말았다. 어느 사병 하나가 나를 보더니 깍듯이 부동자세로 거수경례를 했다. 감시병이 이 광경을 못 볼 리 없었다. 경례를 하던 병사는 감시병에게 끌려갔다. 나는 그때까지 종군사진기자라고 적병을 속일 수 있었는데 우리 쪽 사병이 나의 신분을 털어놓는 바람에 나는 신분이 들통 나고 말았다. 그때부터 나는 나의 부관인 장교 한 명과 북으로 끌려갔다.
아군의 주진지선을 지날 때까지 길가에는 셀 수 없으리만치 많은 트럭과 지프차, 병기들이 여기저기 널려져있었다. 탱크도 두 대나 있었고 박격포에 통신기재 등 처참할 정도였다. 그곳을 지나니 어디선가 고성능 스피커에서 젊은 남녀의 목소리가 귀가 따가울 정도로 들려왔다.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산모퉁이를 지나니 갑자기 산과 산이 마주 닿을 정도로 좁은 계곡에 이르렀다. 그 산 기슭에 많은 동굴들이 뚫려있었고 하얀색 가운을 입은 의료인으로 보이는 자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그들은 들것에 실려 온 부상자들을 동굴 안으로 옮기고 있었다. 들것은 대나무 두 개에 두툼한 천으로 만든 것이었는데 들것 한 개에 세 사람씩 들려있었다. 그들은 매우 빠른 속도로 환자를 실어 날랐다.
골짜기의 평평한 지대에는 어떻게 운반해왔는지 탄약상자가 가득 차 있었다. 상자들은 풀과 나뭇가지로 완전하게 위장되어 있었다. 몸에 맞지 않는 누런 빛깔의 허름한 군복을 입은 졸개들은 각자 어김없이 소형전등을 주머니에 넣어 어깨에 메고 다녔고 머리에는 따바리 모양의 모자에 줄을 이어 삿갓처럼 쓰고 있었다. 우군의 공중공격이 있을 때는 그대로 풀밭에 앉아있기만 하면 되는 듯 했다. 우리 제트기들은 상당한 병력이 모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밑에서 오가는 중공군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가고 말았다. 답답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어렴풋이 배신감마저 들었다. 좀 더 철저하게 정찰을 했다면 지상에 널려있는 적을 포착할 수 있지 않았겠는가.
적들은 길가 산줄기에 소총소리가 들릴 수 있을 정도의 거리에 대공초소를 설치한 듯 했다. 소총소리가 들리면 우군 비행기가 오든 안 오든 상관없이 그 자리에서 행동을 중지하고 길가로 대피했다. 잠시 후에는 어김없이 우군비행기가 날아왔다 그대로 지나가버렸다. 차량도 풀과 나뭇가지로 위장해 소총소리가 나면 길가 풀숲이나 큰 나무 밑으로 대피했다.
나는 하루 종일 걸어야했다. 적의 후방 깊숙이까지 들어온 듯 했다. 날이 어두워져서야 겨우 큰 동굴에 도착했다. 동굴 안에는 탱크 두 대가 세워져있었다. 다리를 뻗고 잠을 잘만한 자리도 없었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노획한 건빵 한 봉지로 허기를 면하고 돌 위에 앉아서 눈을 감아보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나의 바지 뒷주머니에는 여전히 권총이 숨겨져 있었다. 죽자는 생각이 들었다. 막상 죽자고 생각하니 내일의 운명이 궁금해졌다. 신문이나 잡지에 실리는 연재소설을 읽다보면 다음 호에서 이어질 이야기가 궁금한 것처럼 말이다. 죽는 일은 언제든 할 수 있었다. 좀 더 살아서 다음을 보고 죽어도 늦지는 않으리라 마음을 추슬렀다. 나의 실종소식이 신문을 통해 전파되고 집으로 연락도 갈 것이다. 연로하신 아버님은 얼마나 애통해하실까 생각하니 숨이 막혀왔다. 그래도 모진 것이 잠인가보다. 쪼그리고 앉은 채 잠이 든 것 같았다.
갑자기 요란스러운 기관포 소리가 나기에 잠에서 깨어났다. 우군의 공습이 있었는지 대공포가 미친 듯이 울어댔다. 동굴에서 멀지 않은 곳에 지휘소가 있지 않나 짐작되었다. 폭탄 터지는 소리가 한동안 계속 이어지다가 어둠의 장막이 내리며 다시 조용해졌다.
잠시 후 우리말을 하는 자가 내게로 오더니 나의 인적사항을 확인하고 좀 기대고 눈을 붙이라고 친절(?)을 베풀었다. 밤이 지나가고 지금 있는 곳은 지옥로 1가쯤 되는 곳인 듯 했다.
<지옥로 2가>
7월 16일 눈을 떴다. 아침은 어김없이 밝아온다. 잠시 후 장교처럼 보이는 자가 와서 자기와 함께 가자고 했다. 나의 신분이 밝혀진 이상 나는 신분에 맞는 대우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에게 “나는 대한민국 육군대령이다.”라고 말하니 그는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나는 이어서 군직에 있는 신분이니 이에 걸맞은 대우를 하라고 요구했다. 어디를 가는지 모르겠지만 걸어서는 못가겠으니 자동차를 가져오고 식사를 비롯하여 침구 등도 준비하라고 명령조로 말했다. 그자는 나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어디론가 가버렸다.
30분쯤 지나자 그자는 미제 자동차(스리제타??) 한 대에 모포를 두세 장 싣고 돌아왔다. 식사는 없었다. 그곳에서 나의 부관과 사병들과 작별하고 나 혼자서 차를 타고 다시 분진하기 시작했다. 가는 도중에 보니 국군사병들이 4,5명씩 모여 감시병도 없이 스스로 북을 향해서 걸어가고 있었다. 나를 실은 자동차는 우군의 공급으로 제대로 속도도 못 내어 석양이 질 무렵에야 어느 강이 흐르는 산골에 도착했다. 징검다리로 강물을 건넜다.
암벽에 높이 2미터 넓이 2미터 가량의 동굴이 있었다. 동굴 안으로 들어가니 주위가 어두워 손전등을 켜 둘러보았다. 나뭇가지를 깔고 가마니로 만든 침대가 놓여있었다. 웬일인지 저녁식사도 양호한 편이었다. 아무리 역경에 처했다고 하더라도 생명이 붙어있는 한 먹어야했다. 3일 만에 대하는 쌀밥이었고 반찬도 파격적이었다. 이들이 장군대우를 하는 것이겠거니 하고 배를 채웠으나 아침에 헤어진 전우들을 생각하니 목이 메어왔다. 식사를 마치니 향이 좋은 중국차를 따라주었다.
잠시 후 인민군 장교 한 사람이 들어왔다. 적이지만 동족을 만나니 반갑기도 하고 증오심도 있었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들어온 그는 나를 향해 깍듯이 존대를 했다. 아픈 곳은 없는지, 불편하지는 않느냐며 친절(?)을 베풀었다. 나는 이곳이 어디냐고 물었다. 군단 전방지휘소가 이 부근에 있으며 내일은 군단이 있는 곳까지 간다고 장교가 대답했다. 추측에 얼마 들어오지는 못한 듯 했다. 장교가 돌아가고 가설침대나마 다리를 펴고 누워 잘 수가 있었다. 꿈도 꾸지 않고 깊은 잠을 잤다.
<지옥로 3가>
아침이 되어 다시 후한 식사와 차를 대접 받고 그곳을 출발했다. 지난밤에 비가 내렸는지 농작물들과 길이 흠뻑 젖어있었다. 동네어구에는 어린 소년이 자신의 키보다 더 큰 소총을 메고 초라한 모습으로 보초를 서고 있었고 미군이 불발한 폭탄을 총처럼 매달아둔 풍경이 보였다. 무슨 목적인가? 이곳에도 역시 게릴라라 출현하는가보다 생각했다. 그날도 차가 고장이 나고 폭격이 심해서인지 실제로는 그리 멀지않은 목적지를 밤이 늦어서야 도착했다.
그들의 군수품 수송은 절묘했다. 야간에도 쉴 사이 없이 트럭들이 남쪽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었다. 공급경보가 내리면 큰길에서 여러 대의 차량이 속도를 최대한 높여 먼지를 일으키며 달린다. 비포장도로라 먼지가 하늘을 찌를 듯이 오르는 틈을 타 트럭들은 필사적으로 달리는 것이다. 우군 폭격기가 상공에서 내려다보면 먼지만 보이기 때문에 폭격을 못하고 그대로 지나가곤 했다.
낮에 보니 편편한 평야지대의 길에는 대형폭탄의 흔적이 남아있었지만 도로는 대부분이 메워져 원상복귀 되어 있었다. 길옆으로 지름이 20미터가 넘어 보이는 탄환흔적은 대형폭탄이 떨어진 자리인 듯 했으나 그대로 둔 상태였다. 폭격으로 인해 도로가 끊기면 그 부근 주민들이 밤새도록 복구 작업을 한다고 했다. 길가의 복구가 안 된 웅덩이에는 맑은 물이 고여 있고 개구리들이 놀고 있었다. 전쟁과는 거리가 먼 풍경이었다.
이런 평지 길을 폭격할 게 아니고 산중턱에 제비집처럼 나있는 길을 폭격했다면 그리 쉽게 복구를 못했을 것이다. 미군 조종사들이 대충 폭탄 몇 개만 투하하고 돌아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만 더 자세히 살피고 공격을 했다면 효과적이지 않았겠는가. 그날 낮에 우군의 공급을 피해 길가에 엎드려 있는데 열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계집아이 세 명이 다가와서 석왕사 가는데 태워줄 수 있느냐고 억센 사투리로 간청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 덕에 나는 이 부근이 석왕사 근처이며 지금은 동북쪽 다시 말해 원산을 향해서 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밤 두시쯤 어느 밀림 속에 도착했다. 움막에서 밤을 새웠다.
<지옥로 4가>
날이 제법 쌀쌀했다. 모포를 어깨에 두르고 쪼그려 앉은 상태에서 잠시 졸았다. 산새들의 소리가 유난히 요란스러웠다. 둘러보니 밀림이 말 그대로 원시림이었다. 1백년 생쯤 되어 보이는 소나무가 빽빽하게 서있는 곳이었다.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려왔다. 나와 약간의 거리를 두고 어려보이는 소년병 한 명이 나를 감시하느라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서있었다. 물소리를 들으니 갑자기 세수가 하고 싶어진 나는 소년병을 불러 손짓발짓을 동원해 세숫물을 가져오라고 했더니 그는 계곡을 손으로 가리키며 나의 등을 밀었다.
나는 전날 미군 8인치 포 진지에서 챙긴 내의와 타월을 가지고 내려갔다. 골짜기는 생각보다 훨씬 넓었고 양쪽으로는 경작지도 있었으며 널찍한 바위도 있고 맑은 물이 시원스럽게 흐르고 있었다. 새벽에는 쌀쌀하던 날씨도 한나절이 되면 무척 더웠다. 며칠 동안 씻지도 못하고 땀에 찌든 몸을 씻으려고 옷을 벗었으나 비누가 없었다. 그래도 맑은 물에 몸을 담그고 목욕을 하고 나니 한결 상쾌해졌다. 옷도 맑은 물에 헹구어 빨았다. 감시병도 따라오지 않고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한나절을 물속에서 지내고나니 시장기가 돌았다.
채 마르지도 않은 옷을 걸쳐 입고 밀림으로 들어갔다. 나이 어린 중공군 병졸들이 3,4명 모여앉아 트럼프놀이를 하고 있다가 나를 보더니 한 녀석이 쟁반에 무엇인가를 받쳐 가져다주었다. 자세히 보니 잡곡에 감자를 섞은 것이었다. 배는 고팠지만 식욕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억지로 음식을 먹고 평지를 찾아 모포를 펼치고 누웠다. 몸이 개운해서인지 어느 사이에 깊은 잠에 들었다가 석양이 질 무렵에야 잠에서 깨어났다.
불안, 초조, 실망, 공포가 걷잡을 수 없이 교차되면서 죽을 기회만 노리면서도 권총의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며 몇 날을 보내야했다. 그 순간에도 역시 증오와 불안, 공포에 사로잡혀 몸부림치고 있는데 갑자기 움막 안이 밝아지면서 황금색의 햇빛이 들어왔다. 이상하게도 그 햇빛이 머리와 가슴까지 스며드는 느낌이 들면서 지금까지 역류하듯 하던 피가 이제는 정상적으로 도는 듯 팔다리에 힘이 솟구쳤다.
눈을 감으니 아버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아버님은 인자한 눈으로 “큰애야, 기운을 내라. 기운을 내.”라고 하시며 사라졌다. 놀랍게도 기운이 다시 나고 용기도 의욕도 생겨났다. 머리도 한결 맑아졌지만 한편으로는 혹시 아버님이 돌아가신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나는 그때부터 아무데서나 자고 아무것이나 먹고 체력을 다져 이 지옥에서부터 기필코 탈출을 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기분도 가능하면 밝게 유지하기로 했다. 그리고 후일을 알 수 없지만 많은 것들을 잘 보아두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날 저녁은 잡곡밥에 시래깃국이었으나 맛있게 먹어치웠다. 조금 더 가져오라고 할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대한민국의 고급장교가 체면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또 다시 날은 밝았다.
산새들의 지저귀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 계곡으로 내려가 세수를 했다. 치약과 칫솔이 없는 것이 불편했지만 맑은 물로 개운하게 헹구었다. 한나절이 다 되었을 때 중국놈 장교와 사진사가 왔다. 조금 넓은 원두막 같은 곳에서 면담이 시작되었다. 나는 서투르나마 중국말을 했더니 그들은 매우 좋아하며 내가 포로의 신세인데도 너그러이 대해주었다. 사진사는 필름 소비를 염두에 두었는지 사진도 몇 장밖에 찍지 않았다. 그들은 답례라고 사탕과 과자가 담긴 봉지를 하나 남기고 돌아갔다. 나는 어린 감시병들과 과자를 나누어 먹으며 친해졌다.
나무 사이의 틈으로 보아도 사람이라고는 눈에 뜨이지 않았다. 오후에는 공산군 병졸 7명이 낫을 들고 건너편 산기슭으로 올라가는 게 보였다. 풀을 베러가는 듯 했다. 한 방의 총소리도 들리지 않는 조용한 목가적 분위기였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다시 출발했다. 감시병 중에 우리말을 유창하게 하는 병졸이 있어 심심하지는 않았다. 지금 떠나온 곳이 어디냐고 물으니 군단 사령부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막사 하나 보지 못했다고 했더니 막사는 산등 너머에 있다고 했다. 중공군은 포로를 자기들의 본거지 안까지 들여놓지는 않았다. 그만큼 보안에 철저하다는 뜻이었다. 반면 졸병 포로 한 명만 잡아도 고급 사령관실까지 끌고 들어가는 우리군의 실상과는 매우 대조적인 일이었다. 산에서 내려오면서 보니 완벽하게 위장된 곡사포진지가 요소요소에 설치되어 있었다.
<지옥로 5가>
그 날 낮에 도로가에 농가가 5채 서있는 동네에 도착했다. 한 집에만 사람이 살고 있었다. 자동차의 고장으로 우리 일행은 이 동네에서 묵게 되었다. 농가에는 50대 부부와 20대 젊은 딸 둘이 함께 살고 있었다. 큰딸은 결혼을 했으나 남편은 군대에 가고 없었다. 지독한 골수분자인 듯 나를 노려보는 눈초리에 독기가 서려있어 보였다. 주인은 농부지만 성격이 쾌활하고 장부다웠으며 그 부인은 인자한 어머니상 그대로였다. 작은딸은 아직 미혼이었으나 공산주의자는 아닌듯했다. 생김새도 귀여웠고 언제나 미소를 띠고 있어 큰딸과는 다르게 적개심이 없어 보였다.
집도 농가답지 않게 제법 널찍하고 분합문을 떼어서인지 방들이 탁 트여 넓었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밥상이었다. 된장국과 김치를 곁들인 쌀밥이었다. 웬 쌀밥인가 싶어 밖을 보니 동리 앞으로 넓은 들녘이 펼쳐져있었다. 벼농사를 많이 지은듯했고 군대에 공출하고도 숨겨둔 식량이겠지 생각하며 고마운 마음으로 수저를 들었다. 작은 딸이 숭늉을 가져다 밥상에 올려놓으며 속삭이는 소리로 자기 오라비들이 남에 가서 국군에 있다고 했다. 이북에 이런 가정이 많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딸은 오라비의 이름도 알려주었다.
그 당시 나는 발에 무좀으로 고생을 하고 있었다. 약을 바르지 못한 채 여러 날이 지나 발가락 사이가 짓물러 못 견디게 아팠다. 농갓집 부인이 어디선가 삼 잎사귀를 구해다 으깨어 발에 붙여주었다. 설마 했지만 그래도 마음이나마 위로가 되었는데 자고 일어나니 거짓말처럼 통증이 가셨다. 신기하기도 하고 고마운 마음에 여러 차례 고맙다고 했더니 그 부인이 설명을 했다. 우리 조상들은 짚신을 삼을 때 삼 껍질을 섞었는데 이는 무좀을 방지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우리민족의 민간요법이며 무좀을 예방하는 방법이라는 새로운 사실을 배웠다.
날이 밝았다. 날짜를 세어보니 1953년 7월 20일이었다. 그 날도 수차례 공습이 있었으나 사람이 보이지 않으면 폭격을 하지 않는다고 빈집으로 들어가 밖으로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죽겠다는 생각을 버린 지금에 와서 우군의 폭격에 죽는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 되겠기 때문이었다. 밤이 늦었는데도 고장 난 차의 부품을 가지러간 운전병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우군 비행기가 몇 차례 고공을 지나간 것 외에는 별일 없이 날이 저물었다.
저녁에는 그 집 가족과 나 그리고 나의 감시병이 마당에 자리를 깔고 앉았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니 한가하다 못해 무료하기까지 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집 큰딸과 이념토론이 벌어졌다. 그는 공산주의에 대한 이론이나 체제는 전혀 몰랐고 무당이 신령님 모시듯 김일성을 절대적인 존재로 신봉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다시 말해 김일성의 충견이었다. 더 이상 대화를 나눌 힘도 없어 중단하고 잠을 청했다. 그 집 부인이 이번에도 삼 잎사귀를 구해다주어 발가락사이에 넣고 양말을 신고 머리는 타월로 덮으니 모기도 덤비지 않는듯했다.
다시 날이 밝았으나 운전병은 오지 않았다. 한시라도 빨리 지옥의 바닥까지 가보고 싶었다. 그 날은 미 해군 제트기가 유난히도 잦았다. 비행기들은 내가 있던 동리 앞 구릉을 거의 스치다시피 날아다녔다. 그 집 부인이 어디서 들었는지 남산 역에 집결해있던 중국 놈들 수백 명이 폭격으로 죽었다고 전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미 해군 폭격기의 공습이 그다지 극심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 날 오후에 운전병이 다른 차를 몰고 돌아왔다. 저녁을 서둘러서 먹고 일찌감치 떠나기로 했다. 2,3일 동안 후한 대접을 받은 나는 집주인에게 답례를 하고 싶었지만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 외에는 아무것도 줄게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가지고 있던 내의 한 벌을 농부에게 주고 헌것이나마 타월은 그 부인에게 주었더니 그리도 좋아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해가 질 무렵에 출발했다. 한참을 가다보니 길가에 트럭 몇 대가 폭격에 맞아 불에 타고 있었고 기차역사 같아 보이는 건물에서도 불길이 뿜어나고 있었다. 부상자와 죽은 자의 시신이 역전 광장에 수도 없이 널려져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기차도 한 대 불에 타고 있었다.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듯 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내가 탄 자동차는 소련제 소형차였으나 아주 잘 달렸다. 그러나 계속되는 우군의 폭격으로 달리는 시간보다 대기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밤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화물용 덮개로 천막처럼 지붕을 만들어 비를 피하며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지옥로 6가>
비도 개인 듯 했다. 천막을 제치고 밖을 살펴보니 날은 완전히 밝았다. 자동차는 여전히 동북방을 향하여 달리는 듯 했다. 감시병에게 이곳이 어디쯤이냐고 물으니 저기 앞에 보이는 곳이 안변이라고 했다. 안변이라면 원산과도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그러나 안변 외곽지역에 도착해서 자동차는 정서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원산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서쪽 즉, 평양으로 가는 것임을 알았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곳이 원산이든 평양이든 상관없었다. 오로지 하루 빨리 지옥의 종착역에 도착하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자동차는 비에 젖은 신작로를 달리기도 하고 폭격에 거의 파괴된 작은 다리도 건너며 계속 달렸다. 아직 해는 뜨지 않았지만 맑은 아침이었다. 맑게 갠 하늘에 제비와 같은 날짐승들이 마음껏 날아다니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박쥐들이었다. 나도 날개가 있다면 저들처럼 날아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미물짐승인 박쥐보다도 못한 존재가 되어 버린 나의 처지가 한스럽기만 했다. 앞을 바라보니 먼 곳에 하늘과 맞닿을 듯 높은 준령이 나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해도 뜨고 날씨도 청명했다. 어느 농촌에 들러 아침을 먹었다. 집이라고는 모두가 움막형태였고 그 집들마다 방 안에는 색종이로 장식한 김일성의 사진이 어김없이 걸려있었다. 나이든 아낙들은 윗저고리를 아예 입을 생각도 하지 않고 벗은 채로 다녔다. 길 건너편에는 군대 수송차량인지 트럭이 십여 대 모여 있고 헌 타이어와 빈 드럼통이 놓여있었다.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가끔 윗저고리를 벗은 아낙들이 중공군이 신다가 버린 헌 농구화를 질질 끌면서 땅을 들여다보며 무엇인가를 찾아다녔다. 토종닭이 때를 지어 몰려다녔다. 한 노인이 중공군에게 바칠 것이라며 닭의 무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처럼 보여도 나이는 그다지 많은 것 같지 않은 그 사람은 푸념을 늘어놓았다. 해방 전에는 지주는 아니어도 그런대로 자작농으로 잘 살았는데 전쟁이 나기 전에 황해도에서 이곳 두메산골로 강제이동 되어 움막을 짓고 산다며 하늘을 올려다보고 탄식을 했다.
막걸리라도 한 잔 아니면 최소한 담배라도 한 모금 있어야 위로가 될 텐데 그나마도 없어 보였다. 그때 어느 아낙이 손에 무엇인가를 쥐고 와서 영감에게 슬쩍 넘겨주었다. 좀 전에 수송대 부근을 기웃거리던 노부인이었다. 중공군이 피우다 버린 담배꽁초를 주우려고 바닥을 뒤지고 다녔던 듯 했다.
“간밤에 비가 와서 덥지도 않은데 왜 윗저고리를 입지 않고 있느냐?”고 물으니 옷이 어디 있느냐고 오히려 나에게 반문했다. 옷이 있어도 여름에 입어서 헤지면 겨울을 어떻게 나겠느냐고 덧붙였다. 오호라 이 참상! 누구의 죄이런가. 우리민족이 무슨 죄가 커 이리도 죗값을 치러야 한단 말인가!
우리 민족은 유사 이래 남의 나라나 민족을 침략한 일도 없고 아름다운 아침의 나라로 평화를 상징하며 5천년 역사를 이어온 민족이 아닌가. 이건 분명 창세주의 계산착오임에 분명했다. 장탄식이 절로 나왔다.
지옥의 종착역을 향해 다시 출발했다. 원산을 지나 소련 땅으로 끌려가는 것이라는 나의 짐작과는 다르게 가는 방향이 달라진 것으로 보아 일단 소련 땅으로 가는 것 같지는 않았다. 우선은 평양으로 향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이유는 모르지만 막연하나마 마음이 놓이는 듯 했다. 그러나 궁극적인 목적지는 지옥의 종착역이 될 거라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건빵(우리가 빼앗긴 것)으로 점심을 대신하고 나니 오후였다. 자동차는 험한 산길로 접어들었다. 우리나라의 등줄기인 태백산맥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넘어가는 길이었다. 보수도 잘 안된 듯 노면상태가 불량하기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길가 중간 중간에는 원목들이 수북이 쌓여있었으며 시야에 들어오는 산들은 거의가 벌거숭이였다. 김일성이 전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산을 깎아내고 있기 때문이리라.
남산역 부근 이 씨 집에서 2,3일 지체된 탓으로 인솔병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행군을 계속했다. 그날도 밤새도록 비를 맞으며 강행군을 했다. 한 시간쯤 졸다보니 동녘하늘이 밝아오고 있었고 길은 내리막길이었다. 밤새도록 태백산맥을 넘어온 듯했다. 험하기 이를 데 없는 산길은 마치 제비집모양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런 곳을 찾아서 폭격을 해야 복구에 시간이 많이 걸릴 터인데 주변을 돌아봐도 어느 곳에서도 폭격의 흔적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동서로 통하는 길이라 전략상 가치가 없는 길인가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자위가 되기도 했다.
한나절쯤 되어 높이 솟은 굴뚝들이 여기저기 서있어 공업지역으로 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건물들은 거의 파괴되어 성한 곳이 없는 유령의 도시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듯 눈에 익은 모습의 고장이었다. 그렇다. 북진당시 이 곳을 통과한 적이 있다. 그 당시는 이렇게까지 파괴된 상태는 아니었다. 지명이 ‘영원’이었던 것으로 지금은 기억이 희미하다. 우리 국토의 중앙쯤 되는 위치다. 그곳에서부터 서쪽으로 직진하면 평양이고 남쪽으로 가면 남천이나 김천 방향으로 연결된다. 그런데 내가 탄 자동차는 서쪽으로 가지 않고 남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한참을 남쪽방향으로 내려가다 보니 폭이 제법 넓은 강이 나오고 부서진 다리가 나왔다. 그 다리를 겨우 건넌 자동차는 서쪽 제방 둑으로 접어들었다. 그들의 의도를 도무지 파악할 수 없었다. 그리도 심하던 우군의 공습도 거의 없었다. 아마도 부근에는 군사목표가 없어서일까.
제방 둑을 따라 두어 시간을 달렸다. 거리로는 그다지 멀지 않았지만 노면이 좋지 않아서 자동차바퀴가 빠지기 일쑤였다. 저녁때가 다 되어 제방 둑이 끝나고 강변 모래사장이 펼쳐진 곳으로 접어들었다. 가옥이 한 채 서있는 산골짜기에 이르렀으나 연일 내린 비로 강물이 불어나고 강가 모래사장은 물에 잠기는 바람에 차량의 통행을 금지했다.
일행은 그곳 민가에서 밤을 보내기로 하고 차에서 내렸다. 오막살이 초가삼간 화전민의 농가였다. 방에는 세간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빈대와 벼룩이 제 세상을 만난 듯 날뛰고 다녔다. 내 나이 삼십 살이 넘도록 그런 광경은 처음이었다. 우리는 잘 곳도 먹을 것도 없는 신세가 되었다. 반쯤 물에 잠긴 자동차로 다시 기어 올라가 천막을 덮고 밤을 지새우기로 했다.
졸병 한 명이 먹을 것을 구한다고 어디론가 갔다. 다음날 새벽이 되어서야 식량이랍시고 감자 알갱이 몇 개를 가져왔다. 모닥불에 감자를 구어 입에 넣었지만 목에서 넘어가지를 않았다.
자동차를 타고 골짜기를 넘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일행은 물이 찬 강가에 이르러서 더듬거리며 떠났다. 물이 깊으면 산기슭에 매달려 나아갔다. 지옥길을 거쳐 가는 과정이 수월하지 않았다. 험난한 코스를 두 시간쯤 거친 후 강은 훨씬 좁아지고 물도 많이 줄었으나 이상하리만치 강물의 색이 백색으로 물들어있었다.
산골에서 흐르는 물은 비가와도 맑은 상태일 텐데 물의 색은 마치 탁한 막걸리 같은 색깔이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모퉁이를 돌아가니 언덕이 하나 나타났다. 그곳으로 올라가보니 민가도 있고 사람들이 줄을 서 식량을 배급받고 있는 듯 했다. 사람들이 사는 촌락이었다. 건너편 산화전에는 옥수수가 제법 많이 자라있었다.
그곳에도 윗저고리를 입지 않은 노파가 무슨 일인가에 몰두하고 있었다. 물론 배급받는 무리들 가운데도 윗옷을 걸치지 않거나 맨발인 노인들이 많이 있었다. 한참을 더 가니 시야가 확 트이는 광장 같은 곳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곳에는 미국인 수백 명이 눈에 띄었다. 일을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무척이나 피곤한 기색들이었다. 그들은 암벽에 뚫은 작은 동굴 속에서 네다섯 명씩 기거하면서 막걸리색의 물에 목욕도 하는데 마치 유령들 같았다. 그 전날까지 아니 그날 아침까지 광산에서 노동을 한 듯 했다.
그곳을 지나 조금 더 갔다. 언덕 위에 판잣집이 한 채 서있고 그 곳에 중공군 병사들이 추녀 끝에 매달린 스피커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 심각한 표정을 짓고 앉거나 서있었다. 나를 감시하던 병정 한 명이 뛰어가더니 잠시 후 돌아왔다. 어딘가로 가자고 하며 중국말로 지껄였지만 방언이 심해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정오쯤 그 동리를 벗어나 동구 밖에 있는 개울을 건너 판잣집으로 갔다. 그곳은 의무실 같은 곳이었다. 판잣집 안으로 들어서니 하얀 가운을 입은 조선인 남자 한 명과 젊은 여자 한 명이 나를 맞이했다. 판자로 칸막이를 했을 뿐 문도 없고 창문도 없는 창고나 외양간 같은 곳이었다. 나무로 만든 침대 비슷한 것 위에 모포만 한 장 깔려있었다. 그 위에 걸터앉아 있으니 잠시 후 그들이 들어와 청진기를 기울이며 진찰이라는 것을 시작했다.
시키는 대로 했으나 특별한 말은 없었다. 무좀약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여자가 가루약을 먹으라며 가져다주었다. 해방 전부터 앓고 있는 무좀이니 십년은 족히 되는데 그동안 단 한 번도 먹는 약으로 치료를 한 적이 없었다. 피곤하고 허기가 져서 사람을 불렀더니 또 그 여자가 왔다. 베게가 없다고 했더니 나무토막을 한 개 가져다주고 속삭이는 말로 아느냐고 물었다.
무슨 말이냐고 물었더니 조금 전에 휴전이 조인되어 전쟁이 중단되었다는 것이다. 현재 시각이 몇 시인가 보았더니 정각 오후 2시였다. 그때 나는 오메가 금시계와 파카21 만년필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들은 빼앗지 않았다. 내가 오늘이 며칠이냐고 물으니 그는 7월 28일이라고 대답했다. 휴전이 된 것도 모르고 나는 황해도의 이름 없는 산골짜기 개울가에서 지냈던 것이다.
7월 15일 포로가 되어 7월 29일 휴전이 조인된 날까지 13일이 지났다. 단 13일만 무사했더라면 하는 생각에 분통이 터지고 심장이 툭 멈춰서는 것 같았다. 몇 번이고 바지 뒷주머니에 들어있는 권총으로 손이 갔다. 그러나 또 내일 일이 궁금해지면서 결국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다시 솟구치는 증오와 원망, 분노와 절망감이 극도에 달해 피폐해진 나의 목숨이나마 앗아갈 것 같았다. 눈물도 말라버렸는지 나오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밖은 이미 어두워져있었다.
백의의 여인이 쟁반에 무엇인가를 가져와서 먹으라고 했다. 하얀 죽이었다. 먹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고맙다고 받아놓기는 했지만 도저히 먹을 마음이 나지 않았다. 희미하나마 전기불도 있었다. 그녀는 전깃불을 맘껏 켜놓을 수 있어 살맛난다고 혼자 좋아했다. 그리고는 수다스러운 목소리로 자기를 소개했다.
중국 북경에 사는 교포의 딸로 간호사였는데 소집이 되어 이곳에 간호장교로 와있다는 이야기로 시작해 쓸데없는 수다가 계속 이어졌다. 그러면서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진 머리빗을 하나 주며 북경에서 가져온 것인데 가지고 다니며 쓰라고 했다. 나는 한 술 더 떠 치약과 칫솔을 구해달라고 했더니 다음날 적십자 마크가 인쇄된 치약과 칫솔을 가지고 왔다. 뒷면에는 ‘Made in USA’라고 인쇄되어 있었다.
그 날 개울 건너 큰 길에 난데없이 초등학교 꼬마들로 보이는 아이들 약 50 명가량이 조그만 깃발을 들고 행진을 하며 무어라고 외치며 지나갔으나 무슨 말인지를 못 알아들었다. 조금 후에는 국군포로들이 트럭에 가득 실린 채 목청을 높여 노래를 부르며 지나갔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국군포로들 중 전향한 자들로 일명 해방 전사라고 하는 무리였다. 오늘 휴전이 될 줄 모르고 수치스럽게도 항복의 손을 들고 만 그들을 생각하니 기분이 착잡해졌다.
그 날 오후 “나, 남 중좌입니다!”라며 서른 살 정도의 준수하게 생긴 청년장교 한 명이 찾아왔다. 그는 인상이 좋은 편에다 말소리도 구수한 서울 말투였다. 병실은 답답하니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그와 나는 징검다리를 건너서 수양버늘 아래에 마주 앉았다. 그는 휴전 소식부터 먼저 전했다. 나는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자가 나를 세뇌시키기 위해 온 것으로 단정했다. 그러나 그는 의외였다. 6.25는 자기네가 먼저 남침했다는 사실과 남침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거추장스러운 변명 같은 소리를 늘어놓고 떠났다. 즉, 6.25 남침은 인정하지만 합법적이라는 것이었다. 하기야 처녀가 아기를 낳아도 할 말이 있다지 않았는가.
그날 밤 늦게 중상을 입은 국군 한 사람이 옆방으로 실려 들어왔다. 그는 밤새도록 담배며 물을 요구하며 떠들어대는 바람에 나는 한숨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그날 낮에 남 중좌가 주고 간 중국제 담배가 나에게 한 갑 있었다. 나는 보초병을 불러 그 부상군인에게 전해주라고 주었다.
지옥에도 날은 밝았다. 아침에 죽을 한 그릇 먹고 있는데 감시병이 찾아와 이동한다고 했다. 나는 그곳이 지옥의 바닥인줄 알았는데 또 다른 바닥이 있나보다고 생각하며 따라나섰다. 이번에는 자동차도 없이 걸어서 가야 했다. 우리가 지난 이삼일 동안 지나온 길을 되돌아서 걸어갔다. 동네 반대편 동구 밖에서 골짜기로 올라가니 오두막이 한 채 서있었다.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그곳에 있으라는 것이다. 감시병도 그냥 가버리고 아랫방에는 젊은 여자와 다섯 살 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가 있었다.
저녁이 되자 여자가 감자밥을 가져다주었다. 그곳은 전기불도 없었다. 조그마한 마당에는 무엇인지 심어져있었다. 따발총을 맨 중국 군인이 서너 시간 간격으로 다녀가는 것 외에 감시는 없었다.
날은 다시 밝았지만 간밤에 벌레 등쌀에 잠을 못자고 밤새도록 마당 한구석에서 풀을 모아 풀 연기를 내며 밤을 지새워야했다. 조반하라는 소리에 눈을 떴다. 밀기울에 쌀 알갱이 몇 알 넣어 끓인 죽 한 그릇이었다. 식욕은 없었지만 살아있는 동안은 살아야겠기에 두세 수저 떠먹었다.
그 집 주인은 인민군에 끌려갔다고 했다. 내가 먹다 말고 밀어놓은 죽을 그 집 아이는 천하에 진미라도 만난 듯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주인여자는 뜰에서 밀을 탈곡했다. 한 가마쯤 되었다. 조금 있다 장정 한 사람이 오더니 가마를 등에 지고 갔다. 초저녁에 동네 노인 두 명이 오더니 “공출했다며?”라고 인사를 했다. 여주인은 “일 년 동안 농사를 지어서 밀전 한 장 못 부쳐 먹고 다 털어서 공출해 갔다.”고 푸념했다. 남은 것은 밀 찌꺼기 한 바가지가 전부라고 했다.
동네 노인은 한숨을 쉬며 “이놈에 지긋지긋한 지옥살이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거여.”라며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담배도 들어있지 않은 빈 담뱃대만 연신 빨아댔다. “아, ‘지옥살이’라고 하는구나. 그럼 저들도 지옥살이를 하고 있는 거로구나. 나와 같은 한 동지가 아닌가.” 나만 지옥의 망령이 아니라 나 말고도 이곳에도 지옥을 맛보며 사는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 한 편으로 위로가 되기도 했다.
다음날 아침이었다. 여주인이 아침식사를 가져왔다. 감자밥이지만 쌀알도 섞여있었고 이름 모를 산나물 무친 것도 반찬으로 곁들여있었다. “선생님, 귀하신 분 같은데 먹기 어려워도 억지로라도 먹고 기운을 차려서 이 지옥을 빠져나가야 합니다.”라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지옥에서 만난 관세음보살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그의 등 뒤로 떠오르는 아침 해가 부처님의 후광처럼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밥을 남겨서 꼬마에게 주었다. 뒤뜰에서 가져온 판자를 깔고 누워있으니 좀 전에 먹은 산나물 냄새가 입에 남아 향기가 났다. 그늘 아래는 시원해도 밖으로 나가면 금방 더워지는 한여름이었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태양은 가차 없이 이글거렸다. 좁은 판자위에서 엎치락뒤치락 하며 시간을 보내려니 지루하기 이를 데 없었다.
집 앞 마당에 과일나무가 세 그루 서있었다. 자세히 보니 나뭇가지에 작은 함석조가리들이 매달려있었다. 돌매질을 하고 있는 여인에게 물어보니 그녀는 한숨부터 내쉬며 그 나무에서 열리는 과일의 개수를 적어놓은 표시라고 설명했다. 마침 세포반장이라는 젊은이가 왔다. 그는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이 집 밭에 심은 콩 포기가 몇 포기니 수확해서 공출하라고 종이쪽지를 한 장 던져놓고 사라졌다. 무슨 말이냐고 물으니 논두렁에 심은 콩까지도 공출을 해간다며 여인은 서글픈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앞산 비탈을 건너가 보니 화전 옥수수 밭에서도 역시 윗옷을 걸치지 않은 노인이 구리 색으로 그을린 상체를 드러낸 채 옥수수의 익은 열매를 거두고 있었다.
<7.백마고지의 영웅 임익순 대령 회고록 내 심장의 파편> 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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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장 김종오 장군도 백마고지 전승의 공로(?)로 일 계급 특진되어 타처로 영전되어 옮겼다. 나의 연대는 그 후로도 크고 작은 작전을 수행했다. 그러던 중 나는 참모총장의 특별한 배려로 제주도 모슬포의 제1훈련소로 가게 되었다. 그동안 고생이 심했으니 후방에 가서 잠시 쉬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해 성탄절 전날 제주도에 도착했다.
그날 저녁 근래에 보기 드문 호화판 성탄파티에 참석하는 영광을 얻었다. 늦게까지 마시고 놀다가 허름한 여인숙에 들어가서 밤을 지냈다. 그 날 훈련소 본부에 나가서 소장에게 신고도 하고 잘 아는 얼굴들과 인사도 나누었었다. 그런데 모두들 태엽이라도 풀린 듯 인상들이었다. 직접적인 위협이 없어 긴장이 풀린 탓도 있겠으나 나태한 분위기가 심각한 정도였다.
<하사관 학교>나는 그날로 하사관 학교 교장에 임명되었다. 내가 전선에서 근무하면서 가장 절실하게 바랐던 바는 하급지휘관의 질적인 향상이었다. 나의 숙원을 풀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훈련소에서 사병훈련을 마친 자들 가운데 성적이 우수한 자들 선발해 2개월간 분대장 교육을 시켜 분대장요원으로 배출하는 일이 하사관 학교의 임무였다. 그런데 살펴보니 교육내용이나 교장시설, 구성 등이 우리의 전선에서 요구하는 실정과는 맞지 않는 점이 많았다. 나는 과감하게 이것들을 수정하고 정리해나갔다. 그러자 미군고문관이 대단한 기세로 항의를 했다. 그는 미국식 교육을 주장했다. 나는 “우리는 미국사람도 아니고 미국군인은 더욱 아니며, 우리가 싸우고 있는 곳은 바로 우리나라 땅이다.”라고 일축했다. 얼마 후 그는 본국으로 돌아갔고 나의 의도대로 교육이 실시되었다.고등전술이라면 모르지만 분대 전투는 우리의 실정에 적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두 달 남짓 후 소장 오덕준 장군이 전선을 시찰하고 돌아와서 대단히 만족해하며 치하를 아끼지 않았다. 일선의 지휘관들이 이구동성으로 “최근에 보충되는 하사관들이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우수한 분대장 후보들이다.”고 좋아했다며 하사관 교육은 성공적이라고 했다.제주도에서의 병영생활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훈련을 마친 신병들 중에서 조금 낫다는 자들을 골라 교육을 시켜 내보내고 하는 과정이 마치 시계바늘 돌아가는 듯이 반복되었다. 지금의 제주도는 지상낙원 같다는 표현을 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말 그대로 절해고도였다. 일과를 마치면 발전기를 돌려 밝힌 희미한 전등불 아래에 가까운 친구들끼리 모여앉아 막걸리 한 잔씩 기울이는 정도 외에는 위락시설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사회였다. 일주일에 한 번씩 열리는 고문관클럽의 파티에도 파트너가 없으면 그림의 떡이었다. 간혹 육지에서 건너 온 여성 중에 춤이라도 좀 추는 사람이 있으면 심한 쟁탈전이 벌어지기도 했다.거리에서는 더러 화사한 옷차림에 진한 화장을 한 여인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장교부인이거나 미군 위안부들이라고 했는데 분간할 수는 없었다. 그러자 운전병이 차이점을 알려주었다. 손톱에 물감을 칠한 여자는 미군 위안부이고 그렇지 않은 여자는 한국군인의 부인이라고 귀띔해주었다. 그 당시 그 부근에는 비행장과 병원, 포로수용소, 병참부대 등이 모여 있었고 미국 군인들과 훈련소 관계 한국군 장교도 수백 명이 머물고 있었다.<내가 본 제주도>제주도까지 왔는데 이왕이면 이 섬을 대략이나마 살펴보자고 마음먹었다. 하사관학교 영외 훈련장(숙영지) 대부분이 남제주 일대에 산재해있어 영외 훈련장만 돌아보아도 제주도 구경은 거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훈련장 부근에 제주도 특유의 막사가 지어져있고 그곳에서 수일간 머무르며 한 과목씩 훈련을 하고 떠났다. 그 막사라는 건물이 볼 만했다. 제주도 특유의 화강암을 쌓아올리고 한라산 기슭의 잡목을 베어다 지붕을 만들어 억새풀을 올리면 훌륭한 집이 된다. 웬만한 비에도 새는 일이 없고 강풍에도 잘 견뎌냈다. 바닥에 돌을 단단하게 고루 깔고 억새풀을 깔면 안락한 침대가 되었다. 나도 훈련병들과 함께 보리 섞인 밥에 싱싱한 배추김치로 배를 채우고 그 돌침대에 누우면 벽이나 천정 사이로 별이 보였다. 밤중이면 먼 곳에서 들리는 듯 천등소리와 같은 B29 증폭기 소리가 으르렁 거리며 들려왔다. 오키나와에서 발진한 폭격기가 전선의 적 후방을 폭격하러 가는 것이라고 선임하사관이 말해주었다. 그곳은 겨울에도 영하로 내려가는 날이 거의 없어서 겨울에도 밭에서 채소가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다.해안선에서 보면 그리 높지 않게 보이는 한라산도 해발 1950미터로 지리산의 1915미터보다 약간 높다. 한라산 머리에는 눈이 하얗게 덮여있었다. 그 당시까지도 4.3폭동의 여파로 400등고선 이상의 지역에는 민간인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끝이 보이지 않게 자라난 억새풀은 장관을 이루고 광활한 초원을 이루고 있었다. 이곳에 목장을 운영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옛날에는 감귤나무가 많아 임금님께 진상까지 했다고 전해오고 있다. 영상의 기후대라서 감귤농원은 될 것 같다고 상상해보았다. 꼭 한 번 해봄직한 사업이라고 확신이 들기도 했다. 언젠가는 이곳에 와서 목장도 감귤농장도 해보려니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저 나의 생각이었을 뿐 후에 재벌들이 들어가 목장과 농장을 경영하고 있다고 들었다. ‘군자여세출’이라고 했다. 내가 그곳에서 목장의 꿈을 꾸고 있을 때 지금의 목장주들은 꿈도 못 꾸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꿈으로 끝나고 그들은 현실의 목장주가 되어있으니 선견지명이라고 자위나 해두자.지금 생각하면 그런 비슷한 일들이 많았었다. 남들은 생각조차도 못하는 시기에 나는 생각하고 연구한 일이 많다. 내가 이미 오래전에 구상한 생각이 수년 혹은 수십 년 후에 다른 사람에 의해 실현되는 일들도 많다. 나의 아이디어나 생각들이 시기를 너무 앞섰다고 해두자. 영웅호걸도 시대를 타고나는 것이라고 옛사람들은 말했다. 나는 영웅도 호걸도 또 군자도 못되니 내게 해당되는 말은 아니리라. 이야기의 방향을 돌리자. 사람들은 제주도를 삼다도라 부른다. 돌, 바람, 여자가 많다는 의미인 듯하다. 바람이 많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나는 강한 바람을 싫어한다. 그 바람을 견디는 게 고통이라면 고통이었다. 바람이 많이 부니 땅바닥에 있는 흙이 날아간다. 그러면 바닥에 묻혀있던 돌들이 밖으로 나온다. 그래서 돌이 많아진다. 농사꾼들이 경작지에서 돌을 주워내도 바람이 불면 또 돌이 생겨나니 아예 돌을 주워내려고 하지 않는다고 했다.실제로는 여자가 그리 많은 것 같지는 않아 보였는데 여자가 많아 보이는 이유는 여자들이 가정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남지 못지않게 일터에 나와서 근로에 종사했고 일의 마무리도 여자들이 주로 했다. 연장을 들고 다닌다거나 소달구지 고삐를 잡고 간다거나 무거운 물건도 여자가 짊어지고 나르는 풍경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여자가 노동을 많이 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삼다도가 된 듯하다.제주도 여성들이 생활력이 강하다는 것은 맞는 말인 것 같았다. 내가 묵고 있던 집에 딸이 있었다. 서울 모 여대에 재학 중인데 겨울방학이 되어 집에 왔다. 여대생은 여장을 채 풀기도 전에 물통을 지고 바닷가 샘으로 물을 기르러 나갔다. 여자들 가운데 한가하게 노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한 듯하다. 바다에 나가 물질을 하고 밭일을 하며 때로는 군인들을 상대로 구멍가게나 행상도 부지런히 했다. 바닷바람에 얼굴이 가무잡잡하게 그을었지만 육지여성과는 대조적인 순수한 아름다움과 부지런함 속에 담긴 기쁨과 보람을 그들의 얼굴에서 읽을 수 있었다. 한번은 성산도라는 작은 어촌에 들렸다. 제주도 가장 동쪽에 위치한 곳으로 일출봉이라고 하는 작은 봉우리가 바닷가에 솟아있다. 봉우리 안쪽으로 길이가 약 1백 미터쯤 되고 경사가 45도 가량 되는 경사지에 잔디가 곱게 깔려있었다. 겨울인데도 잔디의 색이 파릇파릇 싱싱했다. 걸어서 올라가기는 어려운 지형이었다. 그런데 그 마을 꼬마 녀석들인지 봉우리를 끼고 옆으로 돌아서 올라가 작은 판자를 미끄럼틀처럼 타고 내려오곤 했다. 강원도 산골 아이들이 눈썰매를 타고 내려오는 풍경과 흡사했다. 반대편 바닷가를 보니 100미터는 넘어 보이는 바위 절벽이 서있다. 바위가 그 자리에 언제부터 서있는지 가늠할 수는 없으나 모진 바람과 거센 파도와의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바람과 파도의 성화에 못이긴 듯 바위는 골격만 앙상하게 남아 마치 괴물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런 바위도 지금은 육지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관광지가 되었다고 하니 무엇이든 세월과 시간이 지배하는 듯하다.그 섬을 한 바퀴 돌아보아보니 웅장한 폭포와 기암절벽, 길이가 미처 확인되지 않은 굴도 있었다. 당시에는 제주시와 서귀포 등 두세 지역 정도만 개척이 된 듯했으나 나머지 지역은 거의가 원시의 모습 그대로였다. 이 섬이 더 이상 때 묻지 않고 원래의 모습 그대로를 고이 간직하기를 마음으로 간절히 기원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관광이라는 명분 아래 그 아름다운 자연이 원래의 모습을 잃고 현대인들의 오염된 구둣발에 짓밟히고 있다고 한다. 오염되어서는 안 될 성역이 오염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하고 아쉬워하는 이는 나 혼자뿐일까?<예감>어느덧 제주도에서의 삶도 4개월이 지나고 봄이 오고 있었다. 남쪽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훈훈한 바람은 푸른 삼다도를 더욱 푸르게 했다. 5월 초 어느 날이었다. 출근길 자동차 안에서부터 무슨 일인지는 모르나 마음이 설레기 시작했다. 사무실에 도착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무언가 나의 신상에 변화가 생길 것 같은 그런 예감이었다.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이상이 생기거나 서울 처자들에게 문제가 생기기라도 할 것 같은 불길한 생각들이 꼬리를 물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무슨 일인가가 꼭 닥칠 것 같은 예감이었다. 이런 잡념을 떨치려고 명상에 잠겼다. 그 때 갑자기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러나 나는 겁이 나 수화기를 들지 못했다. 옆방에 있던 부관이 들어와서 전화를 받았다. 그는 소본부 인사참모의 전화라고 말했다. 내가 수도사단 부사단장으로 발령이 났으니 속히 부임하라는 전갈이었다. 시간이 없었다. 부교장에게 그동안의 사무를 대충 인계하고 오덕준 소장 등과 작별인사를 하고 그곳을 출발했다. 30여 년을 순탄하게 살아온 것도 아니지만 그때처럼 영감에 사로잡혔던 일도 드물다. 그 때는 나 자신도 남들도 영전이라고 축하해주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하니 내 운명의 전환을 뜻한 영감이었을 줄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했었다.대한해협 상공을 날라 예정대로 부임해 부사단장으로 취임했다. 승승장구하는 오르막길에서 180도로 추락하는 실추의 길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26. 청룡의 실추1953년 5월 5일자로 수도사단 부사단장에 취임했다. 나의 또래들과 비교할 때 파격적인 인사였으며 가까운 장래에 장군으로의 진급을 암시하는 예비단계인 것이었다. 사단장 C(최창언) 준장은 실전경험이 적고 성격이 외골수여서 매사가 원만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전선은 소강상태로 수개월간 적과 접촉이 없어 적정에 어두웠다. 상부에서도 포로나 한 놈 잡으라고 성화했지만 무력수색은 엄하게 금하고 있었기 때문에 포로를 잡거나 적의 정보를 얻는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7월 13일 적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습격을 당한 것이다. 이 전투가 나의 승승장구하던 무운을 여지없이 꺾어놓고 내 운명을 뒤집어놓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채 나는 전선으로 나갔다. 당연히 사단장이 나가야 할 전선으로 말이다. 주방어선인 연대지휘소에 도착하니 때는 이미 늦었다. 그러나 예비대의 운영만 잘 했어도 전황이 조금은 달라졌을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 지휘관의 결정이 변경되었다는 것과 예비연대장의 명령불이행이 실패의 원인이었다. 분초를 다투는 극한 상황에서 금쪽같은 연대는 총 한발 쏘아보지도 못하고 걷잡을 수 없이 분산되어 전투력을 상실하고 말았으며 전선은 여지없이 적에게 유린되고 말았다. 연대지휘소에서 최후의 순간까지 버티던 나는 벙커 밖에서 적의 수류탄이 무수히 터지면서야 부득이 후퇴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적의 중앙에 포위된 상태였다. 때마침 비가 쏟아지고 칠흑 같은 어둠이 주변을 에워쌌다. 약 2킬로미터쯤 후퇴했을까. 평소에는 물 한 방울 없던 계곡 개울에 거센 물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전에 들었던 강원도 산골물인 듯싶었다. 이 물을 건너면 우군의 8인치 포진지가 있다. 날은 이미 밝았다. 몹시 거센 물결을 가로질러 야전용전선이 몇 가닥 늘어져있었다. 전선을 당겨보니 제법 튼튼했다. 헤엄을 못 치는 나는 이 전선을 붙들고 물을 건널 생각으로 그 전선줄에 매달렸다. 그 줄이 끊어져버렸다면 차라리 나에게는 다행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줄은 나를 무사히 강 건너편으로 옮겨주었다. 그곳에서부터 고개만 하나 넘으면 우군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낮에 행동에 옮길 것인가, 풀 속에 숨어 있다가 밤에 다시 움직일 것인가 고민하며 주위를 살펴보니 소위 한 명과 하사관 두 명이 옆에 있었다. 소란스럽던 꽹과리나 피리, 호루라기 소음 같은 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어디까지가 적지이며 우군진지는 어디인가? 주위가 너무나 조용했다. 동녘으로는 어김없이 1953년 7월 14일의 아침 해가 돋아 오르고 있었다. 강물을 건넜으니 8인치 포가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돌아보니 높은 언덕 너머로 8인치 거포의 끝부분이 쫑긋거리며 보였다. 원래대로라면 그곳은 분명 아군지지여야 한다. 그러나 아군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지옥문>
우선 산의 숲속으로 몸을 숨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몸을 일으켜 산 쪽으로 몸을 돌리려는 순간 운명의 신은 나를 냉정하게 내동댕이쳐버렸다. 돌연 등 뒤에서 따발총 소리가 들리며 나의 발 앞으로 총탄이 일직선을 그리며 지나가는 광경이 마치 서부영화에서나 보는 그런 장면이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중공군 병졸들 약 20명이 우리 일행을 원형으로 둘러싸고 좁혀오고 있었다.
몸에 아픈 곳이 없는 것으로 보아 총에 맞은 것 같지는 않았다. 함께 있던 사병들도 무사했다. 그 순간 나는 적에게 잡힌 포로가 된 것이다. ‘포로’가 된다는 것을 일본인들은 최대의 수치로 여겼다. 자결이라도 해야지 살아서 포로가 된다는 것은 용납이 되지 않았다. 부상이라도 당해 어쩔 수 없이 포로가 되었다고 해도 불명예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미국인들의 포로에 대한 개념은 달랐다. 그들은 명예스럽게 생각한다. 전투에서 최후까지 싸웠다는 의미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생명을 존중하는 그들의 견해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관념은 어떤 것이었을까?
나는 전쟁 중 십여 차례를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극한 상황에서도 기적적으로 극복하고 살아났었다. 약간 과장하자면 웬만한 산골짜기는 뛰어서 넘을만한 기개와 체력도 가지고 있었다. 20대의 청년 부하장교들도 산을 타는 일에 있어서는 감히 나를 앞서지 못했었다. 그 때의 나는 희망과 정열에 불타며 사명감으로 가득한 30대 중반의 청년장교이자 지휘관이었다.
탈출을 시작해서 5,6시간이면 충분히 안전지대까지 도착했을 텐데 겨우 2킬로미터 남짓 빠져나와서 이런 꼴을 당하다니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유는 단 하나였다. 체력이 극도로 쇠약해져있었다는 사실을 나 자신도 모르고 있었고 이전과 다를 바 없이 나의 체력이 건강하고 왕성하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는 달랐다. 마치 진흙탕에라도 빠진 듯 다리에서 힘이 빠져나가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뛰는 것은 더 어려웠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나의 체력이 그처럼 쇠약해졌는가? 돌이켜보니 그 무렵 2개월 동안 밤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식사도 정상적으로 하지 못했었다. 밤을 못자고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증상은 누구나 마음속에 근심걱정이 있을 때 나타난다. 그런데 그 무렵의 나는 승승장구로 운이 좋은 편이었고 가까운 장래에는 군인의 최고 명예도 약속되어 있었다. 그런데 무슨 고민이 있느냐고 사람들은 의아해할 것이다.
나는 그 이유를 이 회고록에 남길 것인가 그대로 묻어둘 것인가를 고민하느라 한동안 회고록 쓰는 일을 중단하고 여러 날 동안 생각에 잠겼다. 나의 운명을 180도로 바꾸어놓고 순탄했던 등용의 문턱에서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 원인을 사실대로 기록으로 남길 것인가, 아니면 영원히 덮어둘 것인가? 여러 날 고민을 거듭하고 결론을 내렸다. 이왕 나 한 사람 희생되었는데 이제 와서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래도 덮어두는 것이 옳은 일이리라. 이렇게 결심을 하고나니 머리도 한결 가볍고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하다. 그래서 여러 날 만에 다시 원고지를 대한다. 그럼 지옥으로 떨어져가는 과정을 되새겨보자.
그 때 나는 도도하게 흐르는 강의 모래사장에 서있었다. 계급장에 그려진 철모와 군복에 부착된 계급장, 주머니에 들어있던 신분증 등은 모두 버렸다. 한 젊은이가 국군작업복을 걸친 채 허수아비처럼 서있는 처량한 몰골이었다. 그 와중에도 나는 양손을 위로 들어 항복을 표시하지 않았다. 죽이려면 죽여라 하는 심정으로 죽어도 네놈들 공산주의 사냥개에게는 항복하지 않겠다는 고집스러운 태도였으리라.
밤새도록 비를 맞아 피부 속까지 젖은 듯했고 갑자기 허기가 났다. 등 뒤에서 중국놈 병정이 나의 등을 밀쳤다. 한 발을 내딛는 순간 발이 몹시도 아팠다. 군화 속에 흙과 모래가 들어간 것이다. 신발에 모래가 들어있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해방 전에 익혀둔 중국말이 창피한 수준이기는 했지만 의사소통은 되어야겠기에 “내 군화에 모래가 들어있어 걷기에 불편하니 잠시 쉬어 씻고 가자.”고 했더니 그들은 자기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를 하는 나를 다시 보더니 승낙을 했다. 나는 물가로 내려가 천천히 군화를 벗고 씻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앉은 중국병사들은 자기들끼리 중얼거렸다. 나에게 위협감을 주는 내용의 대화는 아니었다.
나는 불현듯 일본군들이 포로를 대하는 행동이 생각났다. 일본군은 비전투원인 양민을 잡아도 심하게 괴롭히고 죽이기까지 했다. 일명 ‘섬멸작전’이라고 해 지목된 양민부락에 쳐들어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살육과 강간을 일삼고 심지어 갓난아기의 발을 잡은 채 나무기둥에 후려치는 만행도 저질렀다. 장교 놈들은 숨겨둔 보약이나 골동품, 고서화를 찾느라 혈안이 된다. 하물며 비전투원들도 그렇게 무자비하게 다루는데 전투에서 잡은 포로들은 그 자리에서 즉결 처분하는 것은 지극히 일반적인 것이다. 그들의 잘난 일본도를 가지고 <타메시기리>라고 하는 칼날을 시험하는 일도 많았다. 신병들을 상대로 총검술 실습도 서슴지 않는다. 그런 야만적인 일본군을 상기할 때 이들은 그나마 대륙성 민족의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을 씻고 강둑에 서있는 나의 신세가 처량하기만 했다. 하룻밤 사이에 몸무게가 5킬로그램은 빠져나간 듯 다리가 후들거리고 머릿속에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권총은 허리띠까지 벗어 던진 후라 언뜻 보기에는 무기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나는 그때 바지 뒷주머니에 모젤 3호 소형권총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나의 최후를 장식할 무기였다.
나는 그들과 함께 8인치 포대로 들어갔다. 포들은 조준상태로 포탄이 장전된 채로 방치되어 있었고 거대한 포 견인차도 시동이 걸린 채 그대로 서있었다. 천막 안으로 들어가 보니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모포와 피복류, 소화기총 심지어 카메라도 식탁 위의 음식도 그대로 놓여있었다. 기습을 당한 것일까? 더욱이 자체 경비를 한 흔적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완전 무방비상태였던 것이다.
도대체 무엇을 믿고 자체경비도 하지 않은 채 거액의 군 장비를 고스란히 적에게 넘겨준단 말인가? 이것이 미국인의 낙천주의라는 것인가? 과연 우리가 그들을 믿고 의지해도 되는 것인가? 그 순간 나는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모든 장비가 그래도 있는 정황으로 보아 적의 습격은 거의 없었다고 판단이 되었다. 부상자나 전사가가 한 명도 없었으니 말이다. 앞에 있던 보병부대가 무너지니 그대로 놓아두고 도망을 간 것이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대형 타월 한 장과 내의 두세 벌을 챙겼다. 언제 비가 왔었나 싶을 정도로 쾌청한 날씨에 적병 3,4명의 감시를 받으며 나는 북쪽 길을 따라갔다. 다리를 건널 때 포차 옆에서 한국군 장교 한 사람이 두 눈이 빠진 채 단말마의 고통에 포차 모서리에 스스로 머리를 부딪쳐 죽어가는 모습도 보였다. 조금 더 가니 미국소년병이 논두렁에 앉아있었다. 비가 아직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그 병사는 옆에 있는 움막에 들어가도 되냐고 물었다. 들어가 보라고 했더니 그는 움직이지를 못했다. 살펴보니 양쪽 다리에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를 부축해서 움막 안으로 옮겨주고 나는 다시 길을 걸었다.
한참을 가니 한국군 105밀리 포진지가 나타났다. 이곳 역시 좀 전에 지나온 8인치 포진지와 다를 것이 없었다. 그 옆으로 연발 로켓이 서있었고 앞으로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신병기도 세워져있었다. 그리고 어젯밤 이곳에서 우왕좌왕 하던 연대의 흔적도 남아있었다. 사단 예비대였던 Y대령이 지휘하던 연대였는데 장갑차와 트럭 등이 타이어가 터진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이러한 고성능의 병기들을 송두리째 적에게 넘겨주어야 했던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나는 다시 걸었다. 눈썹이 진하고 키가 작은 한국군 중령 한 사람이 길가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알아보기라도 한 듯 나에게 다가와 자신은 이곳 105밀리 포 대장이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우리는 헤어졌다. 산모퉁이를 돌아서니 우리군 병사들 약 50명가량이 잡혀와 있었다. 나도 그들이 있는 곳으로 보내졌다. 포로집결소 같은 곳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나의 신분이 들통 나고 말았다. 어느 사병 하나가 나를 보더니 깍듯이 부동자세로 거수경례를 했다. 감시병이 이 광경을 못 볼 리 없었다. 경례를 하던 병사는 감시병에게 끌려갔다. 나는 그때까지 종군사진기자라고 적병을 속일 수 있었는데 우리 쪽 사병이 나의 신분을 털어놓는 바람에 나는 신분이 들통 나고 말았다. 그때부터 나는 나의 부관인 장교 한 명과 북으로 끌려갔다.
아군의 주진지선을 지날 때까지 길가에는 셀 수 없으리만치 많은 트럭과 지프차, 병기들이 여기저기 널려져있었다. 탱크도 두 대나 있었고 박격포에 통신기재 등 처참할 정도였다. 그곳을 지나니 어디선가 고성능 스피커에서 젊은 남녀의 목소리가 귀가 따가울 정도로 들려왔다.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산모퉁이를 지나니 갑자기 산과 산이 마주 닿을 정도로 좁은 계곡에 이르렀다. 그 산 기슭에 많은 동굴들이 뚫려있었고 하얀색 가운을 입은 의료인으로 보이는 자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그들은 들것에 실려 온 부상자들을 동굴 안으로 옮기고 있었다. 들것은 대나무 두 개에 두툼한 천으로 만든 것이었는데 들것 한 개에 세 사람씩 들려있었다. 그들은 매우 빠른 속도로 환자를 실어 날랐다.
골짜기의 평평한 지대에는 어떻게 운반해왔는지 탄약상자가 가득 차 있었다. 상자들은 풀과 나뭇가지로 완전하게 위장되어 있었다. 몸에 맞지 않는 누런 빛깔의 허름한 군복을 입은 졸개들은 각자 어김없이 소형전등을 주머니에 넣어 어깨에 메고 다녔고 머리에는 따바리 모양의 모자에 줄을 이어 삿갓처럼 쓰고 있었다. 우군의 공중공격이 있을 때는 그대로 풀밭에 앉아있기만 하면 되는 듯 했다. 우리 제트기들은 상당한 병력이 모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밑에서 오가는 중공군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가고 말았다. 답답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어렴풋이 배신감마저 들었다. 좀 더 철저하게 정찰을 했다면 지상에 널려있는 적을 포착할 수 있지 않았겠는가.
적들은 길가 산줄기에 소총소리가 들릴 수 있을 정도의 거리에 대공초소를 설치한 듯 했다. 소총소리가 들리면 우군 비행기가 오든 안 오든 상관없이 그 자리에서 행동을 중지하고 길가로 대피했다. 잠시 후에는 어김없이 우군비행기가 날아왔다 그대로 지나가버렸다. 차량도 풀과 나뭇가지로 위장해 소총소리가 나면 길가 풀숲이나 큰 나무 밑으로 대피했다.
나는 하루 종일 걸어야했다. 적의 후방 깊숙이까지 들어온 듯 했다. 날이 어두워져서야 겨우 큰 동굴에 도착했다. 동굴 안에는 탱크 두 대가 세워져있었다. 다리를 뻗고 잠을 잘만한 자리도 없었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노획한 건빵 한 봉지로 허기를 면하고 돌 위에 앉아서 눈을 감아보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나의 바지 뒷주머니에는 여전히 권총이 숨겨져 있었다. 죽자는 생각이 들었다. 막상 죽자고 생각하니 내일의 운명이 궁금해졌다. 신문이나 잡지에 실리는 연재소설을 읽다보면 다음 호에서 이어질 이야기가 궁금한 것처럼 말이다. 죽는 일은 언제든 할 수 있었다. 좀 더 살아서 다음을 보고 죽어도 늦지는 않으리라 마음을 추슬렀다. 나의 실종소식이 신문을 통해 전파되고 집으로 연락도 갈 것이다. 연로하신 아버님은 얼마나 애통해하실까 생각하니 숨이 막혀왔다. 그래도 모진 것이 잠인가보다. 쪼그리고 앉은 채 잠이 든 것 같았다.
갑자기 요란스러운 기관포 소리가 나기에 잠에서 깨어났다. 우군의 공습이 있었는지 대공포가 미친 듯이 울어댔다. 동굴에서 멀지 않은 곳에 지휘소가 있지 않나 짐작되었다. 폭탄 터지는 소리가 한동안 계속 이어지다가 어둠의 장막이 내리며 다시 조용해졌다.
잠시 후 우리말을 하는 자가 내게로 오더니 나의 인적사항을 확인하고 좀 기대고 눈을 붙이라고 친절(?)을 베풀었다. 밤이 지나가고 지금 있는 곳은 지옥로 1가쯤 되는 곳인 듯 했다.
<지옥로 2가>
7월 16일 눈을 떴다. 아침은 어김없이 밝아온다. 잠시 후 장교처럼 보이는 자가 와서 자기와 함께 가자고 했다. 나의 신분이 밝혀진 이상 나는 신분에 맞는 대우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에게 “나는 대한민국 육군대령이다.”라고 말하니 그는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나는 이어서 군직에 있는 신분이니 이에 걸맞은 대우를 하라고 요구했다. 어디를 가는지 모르겠지만 걸어서는 못가겠으니 자동차를 가져오고 식사를 비롯하여 침구 등도 준비하라고 명령조로 말했다. 그자는 나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어디론가 가버렸다.
30분쯤 지나자 그자는 미제 자동차(스리제타??) 한 대에 모포를 두세 장 싣고 돌아왔다. 식사는 없었다. 그곳에서 나의 부관과 사병들과 작별하고 나 혼자서 차를 타고 다시 분진하기 시작했다. 가는 도중에 보니 국군사병들이 4,5명씩 모여 감시병도 없이 스스로 북을 향해서 걸어가고 있었다. 나를 실은 자동차는 우군의 공급으로 제대로 속도도 못 내어 석양이 질 무렵에야 어느 강이 흐르는 산골에 도착했다. 징검다리로 강물을 건넜다.
암벽에 높이 2미터 넓이 2미터 가량의 동굴이 있었다. 동굴 안으로 들어가니 주위가 어두워 손전등을 켜 둘러보았다. 나뭇가지를 깔고 가마니로 만든 침대가 놓여있었다. 웬일인지 저녁식사도 양호한 편이었다. 아무리 역경에 처했다고 하더라도 생명이 붙어있는 한 먹어야했다. 3일 만에 대하는 쌀밥이었고 반찬도 파격적이었다. 이들이 장군대우를 하는 것이겠거니 하고 배를 채웠으나 아침에 헤어진 전우들을 생각하니 목이 메어왔다. 식사를 마치니 향이 좋은 중국차를 따라주었다.
잠시 후 인민군 장교 한 사람이 들어왔다. 적이지만 동족을 만나니 반갑기도 하고 증오심도 있었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들어온 그는 나를 향해 깍듯이 존대를 했다. 아픈 곳은 없는지, 불편하지는 않느냐며 친절(?)을 베풀었다. 나는 이곳이 어디냐고 물었다. 군단 전방지휘소가 이 부근에 있으며 내일은 군단이 있는 곳까지 간다고 장교가 대답했다. 추측에 얼마 들어오지는 못한 듯 했다. 장교가 돌아가고 가설침대나마 다리를 펴고 누워 잘 수가 있었다. 꿈도 꾸지 않고 깊은 잠을 잤다.
<지옥로 3가>
아침이 되어 다시 후한 식사와 차를 대접 받고 그곳을 출발했다. 지난밤에 비가 내렸는지 농작물들과 길이 흠뻑 젖어있었다. 동네어구에는 어린 소년이 자신의 키보다 더 큰 소총을 메고 초라한 모습으로 보초를 서고 있었고 미군이 불발한 폭탄을 총처럼 매달아둔 풍경이 보였다. 무슨 목적인가? 이곳에도 역시 게릴라라 출현하는가보다 생각했다. 그날도 차가 고장이 나고 폭격이 심해서인지 실제로는 그리 멀지않은 목적지를 밤이 늦어서야 도착했다.
그들의 군수품 수송은 절묘했다. 야간에도 쉴 사이 없이 트럭들이 남쪽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었다. 공급경보가 내리면 큰길에서 여러 대의 차량이 속도를 최대한 높여 먼지를 일으키며 달린다. 비포장도로라 먼지가 하늘을 찌를 듯이 오르는 틈을 타 트럭들은 필사적으로 달리는 것이다. 우군 폭격기가 상공에서 내려다보면 먼지만 보이기 때문에 폭격을 못하고 그대로 지나가곤 했다.
낮에 보니 편편한 평야지대의 길에는 대형폭탄의 흔적이 남아있었지만 도로는 대부분이 메워져 원상복귀 되어 있었다. 길옆으로 지름이 20미터가 넘어 보이는 탄환흔적은 대형폭탄이 떨어진 자리인 듯 했으나 그대로 둔 상태였다. 폭격으로 인해 도로가 끊기면 그 부근 주민들이 밤새도록 복구 작업을 한다고 했다. 길가의 복구가 안 된 웅덩이에는 맑은 물이 고여 있고 개구리들이 놀고 있었다. 전쟁과는 거리가 먼 풍경이었다.
이런 평지 길을 폭격할 게 아니고 산중턱에 제비집처럼 나있는 길을 폭격했다면 그리 쉽게 복구를 못했을 것이다. 미군 조종사들이 대충 폭탄 몇 개만 투하하고 돌아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만 더 자세히 살피고 공격을 했다면 효과적이지 않았겠는가. 그날 낮에 우군의 공급을 피해 길가에 엎드려 있는데 열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계집아이 세 명이 다가와서 석왕사 가는데 태워줄 수 있느냐고 억센 사투리로 간청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 덕에 나는 이 부근이 석왕사 근처이며 지금은 동북쪽 다시 말해 원산을 향해서 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밤 두시쯤 어느 밀림 속에 도착했다. 움막에서 밤을 새웠다.
<지옥로 4가>
날이 제법 쌀쌀했다. 모포를 어깨에 두르고 쪼그려 앉은 상태에서 잠시 졸았다. 산새들의 소리가 유난히 요란스러웠다. 둘러보니 밀림이 말 그대로 원시림이었다. 1백년 생쯤 되어 보이는 소나무가 빽빽하게 서있는 곳이었다.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려왔다. 나와 약간의 거리를 두고 어려보이는 소년병 한 명이 나를 감시하느라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서있었다. 물소리를 들으니 갑자기 세수가 하고 싶어진 나는 소년병을 불러 손짓발짓을 동원해 세숫물을 가져오라고 했더니 그는 계곡을 손으로 가리키며 나의 등을 밀었다.
나는 전날 미군 8인치 포 진지에서 챙긴 내의와 타월을 가지고 내려갔다. 골짜기는 생각보다 훨씬 넓었고 양쪽으로는 경작지도 있었으며 널찍한 바위도 있고 맑은 물이 시원스럽게 흐르고 있었다. 새벽에는 쌀쌀하던 날씨도 한나절이 되면 무척 더웠다. 며칠 동안 씻지도 못하고 땀에 찌든 몸을 씻으려고 옷을 벗었으나 비누가 없었다. 그래도 맑은 물에 몸을 담그고 목욕을 하고 나니 한결 상쾌해졌다. 옷도 맑은 물에 헹구어 빨았다. 감시병도 따라오지 않고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한나절을 물속에서 지내고나니 시장기가 돌았다.
채 마르지도 않은 옷을 걸쳐 입고 밀림으로 들어갔다. 나이 어린 중공군 병졸들이 3,4명 모여앉아 트럼프놀이를 하고 있다가 나를 보더니 한 녀석이 쟁반에 무엇인가를 받쳐 가져다주었다. 자세히 보니 잡곡에 감자를 섞은 것이었다. 배는 고팠지만 식욕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억지로 음식을 먹고 평지를 찾아 모포를 펼치고 누웠다. 몸이 개운해서인지 어느 사이에 깊은 잠에 들었다가 석양이 질 무렵에야 잠에서 깨어났다.
불안, 초조, 실망, 공포가 걷잡을 수 없이 교차되면서 죽을 기회만 노리면서도 권총의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며 몇 날을 보내야했다. 그 순간에도 역시 증오와 불안, 공포에 사로잡혀 몸부림치고 있는데 갑자기 움막 안이 밝아지면서 황금색의 햇빛이 들어왔다. 이상하게도 그 햇빛이 머리와 가슴까지 스며드는 느낌이 들면서 지금까지 역류하듯 하던 피가 이제는 정상적으로 도는 듯 팔다리에 힘이 솟구쳤다.
눈을 감으니 아버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아버님은 인자한 눈으로 “큰애야, 기운을 내라. 기운을 내.”라고 하시며 사라졌다. 놀랍게도 기운이 다시 나고 용기도 의욕도 생겨났다. 머리도 한결 맑아졌지만 한편으로는 혹시 아버님이 돌아가신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나는 그때부터 아무데서나 자고 아무것이나 먹고 체력을 다져 이 지옥에서부터 기필코 탈출을 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기분도 가능하면 밝게 유지하기로 했다. 그리고 후일을 알 수 없지만 많은 것들을 잘 보아두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날 저녁은 잡곡밥에 시래깃국이었으나 맛있게 먹어치웠다. 조금 더 가져오라고 할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대한민국의 고급장교가 체면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또 다시 날은 밝았다.
산새들의 지저귀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 계곡으로 내려가 세수를 했다. 치약과 칫솔이 없는 것이 불편했지만 맑은 물로 개운하게 헹구었다. 한나절이 다 되었을 때 중국놈 장교와 사진사가 왔다. 조금 넓은 원두막 같은 곳에서 면담이 시작되었다. 나는 서투르나마 중국말을 했더니 그들은 매우 좋아하며 내가 포로의 신세인데도 너그러이 대해주었다. 사진사는 필름 소비를 염두에 두었는지 사진도 몇 장밖에 찍지 않았다. 그들은 답례라고 사탕과 과자가 담긴 봉지를 하나 남기고 돌아갔다. 나는 어린 감시병들과 과자를 나누어 먹으며 친해졌다.
나무 사이의 틈으로 보아도 사람이라고는 눈에 뜨이지 않았다. 오후에는 공산군 병졸 7명이 낫을 들고 건너편 산기슭으로 올라가는 게 보였다. 풀을 베러가는 듯 했다. 한 방의 총소리도 들리지 않는 조용한 목가적 분위기였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다시 출발했다. 감시병 중에 우리말을 유창하게 하는 병졸이 있어 심심하지는 않았다. 지금 떠나온 곳이 어디냐고 물으니 군단 사령부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막사 하나 보지 못했다고 했더니 막사는 산등 너머에 있다고 했다. 중공군은 포로를 자기들의 본거지 안까지 들여놓지는 않았다. 그만큼 보안에 철저하다는 뜻이었다. 반면 졸병 포로 한 명만 잡아도 고급 사령관실까지 끌고 들어가는 우리군의 실상과는 매우 대조적인 일이었다. 산에서 내려오면서 보니 완벽하게 위장된 곡사포진지가 요소요소에 설치되어 있었다.
<지옥로 5가>
그 날 낮에 도로가에 농가가 5채 서있는 동네에 도착했다. 한 집에만 사람이 살고 있었다. 자동차의 고장으로 우리 일행은 이 동네에서 묵게 되었다. 농가에는 50대 부부와 20대 젊은 딸 둘이 함께 살고 있었다. 큰딸은 결혼을 했으나 남편은 군대에 가고 없었다. 지독한 골수분자인 듯 나를 노려보는 눈초리에 독기가 서려있어 보였다. 주인은 농부지만 성격이 쾌활하고 장부다웠으며 그 부인은 인자한 어머니상 그대로였다. 작은딸은 아직 미혼이었으나 공산주의자는 아닌듯했다. 생김새도 귀여웠고 언제나 미소를 띠고 있어 큰딸과는 다르게 적개심이 없어 보였다.
집도 농가답지 않게 제법 널찍하고 분합문을 떼어서인지 방들이 탁 트여 넓었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밥상이었다. 된장국과 김치를 곁들인 쌀밥이었다. 웬 쌀밥인가 싶어 밖을 보니 동리 앞으로 넓은 들녘이 펼쳐져있었다. 벼농사를 많이 지은듯했고 군대에 공출하고도 숨겨둔 식량이겠지 생각하며 고마운 마음으로 수저를 들었다. 작은 딸이 숭늉을 가져다 밥상에 올려놓으며 속삭이는 소리로 자기 오라비들이 남에 가서 국군에 있다고 했다. 이북에 이런 가정이 많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딸은 오라비의 이름도 알려주었다.
그 당시 나는 발에 무좀으로 고생을 하고 있었다. 약을 바르지 못한 채 여러 날이 지나 발가락 사이가 짓물러 못 견디게 아팠다. 농갓집 부인이 어디선가 삼 잎사귀를 구해다 으깨어 발에 붙여주었다. 설마 했지만 그래도 마음이나마 위로가 되었는데 자고 일어나니 거짓말처럼 통증이 가셨다. 신기하기도 하고 고마운 마음에 여러 차례 고맙다고 했더니 그 부인이 설명을 했다. 우리 조상들은 짚신을 삼을 때 삼 껍질을 섞었는데 이는 무좀을 방지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우리민족의 민간요법이며 무좀을 예방하는 방법이라는 새로운 사실을 배웠다.
날이 밝았다. 날짜를 세어보니 1953년 7월 20일이었다. 그 날도 수차례 공습이 있었으나 사람이 보이지 않으면 폭격을 하지 않는다고 빈집으로 들어가 밖으로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죽겠다는 생각을 버린 지금에 와서 우군의 폭격에 죽는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 되겠기 때문이었다. 밤이 늦었는데도 고장 난 차의 부품을 가지러간 운전병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우군 비행기가 몇 차례 고공을 지나간 것 외에는 별일 없이 날이 저물었다.
저녁에는 그 집 가족과 나 그리고 나의 감시병이 마당에 자리를 깔고 앉았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니 한가하다 못해 무료하기까지 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집 큰딸과 이념토론이 벌어졌다. 그는 공산주의에 대한 이론이나 체제는 전혀 몰랐고 무당이 신령님 모시듯 김일성을 절대적인 존재로 신봉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다시 말해 김일성의 충견이었다. 더 이상 대화를 나눌 힘도 없어 중단하고 잠을 청했다. 그 집 부인이 이번에도 삼 잎사귀를 구해다주어 발가락사이에 넣고 양말을 신고 머리는 타월로 덮으니 모기도 덤비지 않는듯했다.
다시 날이 밝았으나 운전병은 오지 않았다. 한시라도 빨리 지옥의 바닥까지 가보고 싶었다. 그 날은 미 해군 제트기가 유난히도 잦았다. 비행기들은 내가 있던 동리 앞 구릉을 거의 스치다시피 날아다녔다. 그 집 부인이 어디서 들었는지 남산 역에 집결해있던 중국 놈들 수백 명이 폭격으로 죽었다고 전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미 해군 폭격기의 공습이 그다지 극심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 날 오후에 운전병이 다른 차를 몰고 돌아왔다. 저녁을 서둘러서 먹고 일찌감치 떠나기로 했다. 2,3일 동안 후한 대접을 받은 나는 집주인에게 답례를 하고 싶었지만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 외에는 아무것도 줄게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가지고 있던 내의 한 벌을 농부에게 주고 헌것이나마 타월은 그 부인에게 주었더니 그리도 좋아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해가 질 무렵에 출발했다. 한참을 가다보니 길가에 트럭 몇 대가 폭격에 맞아 불에 타고 있었고 기차역사 같아 보이는 건물에서도 불길이 뿜어나고 있었다. 부상자와 죽은 자의 시신이 역전 광장에 수도 없이 널려져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기차도 한 대 불에 타고 있었다.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듯 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내가 탄 자동차는 소련제 소형차였으나 아주 잘 달렸다. 그러나 계속되는 우군의 폭격으로 달리는 시간보다 대기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밤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화물용 덮개로 천막처럼 지붕을 만들어 비를 피하며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지옥로 6가>
비도 개인 듯 했다. 천막을 제치고 밖을 살펴보니 날은 완전히 밝았다. 자동차는 여전히 동북방을 향하여 달리는 듯 했다. 감시병에게 이곳이 어디쯤이냐고 물으니 저기 앞에 보이는 곳이 안변이라고 했다. 안변이라면 원산과도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그러나 안변 외곽지역에 도착해서 자동차는 정서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원산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서쪽 즉, 평양으로 가는 것임을 알았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곳이 원산이든 평양이든 상관없었다. 오로지 하루 빨리 지옥의 종착역에 도착하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자동차는 비에 젖은 신작로를 달리기도 하고 폭격에 거의 파괴된 작은 다리도 건너며 계속 달렸다. 아직 해는 뜨지 않았지만 맑은 아침이었다. 맑게 갠 하늘에 제비와 같은 날짐승들이 마음껏 날아다니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박쥐들이었다. 나도 날개가 있다면 저들처럼 날아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미물짐승인 박쥐보다도 못한 존재가 되어 버린 나의 처지가 한스럽기만 했다. 앞을 바라보니 먼 곳에 하늘과 맞닿을 듯 높은 준령이 나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해도 뜨고 날씨도 청명했다. 어느 농촌에 들러 아침을 먹었다. 집이라고는 모두가 움막형태였고 그 집들마다 방 안에는 색종이로 장식한 김일성의 사진이 어김없이 걸려있었다. 나이든 아낙들은 윗저고리를 아예 입을 생각도 하지 않고 벗은 채로 다녔다. 길 건너편에는 군대 수송차량인지 트럭이 십여 대 모여 있고 헌 타이어와 빈 드럼통이 놓여있었다.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가끔 윗저고리를 벗은 아낙들이 중공군이 신다가 버린 헌 농구화를 질질 끌면서 땅을 들여다보며 무엇인가를 찾아다녔다. 토종닭이 때를 지어 몰려다녔다. 한 노인이 중공군에게 바칠 것이라며 닭의 무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처럼 보여도 나이는 그다지 많은 것 같지 않은 그 사람은 푸념을 늘어놓았다. 해방 전에는 지주는 아니어도 그런대로 자작농으로 잘 살았는데 전쟁이 나기 전에 황해도에서 이곳 두메산골로 강제이동 되어 움막을 짓고 산다며 하늘을 올려다보고 탄식을 했다.
막걸리라도 한 잔 아니면 최소한 담배라도 한 모금 있어야 위로가 될 텐데 그나마도 없어 보였다. 그때 어느 아낙이 손에 무엇인가를 쥐고 와서 영감에게 슬쩍 넘겨주었다. 좀 전에 수송대 부근을 기웃거리던 노부인이었다. 중공군이 피우다 버린 담배꽁초를 주우려고 바닥을 뒤지고 다녔던 듯 했다.
“간밤에 비가 와서 덥지도 않은데 왜 윗저고리를 입지 않고 있느냐?”고 물으니 옷이 어디 있느냐고 오히려 나에게 반문했다. 옷이 있어도 여름에 입어서 헤지면 겨울을 어떻게 나겠느냐고 덧붙였다. 오호라 이 참상! 누구의 죄이런가. 우리민족이 무슨 죄가 커 이리도 죗값을 치러야 한단 말인가!
우리 민족은 유사 이래 남의 나라나 민족을 침략한 일도 없고 아름다운 아침의 나라로 평화를 상징하며 5천년 역사를 이어온 민족이 아닌가. 이건 분명 창세주의 계산착오임에 분명했다. 장탄식이 절로 나왔다.
지옥의 종착역을 향해 다시 출발했다. 원산을 지나 소련 땅으로 끌려가는 것이라는 나의 짐작과는 다르게 가는 방향이 달라진 것으로 보아 일단 소련 땅으로 가는 것 같지는 않았다. 우선은 평양으로 향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이유는 모르지만 막연하나마 마음이 놓이는 듯 했다. 그러나 궁극적인 목적지는 지옥의 종착역이 될 거라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건빵(우리가 빼앗긴 것)으로 점심을 대신하고 나니 오후였다. 자동차는 험한 산길로 접어들었다. 우리나라의 등줄기인 태백산맥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넘어가는 길이었다. 보수도 잘 안된 듯 노면상태가 불량하기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길가 중간 중간에는 원목들이 수북이 쌓여있었으며 시야에 들어오는 산들은 거의가 벌거숭이였다. 김일성이 전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산을 깎아내고 있기 때문이리라.
남산역 부근 이 씨 집에서 2,3일 지체된 탓으로 인솔병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행군을 계속했다. 그날도 밤새도록 비를 맞으며 강행군을 했다. 한 시간쯤 졸다보니 동녘하늘이 밝아오고 있었고 길은 내리막길이었다. 밤새도록 태백산맥을 넘어온 듯했다. 험하기 이를 데 없는 산길은 마치 제비집모양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런 곳을 찾아서 폭격을 해야 복구에 시간이 많이 걸릴 터인데 주변을 돌아봐도 어느 곳에서도 폭격의 흔적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동서로 통하는 길이라 전략상 가치가 없는 길인가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자위가 되기도 했다.
한나절쯤 되어 높이 솟은 굴뚝들이 여기저기 서있어 공업지역으로 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건물들은 거의 파괴되어 성한 곳이 없는 유령의 도시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듯 눈에 익은 모습의 고장이었다. 그렇다. 북진당시 이 곳을 통과한 적이 있다. 그 당시는 이렇게까지 파괴된 상태는 아니었다. 지명이 ‘영원’이었던 것으로 지금은 기억이 희미하다. 우리 국토의 중앙쯤 되는 위치다. 그곳에서부터 서쪽으로 직진하면 평양이고 남쪽으로 가면 남천이나 김천 방향으로 연결된다. 그런데 내가 탄 자동차는 서쪽으로 가지 않고 남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한참을 남쪽방향으로 내려가다 보니 폭이 제법 넓은 강이 나오고 부서진 다리가 나왔다. 그 다리를 겨우 건넌 자동차는 서쪽 제방 둑으로 접어들었다. 그들의 의도를 도무지 파악할 수 없었다. 그리도 심하던 우군의 공습도 거의 없었다. 아마도 부근에는 군사목표가 없어서일까.
제방 둑을 따라 두어 시간을 달렸다. 거리로는 그다지 멀지 않았지만 노면이 좋지 않아서 자동차바퀴가 빠지기 일쑤였다. 저녁때가 다 되어 제방 둑이 끝나고 강변 모래사장이 펼쳐진 곳으로 접어들었다. 가옥이 한 채 서있는 산골짜기에 이르렀으나 연일 내린 비로 강물이 불어나고 강가 모래사장은 물에 잠기는 바람에 차량의 통행을 금지했다.
일행은 그곳 민가에서 밤을 보내기로 하고 차에서 내렸다. 오막살이 초가삼간 화전민의 농가였다. 방에는 세간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빈대와 벼룩이 제 세상을 만난 듯 날뛰고 다녔다. 내 나이 삼십 살이 넘도록 그런 광경은 처음이었다. 우리는 잘 곳도 먹을 것도 없는 신세가 되었다. 반쯤 물에 잠긴 자동차로 다시 기어 올라가 천막을 덮고 밤을 지새우기로 했다.
졸병 한 명이 먹을 것을 구한다고 어디론가 갔다. 다음날 새벽이 되어서야 식량이랍시고 감자 알갱이 몇 개를 가져왔다. 모닥불에 감자를 구어 입에 넣었지만 목에서 넘어가지를 않았다.
자동차를 타고 골짜기를 넘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일행은 물이 찬 강가에 이르러서 더듬거리며 떠났다. 물이 깊으면 산기슭에 매달려 나아갔다. 지옥길을 거쳐 가는 과정이 수월하지 않았다. 험난한 코스를 두 시간쯤 거친 후 강은 훨씬 좁아지고 물도 많이 줄었으나 이상하리만치 강물의 색이 백색으로 물들어있었다.
산골에서 흐르는 물은 비가와도 맑은 상태일 텐데 물의 색은 마치 탁한 막걸리 같은 색깔이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모퉁이를 돌아가니 언덕이 하나 나타났다. 그곳으로 올라가보니 민가도 있고 사람들이 줄을 서 식량을 배급받고 있는 듯 했다. 사람들이 사는 촌락이었다. 건너편 산화전에는 옥수수가 제법 많이 자라있었다.
그곳에도 윗저고리를 입지 않은 노파가 무슨 일인가에 몰두하고 있었다. 물론 배급받는 무리들 가운데도 윗옷을 걸치지 않거나 맨발인 노인들이 많이 있었다. 한참을 더 가니 시야가 확 트이는 광장 같은 곳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곳에는 미국인 수백 명이 눈에 띄었다. 일을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무척이나 피곤한 기색들이었다. 그들은 암벽에 뚫은 작은 동굴 속에서 네다섯 명씩 기거하면서 막걸리색의 물에 목욕도 하는데 마치 유령들 같았다. 그 전날까지 아니 그날 아침까지 광산에서 노동을 한 듯 했다.
그곳을 지나 조금 더 갔다. 언덕 위에 판잣집이 한 채 서있고 그 곳에 중공군 병사들이 추녀 끝에 매달린 스피커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 심각한 표정을 짓고 앉거나 서있었다. 나를 감시하던 병정 한 명이 뛰어가더니 잠시 후 돌아왔다. 어딘가로 가자고 하며 중국말로 지껄였지만 방언이 심해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정오쯤 그 동리를 벗어나 동구 밖에 있는 개울을 건너 판잣집으로 갔다. 그곳은 의무실 같은 곳이었다. 판잣집 안으로 들어서니 하얀 가운을 입은 조선인 남자 한 명과 젊은 여자 한 명이 나를 맞이했다. 판자로 칸막이를 했을 뿐 문도 없고 창문도 없는 창고나 외양간 같은 곳이었다. 나무로 만든 침대 비슷한 것 위에 모포만 한 장 깔려있었다. 그 위에 걸터앉아 있으니 잠시 후 그들이 들어와 청진기를 기울이며 진찰이라는 것을 시작했다.
시키는 대로 했으나 특별한 말은 없었다. 무좀약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여자가 가루약을 먹으라며 가져다주었다. 해방 전부터 앓고 있는 무좀이니 십년은 족히 되는데 그동안 단 한 번도 먹는 약으로 치료를 한 적이 없었다. 피곤하고 허기가 져서 사람을 불렀더니 또 그 여자가 왔다. 베게가 없다고 했더니 나무토막을 한 개 가져다주고 속삭이는 말로 아느냐고 물었다.
무슨 말이냐고 물었더니 조금 전에 휴전이 조인되어 전쟁이 중단되었다는 것이다. 현재 시각이 몇 시인가 보았더니 정각 오후 2시였다. 그때 나는 오메가 금시계와 파카21 만년필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들은 빼앗지 않았다. 내가 오늘이 며칠이냐고 물으니 그는 7월 28일이라고 대답했다. 휴전이 된 것도 모르고 나는 황해도의 이름 없는 산골짜기 개울가에서 지냈던 것이다.
7월 15일 포로가 되어 7월 29일 휴전이 조인된 날까지 13일이 지났다. 단 13일만 무사했더라면 하는 생각에 분통이 터지고 심장이 툭 멈춰서는 것 같았다. 몇 번이고 바지 뒷주머니에 들어있는 권총으로 손이 갔다. 그러나 또 내일 일이 궁금해지면서 결국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다시 솟구치는 증오와 원망, 분노와 절망감이 극도에 달해 피폐해진 나의 목숨이나마 앗아갈 것 같았다. 눈물도 말라버렸는지 나오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밖은 이미 어두워져있었다.
백의의 여인이 쟁반에 무엇인가를 가져와서 먹으라고 했다. 하얀 죽이었다. 먹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고맙다고 받아놓기는 했지만 도저히 먹을 마음이 나지 않았다. 희미하나마 전기불도 있었다. 그녀는 전깃불을 맘껏 켜놓을 수 있어 살맛난다고 혼자 좋아했다. 그리고는 수다스러운 목소리로 자기를 소개했다.
중국 북경에 사는 교포의 딸로 간호사였는데 소집이 되어 이곳에 간호장교로 와있다는 이야기로 시작해 쓸데없는 수다가 계속 이어졌다. 그러면서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진 머리빗을 하나 주며 북경에서 가져온 것인데 가지고 다니며 쓰라고 했다. 나는 한 술 더 떠 치약과 칫솔을 구해달라고 했더니 다음날 적십자 마크가 인쇄된 치약과 칫솔을 가지고 왔다. 뒷면에는 ‘Made in USA’라고 인쇄되어 있었다.
그 날 개울 건너 큰 길에 난데없이 초등학교 꼬마들로 보이는 아이들 약 50 명가량이 조그만 깃발을 들고 행진을 하며 무어라고 외치며 지나갔으나 무슨 말인지를 못 알아들었다. 조금 후에는 국군포로들이 트럭에 가득 실린 채 목청을 높여 노래를 부르며 지나갔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국군포로들 중 전향한 자들로 일명 해방 전사라고 하는 무리였다. 오늘 휴전이 될 줄 모르고 수치스럽게도 항복의 손을 들고 만 그들을 생각하니 기분이 착잡해졌다.
그 날 오후 “나, 남 중좌입니다!”라며 서른 살 정도의 준수하게 생긴 청년장교 한 명이 찾아왔다. 그는 인상이 좋은 편에다 말소리도 구수한 서울 말투였다. 병실은 답답하니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그와 나는 징검다리를 건너서 수양버늘 아래에 마주 앉았다. 그는 휴전 소식부터 먼저 전했다. 나는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자가 나를 세뇌시키기 위해 온 것으로 단정했다. 그러나 그는 의외였다. 6.25는 자기네가 먼저 남침했다는 사실과 남침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거추장스러운 변명 같은 소리를 늘어놓고 떠났다. 즉, 6.25 남침은 인정하지만 합법적이라는 것이었다. 하기야 처녀가 아기를 낳아도 할 말이 있다지 않았는가.
그날 밤 늦게 중상을 입은 국군 한 사람이 옆방으로 실려 들어왔다. 그는 밤새도록 담배며 물을 요구하며 떠들어대는 바람에 나는 한숨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그날 낮에 남 중좌가 주고 간 중국제 담배가 나에게 한 갑 있었다. 나는 보초병을 불러 그 부상군인에게 전해주라고 주었다.
지옥에도 날은 밝았다. 아침에 죽을 한 그릇 먹고 있는데 감시병이 찾아와 이동한다고 했다. 나는 그곳이 지옥의 바닥인줄 알았는데 또 다른 바닥이 있나보다고 생각하며 따라나섰다. 이번에는 자동차도 없이 걸어서 가야 했다. 우리가 지난 이삼일 동안 지나온 길을 되돌아서 걸어갔다. 동네 반대편 동구 밖에서 골짜기로 올라가니 오두막이 한 채 서있었다.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그곳에 있으라는 것이다. 감시병도 그냥 가버리고 아랫방에는 젊은 여자와 다섯 살 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가 있었다.
저녁이 되자 여자가 감자밥을 가져다주었다. 그곳은 전기불도 없었다. 조그마한 마당에는 무엇인지 심어져있었다. 따발총을 맨 중국 군인이 서너 시간 간격으로 다녀가는 것 외에 감시는 없었다.
날은 다시 밝았지만 간밤에 벌레 등쌀에 잠을 못자고 밤새도록 마당 한구석에서 풀을 모아 풀 연기를 내며 밤을 지새워야했다. 조반하라는 소리에 눈을 떴다. 밀기울에 쌀 알갱이 몇 알 넣어 끓인 죽 한 그릇이었다. 식욕은 없었지만 살아있는 동안은 살아야겠기에 두세 수저 떠먹었다.
그 집 주인은 인민군에 끌려갔다고 했다. 내가 먹다 말고 밀어놓은 죽을 그 집 아이는 천하에 진미라도 만난 듯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주인여자는 뜰에서 밀을 탈곡했다. 한 가마쯤 되었다. 조금 있다 장정 한 사람이 오더니 가마를 등에 지고 갔다. 초저녁에 동네 노인 두 명이 오더니 “공출했다며?”라고 인사를 했다. 여주인은 “일 년 동안 농사를 지어서 밀전 한 장 못 부쳐 먹고 다 털어서 공출해 갔다.”고 푸념했다. 남은 것은 밀 찌꺼기 한 바가지가 전부라고 했다.
동네 노인은 한숨을 쉬며 “이놈에 지긋지긋한 지옥살이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거여.”라며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담배도 들어있지 않은 빈 담뱃대만 연신 빨아댔다. “아, ‘지옥살이’라고 하는구나. 그럼 저들도 지옥살이를 하고 있는 거로구나. 나와 같은 한 동지가 아닌가.” 나만 지옥의 망령이 아니라 나 말고도 이곳에도 지옥을 맛보며 사는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 한 편으로 위로가 되기도 했다.
다음날 아침이었다. 여주인이 아침식사를 가져왔다. 감자밥이지만 쌀알도 섞여있었고 이름 모를 산나물 무친 것도 반찬으로 곁들여있었다. “선생님, 귀하신 분 같은데 먹기 어려워도 억지로라도 먹고 기운을 차려서 이 지옥을 빠져나가야 합니다.”라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지옥에서 만난 관세음보살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그의 등 뒤로 떠오르는 아침 해가 부처님의 후광처럼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밥을 남겨서 꼬마에게 주었다. 뒤뜰에서 가져온 판자를 깔고 누워있으니 좀 전에 먹은 산나물 냄새가 입에 남아 향기가 났다. 그늘 아래는 시원해도 밖으로 나가면 금방 더워지는 한여름이었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태양은 가차 없이 이글거렸다. 좁은 판자위에서 엎치락뒤치락 하며 시간을 보내려니 지루하기 이를 데 없었다.
집 앞 마당에 과일나무가 세 그루 서있었다. 자세히 보니 나뭇가지에 작은 함석조가리들이 매달려있었다. 돌매질을 하고 있는 여인에게 물어보니 그녀는 한숨부터 내쉬며 그 나무에서 열리는 과일의 개수를 적어놓은 표시라고 설명했다. 마침 세포반장이라는 젊은이가 왔다. 그는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이 집 밭에 심은 콩 포기가 몇 포기니 수확해서 공출하라고 종이쪽지를 한 장 던져놓고 사라졌다. 무슨 말이냐고 물으니 논두렁에 심은 콩까지도 공출을 해간다며 여인은 서글픈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앞산 비탈을 건너가 보니 화전 옥수수 밭에서도 역시 윗옷을 걸치지 않은 노인이 구리 색으로 그을린 상체를 드러낸 채 옥수수의 익은 열매를 거두고 있었다.
<7.백마고지의 영웅 임익순 대령 회고록 내 심장의 파편> 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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