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 통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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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4-03-22 03:38 조회5,47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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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독정권 최후의 날
지난 기사에서는 20여 년을 외채에 의존하며 서독과 사회복지정책의 우열경쟁을 벌였던 동독 경제의 심각성에 대해 보도했었다. 최근 동독정권이 무너지기 직전인 1989년 11월 초, 최고 정치기관인 당 중앙위원회 (Zentralkomitee)에서 벌어진 경제문제 토론상황이 알려졌다. 토론이라기보다 동독경제 실상을 있는 그대로 적나라하게 드러내 놓은 폭로의 현장이었다. 다음은 공산당 경제계획 및 재정문제 담당서기의 발표문이다.
“오늘 우리가 처해있는 어려움을 놓고 한마디로 그 원인을 지적해 본다면 1973년 이래 계속 분에 넘치는 과소비생활을 해왔다는 데 있다. 우리는 빚을 갚기 위해 또다시 새로 빚을 져야 했다. 여기서 빠져 나오려면 적어도 15년간 피땀 흘려 일해야 하며 생산보다 소비가 적어야 한다. 실생활을 통해 우리는 누구나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한계 내에서만 지출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만약 동독이 기업이었다면 벌써 부도 처분됐을 것이다. 국가지원으로 물가를 낮출 수는 있었지만 이를 위해 지불한 대가는 너무 컸다. 국가지원금은 불과 20년 사이에 8배 증가했다. 이로 인해 부채 증가 뿐 아니라 국가경제의 기반이 무너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재투자가 없어 생산업체는 낙후한 기술로 작업을 계속 했고 노동자들은 국가가 일방적으로 정한 과다한 책임계획량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즉 국가보조로 일정 기간 이윤을 낼 수 있었지만 이런 경제정책으로 동독이 부도사태에 달하리라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동독상품의 경쟁력에 대해 구체적인 숫자를 제시해 보면, 세계 시장가 5마르크 정도 되는 칩의 생산원가는 무려 5백여 마르크였다.”
동독경제 실상에 대한 이와 같은 구체적인 보고가 있자 중앙상임위원회원들은 놀라움과 분노, 절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 자리에서 문화계 출신의 한 중앙위원은 “우리는 모두 기만 당했다. 지금까지 계속 속아왔다. 오늘 회의내용은 나에게 너무 충격적이다. 나에게는 이제 모든 것이 파멸이다. 내 생이 파멸됐다. 어릴 적부터 당을 믿으라고 교육받은 나는 시키는 대로 행동했다. 나는 이 동무들을 믿었다.”고 했으며 당의 한 중앙위원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치위원들을‘범죄 집단’이라 부르고 이들을 모두 즉결 처분해야 한다고 요구하기까지 했다. 그는 목멘 소리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이 회의는 동독정권이 분해되기 직전에 일어난 일이다. 개개인의 꿈이 산산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이러한 특수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과격한 감정의 폭발이 있었고 독재국가에서 상상할 수도 없는 노골적인 국가권력에 대한 반발이 있었다.
만약 동독이 투명한 사회였다면 멸망직전에 다다를 정도의 비참한 경제사정에 대해 국민 모두가 정확히 알 권리가 보장되었을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국가 최고 권력기관인 중앙당위원까지도 국내정보에 이렇게 어두웠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일부 전문가들의 정부에 대한 경고가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체제유지에 불리한 내용은 국가기밀이라는 이유로 국민의 알 권리로부터 배제되었다. 최고 권력자는 의식적으로 문제의 심각성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국민에 대한 기만이며 권력자가 빠져있는 허황된 환상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모든 독재국가에서 벌어지는 전형적인 종말의 선언이기도 하다. 이것이 자기기만의 전형적인 표출이다.
그리고 한국의 IMF전후의 사정과 눈에 띄게 유사한 점이 있다는 것이 우리의 입맛을 쓰게 한다. 이것이 권위주의국가의 운명인 듯하다. [유럽리포트*1998]
2. 구 동독의 거품경제
동서 냉전시기, 동독의 위정자들은 ‘우리가 경제적으로는 서독에 뒤져 있지만 우리의 정치, 사회제도는 서독에 비해 두 단계 앞서 있다.’ 면서 사회주의 제도의 우월성을 국민에게 선전해 왔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와 경제의 양면경쟁에서 동구는 종국적으로 경제의 파탄으로 인해 이데올로기의 패배를 맛보게 되었다. 결국 대부분의 인간에게는 -무산대중에게도- 의식의 세계보다는 빵 문제가 더욱 중요한 일차적인 욕구의 대상이었음이 드러난 셈이다.
동독은 동구권 여러 나라와 달리 체제경쟁국인 서독과 가장 첨예한 이념적 대립상태에 놓여있는 전방국가로서 자연히 원칙노선에서 이탈하지 않는 엄격한 사회주의 체제를 실천해 나갔다.
끈질긴 사상교육으로 인간의 의식을 개혁하겠다는 집념과 인간의 무한한 물질에 대한 욕구와의 대립 속에서 서독의 경쟁 상대였으나 이제 패자로 드러난 동독의 실제 경제상황은 과연 어느 정도의 수준이었는가 하는 질문은 누구에게나 호기심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동독 경제력의 실상은 역사의 장이 바뀌고 여러 해가 지난 지금에 와서야 조금씩 그 베일이 벗겨지고 있다. 특히 동독정부는 국가경제자료를 최고 기밀사항으로 취급하여 왔다. 그러면서 그들이 발표한 자료는 서독인들에게는 신빙성이 미약한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이런 이유로 동독의 실제 경제력에 대한 정확한 파악에 큰 어려움을 겪어 온 것이 사실이다. 통독 후 여러 해가 지난 최근에 와서야 동독 경제에 대한 내부 진단이 일부 이루어지는 셈이다.
적어도 표면적으로 나타난 생활수준을 본다면 동독은 소련을 위시한 동구권내에서 월등하게 높은 생활수준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그 속사정은 달랐음이 지금 나타나고 있다.
동독 경제실태에 대해 지금 단계에서 확언할 수 있는 것은 동독 경제력이 서방측에서 가장 회의적이었던 전문가의 추정보다도 실제로 더 나빴다는 사실이다. 동독 집권층조차도 자신의 경제력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제 와서 작은 충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동독 국가경제의 심장부였던 경제기획위원회 책임자조차 당시 경제력 진단은 실제로 불가능했다고 실토하고 있다.
동독의 통계방법에는 수많은 부정확한 요소가 내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사회주의국가 영역 밖에서는 판매될 수 없거나 사회주의국가 내에서도 생산가 이하로밖에 판매될 수 없는 -질이 나쁘거나 수요가 없기 때문에- 상품조차도 생산통계에 잡혀 있었다는 것이다. 또 동독의 통계에는 계획적인 조작행위 (Manipulation)도 비일비재했다. 동독경제는 외부세계로부터 차단된 동구권 철의 장막 내에서만 유지될 수 있었고, 장벽이 무너짐과 동시에 경제도 동시에 붕괴된 결과를 초래했다.
동서독 간 경제력의 격차는 이미 1950년부터 시작되었다. 생산성에서 현격한차이가 생기기 시작했고 이 격차는 그 후 통일 시까지 점점 커져가기만 했다.
동독 경제가 처음부터 어려움을 겪게 된 직접적인 요인은 계획경제로 인해 경제가 전반적으로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던 상태에서 사회주의국가의 기본요건인 사회복지정책에 너무나 과다한 투자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데 있었다.
정부는 시민들에게 항시 관심과 비교의 대상이 되었던 서독의 높은 생활수준 향상에 어느 정도까지 보조를 맞춰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주의국가로서 당연히 서독보다 우월한 사회복지정책을 실현시켜야 한다는 강박감에 시달렸다. 사실 동독과 서독은 경쟁적으로 복지정책의 질을 높여가지 않을 수 없었다.
현재 여러 선진국이 고실업 상태에 돌입하면서 한편으로는 복지정책의 필요성과 다른 한편으로는 그 실현성의 한계점에 대해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다. 여기서 동독이 보여준 실계는 사회복지정책과 경제 효율성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좋은 본보기라고 전문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동독정부는 생산성 제고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국민의 생활수준을 낮출 엄두를 못 내고 외채를 얻어 무리한 투자를 강행했다. 즉 내 살을 베어 먹는 부채를 져서 미래를 대가로 치르며 연명한 셈이다 (lebte von der Substanz auf Pump und auf Kosten der Zukunft).
동독에 통계상 실업자가 없었다는 사실도 그 속을 들여다보면 허상에 불과했다. 예를 들면 동독의 대학행정만 보아도 교직원을 포함하여 40% 이상의 직원은 불필요한 인원이었다. 대단위 화학단지의 1만 2천명 고용인중 노후한 설비 보수공사에만 고용된 인원이 무려 4천명에 달했다고 한다.
1963년 당시 동독수상 울브리히트는 ‘서독 경제를 능가하자 (ueberholen)’ 는 구호를 내세웠다. 당시만 해도 동독의 생산성(Produktivitaet)은 서독에 비해 불과 25% 뒤져 있었으니 이런 구호가 나올 만도 했다. 그러나 20년 후 이 격차는 30%로 커졌고 89년 통독 시에는 40%에 달했다는 것이 동독 측의 공식적인 발표내용이었다.
70년대에 들어오면서 동독의 경제력은 과대평가되었다. 동독은 공산권내에서 가장 생활수준이 높은 것이 사실이었다. 70년대 세계은행은 동독을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인정하기까지 했다. 그 후에는 동독의 통계자료에 대한 신빙성에 의심을 품고 동독을 평가대상에서 아주 제외해 버렸다.
실제로 동독은 70년대 들어와 일시적이나마 일용품 공급이 좋아지고 이에 병행해서 사회복지정책도 강화해 나갔다. 그러나 이 성과는 자체 발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외국차관 덕분이었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이때부터 통일 시까지 동독 국민은 부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빚으로 연명해간 셈이다. 동독 정부는 서독에 비해 엄청나게 생활수준이 뒤지게 되자 민심을 무마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높은 생활수준을 허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외채는 1970년부터 1988년까지 무려 10배나 증가하여 1230억 동독마르크에 달했다. (서독화에 대한 환율은 4대1이었다) 동독의 멸망은 이와 같이 동독인이 빚더미 위에서 분에 넘치는 생활을 하면서(ueber die Verhaeltnisse leben) 가속화되었다.
게다가 동독이 외부에 발표한 공식통계자료는 전혀 신빙성이 없는 조작된 숫자에 불과했다. 한 예로 1988년에는 아파트 300만호 완공을 계기로 이 사실을 대대적인 선전 목적에 이용했는데, 실제 건설된 숫자는 200만호에도 미치지 않았다고 한다. 또 이중장부는 기업내부에서 거리낌 없이 행해졌다. 심지어는 국가경제계획 첫 단계부터 이중장부와 이중계획이 도입되었다.
동독 경제의 붕괴는 이미 통일 수년 전부터 피할 수 없는 기정사실로 인정되었는데 여기에는 1980년 국가가 무리하게 계획한 원유장사가 실패로 돌아가 15억 달러의 손해를 본 것도 크게 한 몫을 하였다. 사태가 심각해지면서 87년에는 허위 작성된 대외무역수치까지 발표하기에 이르렀으나 이미 대세는 기울어진 뒤였다.
1989년에 동독은 자체 외화수입으로는 외채의 원금, 이자 상환과 생필품 수입 등 꼭 필요한 총 외자 수요액의 35%밖에는 메워나갈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1990년 봄 한 동독 대외무역담당자는 동독이 모라토리움을 선포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동독을 이탈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물론 동독은 이 지불불능상태를 면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고 팔 수 있는 물건이라면 무엇이든지 팔아 넘겼다. 이 결과 내수용 소비품은 품귀현상이 일고 시민들이 보유하고 있는 현금은 쓸 데가 없어 남아돌아가는 기이한 역조현상을 나타냈다. 이러한 상황은 공산국가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도시의 상점 앞에 장사진을 이루고 있으면 지나던 사람도 상품이 무엇인지는 알아볼 생각도 않고 우선 줄에 끼어 선다. 내가 소유하는 상품은 현금보다 더 귀중하고 여기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는 가치체제가 형성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독에 친인척을 둔 서독인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선물보따리를 보냈는데 인기품목은 커피, 양말에서 시작하여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일용품이었다.
통독 직전에는 동독총리의 직접적인 개입으로 4백만 개의 여성 팬티를 수입하여 비상 국면을 넘긴 적도 있었다. 이와 같이 만성적인 상품 궁핍현상이 지속되었으나 서독에 친척을 둔 사람이나 정부, 당의 고위직에 있는 사람과 인맥(Beziehung)이 닿으면 많은 혜택을 얻는 사회주의 특권층도 형성되었다. 반면 개인이 자기능력에 따라 특권층으로 올라가는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동독 경제의 폐허화로 인해 서독 정부는 장벽이 무너진 1990년에는 서둘러 경제, 화폐통합을 택하는 이외에 다른 가능성(Alternativ)은 전혀 없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흥미 있는 사실은 장벽이 무너질 당시 서독 정부나 연방은행은 부도직전에 처해있는 동독 경제의 심각성을 전혀 예기치 못했고, 정확한 평가를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사실을 놓고 동독 정부의 통계발표를 통한 조작과 허구적인 미화작업 (Schoenfaerberei)이 성공한 것이라고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통일 전 서독 내 각 연구기관은 동독 경제 실태에 관한 조사 결과를 외부에 발표해 왔고 또 이들이 정치권에 대한 자문을 소홀히 한 것도 아니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어떤 이유로 동독 경제에 대한 그릇된 판단이 가능했는가 하는 의문은 아직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이것이 서독 정치권의 무능과 태만을 드러낸 것이라고 보아도 크게 반박의 여지가 없을 듯하다.
이제는 멸망한 동독의 정치행태와 경제를 한 묶음으로 보면서, 현재 한국이 당면하게 된 경제위기 과정과 동독 경제의 실상에서 많은 유사점이 발견된다는 점은 우리에게는 아이러니컬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사실이다.
외채에 의존하면서 높은 생활수준을 유지해온 사실, 권력층과 경제계가 일체를 이룬 국가주도 경제개발정책, 당장 눈앞에 나타나는 위신과 체면을 위해서 이중장부와 불투명한 자료를 만들어낸 속임수 등 경제를 악화시킨 주요 인자들이 두 나라에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투명성이 결여된 사회에서 있을 수 있는 눈가림식 정책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더 큰 재앙을 몰고 오게 된 것이다. 마치 정치 권력층과 경제가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는 권위적인 체제가 처하게 될 숙명적인 한계점을 엿볼 수 있는 듯하다. [유럽리포트*2002]
3. 동서독간의 비밀 “인신매매” 사업
동서독을 갈라놓은 장벽이 세워진 이후 양 진영 간에 벌어진 해프닝 가운데 인신매매는 아직도 흥미로운 사건으로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간 이 내용이 단편적으로 알려지긴 했지만 워낙 비밀리에 이루어진‘007 작전’이어서 제한이 있었다. 이번에 포츠담 대학에서 새로이 조사결과를 공개했다.
이 사건은 1963년부터 1989년 공산권 멸망 직전까지 서독정부가 동독 감옥에 투옥되었던 정치범 3만 3천명을 자유의 몸으로 석방시켜준 사건이다. 서독정부는 이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렀기 때문에 Freikauf (자유구매)라고 말한다. 동독 정부가 받은 대가는 30억 마르크 이상의 거액이다. 서독은 이와는 별도로 이산가족이 합치도록 도와준 것이 21만 5천 건이었다. 전체적으로 34억 마르크 이상을 동독 측에 지불했다. 대부분 현금을 피하고 현물로 교환했다.
그런데 공산권에서는 이념적으로‘정치범’이란 범죄는 존재할 수 없었다. 자기들의 사회는 완벽한 역사적 진실이 실현된 사회주의라는 허망한 상념에 빠진 망상이었다. 그러므로 과거 소련에서는 정치범을 정신병동으로 입원시켜 서방측의 맹렬한 비난을 받기도 했었다.
냉전 시 독일에서 ‘정치범’은 광의로 해석되어 망명시도, 망명지원, 반국가적 행위 혹은 정치권에 대한 모독 등이 죄목에 속했다. 서독 측 관점에서 볼 때는 이는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 등 기본권을 요구한 데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서독정부는 이들 정치적인 테러 판결에 의해 옥중에서 고통을 받는 동독인에 대한 인도적인 지원을 당연한 의무로 간주하여 왔다.
처음으로 동독 내 정치수감자를 처분하겠다는 발상은 60년대 초 베를린장벽을 세우기 전부터 거론되었다. 이때 동독수상 울브리히트와 고르바초프가 이 문제를 논의했으나 동독이 이를 거부했다. ‘우리가 할 일은 이들을 확신시키는 것’이라는 환상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동독의 경제사정이 차츰 악화되기 시작하면서 서독에 차관신청을 할 정도에 이르자 이념교육보다는 경제적 유용성을 앞세우게 된 것이다.
1961년 베를린장벽이 세워지자 당시 서독의 대 동독정책을 실패로 간주하게 되었다. 따라서 동독 정부와의 직접 협상을 거부해 오는 정책이 수정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해졌다. 이어 동독에 차관 가능성을 전달했으며 재정지출을 감수하면서라도 동독 내 정치범을 구제해야겠다는 인식이 강해졌다.
동서독 양측 변호사를 통해 정치범 석방이 처음으로 성사된 것은 1963년, 8명의 수감자를 20만 5천 마르크(10만 2,500 유로)에 넘겨받은 것이다. 그 이후의 Freikauf에는 종교계가 직접 관여하였으며 80명을 넘겨받을 수 있었다. 이어 884명이 서독으로 이주했고 이 가격 4만 마르크는 물품으로 대가를 치렀다. 동독인들에게 실생활의 어려움을 감소해 주며 동독정부가 직접 현금을 인수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이 사업은 극비작전으로 이루어졌다. 내용을 알고 있는 인물은 1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동독은 만약 이 사건이 국제사회에 알려짐으로써 받게 될 명예손상을 대단히 두려워하고 있었다.
60년대 중반까지 이 사업의 주도권은 교회에 있었다. 서독 정부 내부에서는 이 사업이 확장됨에 따라 서독측이 인도주의라는 미명하에 동독 측의 압력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우려감으로 인해 사업을 축소하려는 경향이 있었는데 정부를 잘 설득시킨 것은 종교계로서 이들의 노력으로 Freikauf가 유지되어 갔다.
70년대 초까지는 1년에 1천명 정도가 서독으로 이주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형량이 5년 이하, 즉 비교적 형량이 낮은 정치범도 포함되었다. Freikauf라지만 초기에는 감옥에서 해방되어도 서독이주가 불가능한 경우가 40%에 달했다. 동독에 가족이 거주하고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수감자들은 Freikauf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으므로 동독안전성으로부터 석방 후 동서독 어느 쪽을 택하겠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이들은 자기의 사상동향을 조사하려는 수법으로 의심하여 동독에 머물겠다고 답을 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한 수감자의 비극이 알려졌는데 그는 석방 후 이 사실을 알고 장벽을 넘어 탈출하려다 총에 맞아 사망한 것이다.
동독으로 석방된 인원이 늘면서 동독 정부는 서독정부에 대규모 사기행각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실제로 누구를 석방했는지 또 언제 석방했는지 등 기본적 집계자료를 신빙할 수 없었다. 가공인물을 석방자로 계산하기도하고 이미 석방된 자를 더하기도 했다. 일반 잡범을 정치범으로 합치기도 했다.
그러면서 70년대 중반부터는 Freikauf는 동서독 간에 확고한 ‘사업’으로 유지되어 나갔다. 그러나 서독정부 내부적으로 의견 차이는 계속되었다. 결국 ‘인신매매’ 자체에 대해 국가의 체면을 손상시킨다는 시각도 있었으나 인도주의적인 입장에서 중단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인신매매’에서 중대문제가 된 점은 이 ‘정치범’의 가격 즉 몸값에 대해 쌍방이 합의를 보는 문제였다. 초기에는 가격표를 작성했다. 이들을 몇 개의 그룹으로 분류하여 값이 정해졌다. 동독 정부가 가장 고가로 부르는 그룹은 형량이 높거나 의사, 엔지니어 직업인들이었다. 이들은 1인 당 기본 4만 마르크의 두 배인 8만 마르크로 책정되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16만~20만 마르크까지 값이 높아지기도 했다. 서독 첩보원이나 비밀조직원 등이 여기에 해당했다. 기타의 경우는 징역의 잔여연도에 따르기도 했다. 형량을 다 치러 곧 서방으로 넘겨줄 수 있으면 최저가격인 1만 1천 마르크로 흥정되었고 일반 범죄자는 대가 없이 넘겨받기도 했다. 이와 같이 개개인의 몸값을 놓고 쌍방이 합의점에 달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으며 경우에 따라 수 년이 지연되는 경우도 잦았다.
가격흥정에 지친 탓인지 70년대 중반부터는 몸값을 3개 부류로 분류하여 균일화함으로써 흥정도 쉬워졌고 1년에 1천 명 정도가 석방되는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동독 정권이 얻은 이익이란 인간매매의 수입이 국가 재정에 큰 보탬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서방 진영으로부터의 재정차관으로 부채 부담이 커짐에 따라 동독 정부에게는 이 사업이 중요한 재원이 되었다.
1984년과 1985년에는 1년에 2천명으로 증가했는데 이에 따라 동독의 수입은 배로 증가했지만 상거래 제도상에 모순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동독 입장에서 볼 때 역시 원래 인신매매의 의미와 목적, 즉 시민들의 탈 동독을 감소시키려는 의도와는 거리가 멀어져갔음을 깨달은 것이다.
동독 내에서는 ‘인신매매’가 차츰 소문이 나면서 일부 시민들은 단순히 서독으로 이주할 목적으로 범법행위를 저지르는 정도가 되었다. 즉‘서독이주(Ausreise)’를 정식으로 신청하면 2년이 걸리지만 범죄를 저지르면 1년 징역을 받고 다시 6개월 후에는 서독에 갈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었다. 또 동독 정부는 돈을 중요시하여 잠시 복역 후 서독으로 팔아 넘기기도 했다. 인신매매로 인한 국가의 권위손실이 명백해진 것이다.
동독 내부에서는 이 ‘물물교환’ 의 범위를 최소화하자는 소리도 있었으나 이때는 이미 동독의 경제사정 악화로 이 사업을 중단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는 ‘우리에게 아무 쓸모없는 범죄꾼들이 왜 우리의 빵을 축내야 하나? 나는 국가를 위해 경제위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열변을 토한 적도 있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슈타지는 서독 이주 희망자를 팔아넘기기 위해 구금한 것이 아닐까? 이런 추측을 입증할만한 단서도 있다. 슈타지 내부 문서에는 ‘구금자를 서독으로 석방해야 할 필요성은 우리 국가가 필요로 하는 것이 돈이기 때문’ 이라고 솔직히 피력했다는 문서가 나왔다.
서독으로 이주해온 동독인은 정치적으로 박해를 받아온 것은 물론 서독에서는 바닥에서 다시 시작한 인물들이다. 이들은 아직도 당시의 쇼크 상태에서 회복되지 못한 경우도 있다.
동독은 이 사업에서 재정적인 이득을 보아온 것이 사실이지만 동독인 자신의 기본 이념에 거역하는 행위를 자행한 것이었다. 또 서독 정부는 동독 정권과 협상을 지속해오면서 분단으로 인해 고통을 겪는 국민에게 도움을 준다는 정치 목표에 접근한 것이다. [유럽리포트*2004]
4. 메르켈 수상의 세 살 버릇
동독출신인 메르켈 수상(동독‘물리 아카데미’근무)은 통일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옛 버릇이 남아있다고 고백했다. 특히 물건을 살 때 필요한 것인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즉흥적으로 눈에 띄면 사는 버릇이 있다는 것이다. 동독에서는 모든 상품이 귀했으므로 눈에 띄는 물건은 사두어야 했다. 언제 다시 이 물건이 나올지 모르니까! 내가 불필요하면 물물교환이 가능하다.
또 아직도 동독시절의 식품을 사 먹는 것도 있다고 한다.
식품점은 동독에서 Kaufhalle (shopping hall)라고 했는데 서독식으로 Supermarket이라고 바꾸는데 15년이 걸렸다고도 한다.
[유럽리포트*2006]
5. 인간의 욕망
인간의 욕망과 사회부패는 자본주의의 특징인가? 독일에서 부패문제가 대두되면 대명사처럼 떠오르는 기업이 지멘스가 되었다. 기업 회계장부를 이중으로 하여 억대 비자금을 조성하여 이란, 아르헨티나 등에서 대형사업 입찰 시 수뢰한 혐의이다. 독일 세무서에서는‘유용한 지출’이란 명목으로 정식 지출로 인정되었었다. 이 사건이 자본주의의 대표적인 비리 사건으로 꼽힌다. 사회주의 하에서는 외양적으로 나타나듯이 부패가 없었을까? 내부를 보면 형태가 다를 뿐 비리의 온상이 될 만한 소지가 많았기 때문에 이런 의문이 가능해진다. 부정이나 직권남용 등이 금기사항이었으나 실제로는 널리 번져 있었다는 것이 전문가의 견해다. 국가기관에서 경제를 통제하는 상황에서 또 모든 상품이나 물자, 서비스가 턱 없이 부족함을 겪어야 하는 상황에서 유혹이 너무 컸으며 필요악이기도 했다. 사회주의 국가들은 자본주의 하에서의 생활관습 즉 이기주의, 사유자산에 대한 욕망과 도덕적 해이 등을 극복하기로 결의했다. 동독에서는 1950년대 초 국가적인 의결사항이었다. 동독정부는 간혹 비리관련자에 대해 전시용 재판(Schauprozess)을 한 적도 있었다. 1963년에는 경직된 체제로 인해 생산성이 극히 저조함을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경제체제를 고안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상품을 빼돌리는 행위나 물물교환이 시민들 간에 왕성해졌다. 그 후 호네커 시대에도 경제계획의 고삐를 조였지만 정부는 증가하는 부패현상을 국가사회주의에 기인한 체제의 약점이 아니라 경제안정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라는 억지 해석을 하게 되었다. 즉 기업이나 심지어 개인조차 암시장에서 물품조달을 하면서 이로 인해 경제흐름이 개선된다는 식이었다. 70년대 말에는 이미 사회주의 국영기업체 CEO들 간에는 시계, 술, 커피, 크리스탈 잔, 식사도구, 가죽제품, 진공청소기, TV, 면도기 등을 서로 교환한다는 정보가 수상에게까지 전해지면서 그는 매우 서글퍼했다는 것이다.
이런 물품들은 회사 경비에서 ‘사무용품’이란 명세서로 처리되었다. 일상적인 용품에 지나지 않았지만 동독에서는 특수 사치품에 속하는 물품으로서 특수층만이 누릴 수 있는 사치에 속했다. 예로 동 베를린의 정치위원들의 거주지에는 서방세계 물품 구매 상점이 있었는데 여기에 국가가 지원한 금액이 1년에 800만 마르크로 1인당 6만 4천 마르크라는 계산이 나왔다. 이 액수는 평균 동독임금의 4년 수입에 해당하는 액수이다. 경제전문가들은 이를 국가재산에 대해 부당하게 취득한 한 개인의 이득으로 본다.
그러나 권력층이 아닌 일반 서민들에게도 작은 규모의 부패는 번져가고 있었다. 시중에서 구할 수 없는 상품을 구하기 위해서는 내 직장에서 물물교환할 수 있는 물건을 들고 나와야 했다. 서비스의 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현금을 붙여 주는 것이 예사였으며 직장에서는 상사에게 현금을 주면 외출이 허락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 후 90년대 서독에 부패가 일시적으로 크게 증가한 것도 동독의 직간접적인 영향이었다고 보는 해석이 있다. 이와 같이 부패는 비개방적인 사회, 국가가 자원을 지배하고 대규모 공사의 결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나라에서 커져간다. 지멘스의 경우처럼 대규모 공사, 인프라구조 형성, 무기 구입 등이 부패의 요소가 되는 예이다. 동독의 경우 역시 국가간섭이 많은 나라에서 부패가 싹트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투명성기구 (Transparency International)에서 부패국가로 보는 나라는 시장경제가 작용을 못하는 아프리카, 남미, 일부 아시아국가 등이다. 경제학자 가운데는 국가의 간섭이나 관료주의가 심한 나라일수록 부패 가능성을 직접 관련시키기도 한다. 지금의 중국의 경우는 또 다른 사례가 되고 있다. 명목상 공산주의국가로 되어 있는 중국은 사유재산을 허용한 후 경제가 급속 성장하고 있다. 모든 분야에 대한 국가의 영향력 역시 절대적이다. 부패가 퍼질 수 있는 좋은 조건이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게다가 열정적인 공산주의자였던 중국인의 물욕은 자본주의자들의 물욕과 차이를 찾아 볼 수 없다고 한다.
[유럽리포트*2005]
6.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딜레마
통일 20년을 맞아 과거 동독 경제정책에 대한 관심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동독에 거주하던 대다수 시민들에게 동독은 어두운 감옥으로 간주되었으며, 서독의 일부 지식인들에게는 동독이 ‘더 좋은 독일 땅’으로 간주되어 왔었다. 부정적인 면이 있기는 했으나 사회주의국가라는 사실만으로 많은 결함을 덮어 주었다. 동독은 자본의 세력을 극복했고 누구에게나 직장과 아파트를 주었으며 시민들은 대부분 같은 혜택을 국가로부터 받았다. 19세기, 20세기 사회주의는 많은 시민들에게 매력적인 사회제도라고 여겨졌다. 자본주의란 냉정하고 노동자를 착취하며 사회혼란만 가져온다고 인식되었다. 게다가 자본주의 경제에 거의 규칙적으로 닥치는 크고 작은 불황은 마르크스 경제이론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듯했다. 반대로 사회주의는 국가계획에 의해 안전하고 평화스럽고 물욕을 극복한 미래를 약속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돌이켜 보건대 이는 이론에 불과한 이상향에 지나지 않았다. 현실은 달랐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이상향을 그리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독일 알렌스바흐(Allensbach) 연구소 설문조사에 따르면 동독시민의 반 수 이상은‘사회주의는 아이디어가 좋았다. 단지 실제 운영이 나빴다’는 데 동의했고 서독에서는 30%가 이에 동의했다. 그렇다면 사회주의의 실패를 전적으로 무능한 지도자의 탓으로 돌릴 수 있는 것일까? 정답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아무리 능력 있는 인물도 계획경제 하에서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 학자는 오스트리아의 미제스 교수였다. 당시 시장경제주의자와 사회주의 경제학자 간에 열띤 공방을 벌이게 된 토론에서 그는 사회주의 하에서는 합리적인 기업회계가 불가능한 것이 사회주의 체제결함의 관건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초기 마르크스 이론가들은 계획경제 운영에서 실제 부닥칠 구체적인 문제점에 대한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했다. 문제의 복잡성을 완전히 과소평가한 것이다. 심지어 레닌은 국가경제체제를 우체국을 운영하는 수준으로 여겼다.『국가와 혁명』 이라는 저서에서 그는 모든 시민은 국가 운영체제에서 노동자나 사무원으로 종사한다며 또 이들의 업무에 대해 용이하게 감독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레닌은 회계와 감독의 문제점은 자본주의자들이 최대한으로 간소화해 놓았다고 보았다. 여기서 그의 유명한 ‘신뢰는 좋다. 그러나 감독을 받는 것이 더욱 좋다. (Vertrauen ist gut, aber Kontrolle ist besser!)’는 어구도 나왔다. 독일에서는 속담처럼 일상화된 말이다.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불신이 깔려있는 구절이기도 하다. 레닌은 누구나 감독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회계는 4가지 기본 계산법에만 능하면 충분하다고 과소평가했다. 이때 미제교수는 비엔나에서 소련경제의 혼란상을 보고 있었다. 그의 공격 초점은 사유재산과 이윤의 철폐로 노동인구에 동력 부여가 사라진다는 진부한 주장이 아니라, 사유재산과 시장이 없으면 현실적인 시장가격이 형성되지 않으며 이로 인해 여러 종류의 상품부족 현상이 일게 된다는 지론을 편 것이다. 국영화 된 기업에서는 자원의 합리적인 투입을 할 수 있기에는 방향감각을 잃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했다. 따라서 경제계획자는 마치 어둠 속을 헤매는 현상이 일게 되며 이것이 사회주의의 근본문제라고 지적했다. 그 후 좌파 이론가들 간에는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일부 학자들은 새로운 모델로 ‘음지물가’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이 계산을 시도하기도 했다. 또 시장사회주의 (Marktsozialismus)를 도입하여 일선 기업을 이용한 상품수요를 정확히 파악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이에 대해 오스트리아 학자는 꿈 같은 이야기라며 비웃고 있었다. 동독경제의 시련의 연속을 본다. 초기에는 계획경제에서도 강한 중앙집권적인 형태를 도입했다. 그러나 생산성은 서독에 비해 3분의 1이나 뒤지는 결과를 낳았다. 70년 대 초 이미 경제위기는 심각한 수준에 달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수상 울브리히트는 소련에서 개발된 자유주의적인 발상을 도입하려 했다. 이 제도에서는 국가는 주요품목에 대해서만 중앙집권적 계획이 이루어지고 하부층에서는 국가가 요구하는 생산량이 아니라 이윤 (Gewinn)이 실적의 척도가 된다는 것이었다. 즉 시장경제의 기반이 결여된 상황에서 시장경제의 매카니즘을 도입하려 한 것이다. 집단소유제도나 국가의 가격책정제도에는 변화가 없었다. 따라서 이러한 시도는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이 일었다. 실제로 경제는 오히려 붕괴단계에 이르렀으며 생산과정에 심각한 차질이 생겼다. 이에 1970년 울브리히트 수상은 모스크바에서 한 연설에서 어느 정도 경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가능한 한 자본주의국가에서 부채를 지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공표했으나 이로 인해 그는 그 직후 권력에서 물러나야 했다. 후계자 호네커는 개혁의 방향을 다시 거꾸로 돌려 나갔다. 그러면서 국민에게는 소비와 사회안전망을 확장해 나갔다. 그 결과 국가재정은 더욱 좀먹어 들어갔으며, 70년 대 오일쇼크를 겪은 후 80년대 초 국제금리가 오르자 부채는 감당하지 못할 정도에 이르렀다. 당시 수십억에 달하는 서독정부의 보증이 아니었다면 국가부도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사회주의경제는 최종적으로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이 비극의 장면은 거의 10년이나 이어졌으며 정치적인 변화가 사회주의라는 실험의 막을 내리는 촉진제 역할을 했다. [유럽리포트*2000]
7. 통일 20년
통일기념으로 서독 대도시 15세 학생들이 단체로 동독견학을 갔다. 마치 외국에 가는 듯한 오해가 있지 않을까 조심했지만 생각보다 자유스러운 여행이었다고 했다.
동독인들은 케이크를 많이 먹는다. ‘(서독에는 요즘 줄어든 관습이다.) ‘집들이 깨끗하고 예쁘고 아담하다.’(통일 후 동독도시는 새로 건축하듯 단장을 했다.) ‘전차가 많아 흥미로웠다’, ‘사람들이 더 친절하다.’, ‘거리에서 마주치면 서서 지나는 자리를 양보한다.’(서독에는 점차 사라져가는 미덕) ‘인사할 때 악수를 하고 포옹하는 인사가 잦다.’(서독에서 악수는 글로벌 관례에 따라 차츰 줄어든다.) ‘생활이 더 전통적이다. 일례로 식사 시에는 가족이 함께 모여 식사한다.’ 등의 소감이 있었다.
동독박물관 방문도 인상적이었다. 동독 정권하에서 핵무기 반대 유인물을 돌려 감옥살이를 한 부인의 설명도 있었다. 고문방법은 빈 병 위에 앉기, 취침방해, 겨울에 밖에서 찬물에 쭈그리고 앉기, 앉아서 찬물로 샤워하기 등이었다. 통일 직전 교회를 중심으로 매주 있었던‘월요 데모 (Montagsdemonstration)’를 찍은 비디오도 인상적이었다.
이런 동독이 멸망한지 20년밖에 안되었다는 사실이 학생들은 믿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유럽리포트*2011]
8. 독일통일과정을 회고하는 바이겔 전 재무장관
독일 통일 당시의 서독 바이겔 재무장관이 당시를 회고하는 인터뷰를 가졌다. 그에게는 부채장관 (Schuldenminister)라는 별명이 붙었었다. 통일비용이 너무 방대했기 때문에 재무장관은 부채를 걸머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그는 당시 정치가들은 동독을 흡수하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는데 문제가 있었다고 피력했다.
사실상 현재도 통일비용을 정확히 산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지금까지 2조 유로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통일 당시 즉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는 통일비용을 70억 ~ 1000억 마르크 (30억 ~ 500억 유로)로 추산했었다.
‘우리는 동독경제의 실제상황에 대해 너무나 무지했다.’ 그는 한 마디로 ‘모든 것이 제멋대로 식의 사회주의였다.’고 회고했다. “회계장부를 제대로 작성한 기업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기업을 정리하거나 민영화하는 과정에서는 이것이 가장 중요한 자료인 것이다.”
통일과정에서 외부로 부터 가장 논란이 된 것은 동독 경제 청산작업을 맡은 신탁통치 기관 (Treuhandanstalt)이었다. 급작스럽게 설립된 이 기관의 CEO로 임명된 로베더는 불과 1 년 후 적군파 (Rote Armee Fraktion: 68운동에 뿌리를둔 테러단체)에 의해 뒤셀도르프 저택에서 암살되었다.
이 기관에는 하부조직의 경험있고 유능한 인물을 구할 수 없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애가 되었다. 불과 3, 4년 정도의 기간을 위해 유능한 인재가 자기 직장을 떠난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바이겔 장관도 이 점을 꼬집었다. 그는 동독 기업을 민영화하는데 쓸만한 인재가 없었으며 주요 요직을 맡은 인물들은‘수의사와 수학자와 종교인’뿐이었다고 하소연을 털어 놓았다. 즉 동물의 병 진단을 하듯 동독기업 진단을 내리고 경영 마인드가 없는 수학자들은 숫자만으로 계산했고 종교인들이 마지막 기업 장례식을 도맡았다는 이야기다.
민영화 작업은 빠른 속도로 이루어져야 했다. 동독기업의 생산성은 서독기업의 27%에 지나지 않았으며 동독상품 가운데 어느 정도 경쟁력이 있는 상품이라고는 광학제품, 일부 철강과 선박 분야뿐이었다. 제품생산을 해도 더 이상 시장이 없었으므로 시간이 흐를수록 국가부담은 증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국가는 속히 손을 떼야 하는 처지였다.
대부분의 동독기업들은 공장대지가격을 일부 받는 정도 아니면 1마르크라는 상징적인 가격으로 팔려나갔고 여기에 국가 보조금 지원이 따른 것이다. 기업운영을 계속한다는 조건이었으나 이들은 대부분 곧 폐업의 운명에 처해졌다.
이렇게 진행된 졸속 통일과정에서 부정비리 행위가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서독 측의 관리감독 아래 있는 동독보다도 더욱 극단적인 예가 동구 공산국가에서 나타났는데 이 과정을 겪으면서 벼락부자들을 양산해 낸 것이다. 러시아에서 중국에 이르기까지 예외가 없었다. 그리고 이 갑부들은 예외 없이 과거 정권과 밀착되어 있던 권력층에 속해 있던 인물들이었다.
국영기업체를 민영화하는 경우는 전 세계적으로 8천여 건이 이루어져 수없이 많았다고 할 수 있지만 국가권력의 공백상태에서 민영화를 진행한다는 것은 전례가 없는 과정이었다. [유럽리포트*2014]
9. 동독은 불법국가인가?
모든 독재국가는 불법국가(Unrechtsstaat)인가? 독재국가였던 동독을‘법치국가 (Rechtsstaat)’로 인정할 수 없다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법치’ 를 부정하여 ‘법치를 하지 않은 국가’에 대해서 이를 곧 ‘불법국가’ 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이 문제를 놓고 독일의 각 정당인들 특히 좌파정당(Die Linke) 내에서 논란이 빚어지고 있다. 직접 계기가 된 것은 동독지역 튀링겐 주 정부가 앞으로 좌파, 사민당, 녹색당의 연정으로 구성될 것으로 예측되면서 이 세 정당의 예비회담에서 동독의 불법국가 여부가 쟁점으로 오른 것이다. 지난10월 3일에는 독일통일기념 연설에서 전 국회의장 티어세는 ‘동독에는 자유선거가 없었고 야당이 없었고, 사법기관의 독립성이 보장되지 않았으며, 사상의 자유와 여행의 자유가 없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할 때 불법국가가 아니고 무엇인가?’ 라는 의미 있는 해석을 가했다. 티어세는 과거 동독 학술 아카데미 문화부에서 근무하였으나 정치적으로는 엄격하게 ‘무관심‘을 지켜온 가톨릭 신자다. 역시 동독출신인 현 독일 대통령 요아힘 가웈(Gauck)이나 메르켈 수상 역시 최근 동독은 ‘불법국가’라는 정의를 내렸다. 또 좌파당에서도 ‘불법국가‘라는 정의를 통과시킨 상황이다. 그러나 일부 좌파정당 정치인들 가운데는 ‘법치국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불법국가‘라고 칭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는 정치인들도 소수 있다. 대표적인 인물은 의회의 좌파원내대표 귀지 (Gysi)이다. 그는 동독에서 변호사로 활약하면서 반체제인사의 변론도 도맡았었지만 통일 후에는 그가 동독 비밀경찰 요원으로 활동했었다는 비난을 받고 법정소송이 자주 있었으나 최종적인 확고한 증거물은 나타나지 않았으며 달변가로 인정받는 그의 정치생명은 계속 이어져 왔다. 그는 ‘법치국가의 부정형’ 과 ‘불법국가’ 를 동일시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대표적 정치인이다. 불법국가라는 단어는 법률적이거나 혹은 정치학적인 전문용어가 아니라 냉전시대에 사용하던 개념으로 보는 극단적인 견해를 갖는 인물도 있지만 어쨌든 경멸적인 의미를 갖는 단어임에는 틀림이 없다. [유럽리포트*2014]
10. 통일과 통일비용에 무관심했던 독일
서독정부는 동독의 경제력에 무관심
통일 전 냉전 시 서독에서는 ‘통일’이란 단어는 자주 거론되는 개념이 아니었다. 통일의 가능성이란 전적으로 전승국의 영향력에 달려 있으므로 국제 정치적인 변화과정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독일에서 ‘통일’을 논한다는 것은 서독에 의한 ‘흡수통일’로 이해되었으므로 동독 정권은 ‘통일’에 대해 극심한 거부감을 가져왔다. 통일론자는 2차 대전의 패배에 대한 보복주의자 (Revanchist)라는 선전공세에 막 부닥치게 되었다. 그러므로 ‘통일’(Wiedervereinigung)이란 단어 사용은 매우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또한 ‘통일’을 사용할 때는 단어의 어원에서 유래되어 풍기는 어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이 단어의 어원은 ‘하나’(ein)이며 이 단어를 동사화한것이 ‘통일’이다. 따라서 ‘통일’은 동적이며 능동적인 단어이다. 그런 이유에서 반드시 ‘통일’을 논할 때는 오히려 ‘Einheit’ 가 사용되었다. 이는 순간의 정적 상태를 묘사하는 개념으로서, ‘하나’라는 단어를 ‘하나임, 통일’로 명사화한 정적인 단어이다.
그만큼 ‘통일’은 무질서하게 사용되는 개념이 아니었다. 통일은 흡수통일 즉 보복적인 무력을 전제된 것이다. 그만큼 통일에 대한 담론에 현실성을 부여하지 않았다.
따라서 서독 정계를 볼 때 보수계에서 일부 미미하게 통일을 논했을 뿐, 좌파나 동독정권자는 통일을 거부해 왔으며 통일이 담론의 대상이 되지도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통일에 필연적으로 따르게될 자기의 권력상실에 대해 심한 공포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사활을 건 정치목표는 동독정권의 외교적인 인정에 두었다.
서독 정부에는 ‘통일부’라는 부서도 없었다. ‘독일국내문제 부’(Ministerium fuer Innerdeutsche Angelegenheiten)가 있을 뿐이었다. 서독정부에는 통일이 일차적인 목표가 아니었다. 통일보다 더욱 절실하며 시급한 과제는 장벽으로 동서독에 갈라진 부모형제간의 상호방문이나 개인적인 생필품지원 같은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의 지원이었다.
따라서 서독정부는 통일에 대한 대비가 없었다. 통일을 전제로 하는 일체의 활동은 추진되지 않았다. 오히려 말로만 내세우는 ‘통일’ 보다는 장기적인 안목에서 자유세계의 진면모를 부각시키는데 주력했다. 따라서 요즘 한국에서 논의되고 있는 ‘통일비용’ 같은 사항은 정계는 물론 학계에서조차 전혀 연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통일비용에 대한 무관심은 차치하고라도 더욱 놀라운 것은 동독 경제현실에 대해 너무나 어두웠다는 사실이다. 동독경제가 낙후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었으며 동독을 다녀온 시민들이 사정을 전하곤 했다. 그러나 막상 통독 후 나타난 동독의 실상은 너무나 놀라웠다. 동독경제의 실상은 전혀 예상치 못할 정도로 몰락직전의 위급한 상황이었다. 단지 놀라운 것은 서독측에서는 자기 형제 국가인 동독의 경제사정에 대해 너무나 무지한 상태였다는 사실이다. 정계는 물론 학계 역시 마찬가지였다.
공산권은 원래 국내 모든 사항에 대해 대외 비밀로 했다. 그러나 1970년에 200만 명이 그리고 1973년에는 800 만 명이 동독을 왕래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서독측의 직무태만으로 볼 수 밖에 없다 하겠다.
동독의 경제력
동독경제의 비참한 정도가 국가의 존폐를 염려할만한 수준이었으나 대외적으로는 이러한 심각성을 은폐하는 데는 성공한 셈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서독의 정계나 학계에서 근본적인 관심이 있었다면 통일 후의 충격과 당혹감을 면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여기에도 한가지 문제점은 따른다. 만약에 연구기관이나 서독의 정부기관이 동독경제에 대한 자료수입을 시도했다면 ’일급비밀사항’에 저촉되어 동서독간에 정치문제로까지 커졌을 것이다.
동독의 경제력에 대해서는 80년대 한 때 세계 11번 순위라는 보도가 널리 알려졌었다. 소련은 물론 동유럽의 모든 공산권 중에서 역시 독일인의 능력을 과시하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런데 이 랭킹은 동독이 받아드린 대외차관을 반영하면서 이를 근거로 한 잘못된 통계였던 것으로 통일 후 알려졌다. 서방세계를 대표한다는 가장 권위 있는 전문기관의 통계마저 이 정도의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이 수치가 아닐 수 없다.
통일 후 외부에 드러난 동독경제의 후진성은 놀라웠다. 도로사정이 열악하다는 것은 알려져 있었다. 냉전시 동독정권은 서독인이 서베를린으로 가기 위해 동독지역을 통과해야 한다. 동독정부는 이 통행료를 톡톡히 받아냈다. 일부는 서독정부로 하여금 아우토반 건설비용을 부담하도록 했다.
일반 도로사정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악감을 금치 못하게 했다. 지방으로 가면 히틀러 시대 도로를 그대로 이용하고 있었고 국유화된 아파트 역시 수 십 년을 수리하지 못한 경우가 허다했다. 에너지는 만성적으로 부족했고 전화를 소유한다는 것은 주요 권력층 근무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에 속했다. 2기통 자동차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출생신고와 동시에 구매신청을 한다는 우스개 말이 돌았다.
투자를 하지 못한 생산공장들은 2차 대전 당시 수준의 상품을 생산했으며 화학공장 역시 히틀러 시대 기술과 시설을 사용했다. 공장에서 시설보수에 소요된 인원이 생산직 인원을 능가했다. 게다가 환경 오염해결에는 전혀 관심조차 없었다.
통일 직후부터 독일정부는 동독지역의 인프라 구성에 대대적인 투자를 시작했다. 거의 폐허화 된 나라를 송두리째 뒤집어엎어 놓은 셈이다. 지금의 동독은 전국이 깨끗하고 현대적으로 단장된 전원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정부의 투자결과 통일 직후 약 3, 4년간 독일은 전에 없는 호경기를 맞을 정도였다. 이는 통일에 의한 반짝 경기였다. 그러나 통일 8년 후인 98년에 이미 EU의 모든 나라가 독일경제를 앞지르기 시작했다. 프랑스, 이태리, 홀란드, 영국 등 수 십 년 간 독일에 많이 뒤지던 국가들이 독일을 추월했고, 이제는 이태리, 스페인, 폴투갈 과 구 공산권 국가만이 독일을 추격중이다. 그나마 이태리는 현재 독일과 거의 같은 수준에 달했으며 스페인은 4년 후면 독일을 추월할 것으로 추정된다는 놀라운 보도다.
이와 같이 유럽에서 경제대국이던 독일경제가 유럽에서 가장 낮은 경제성장을 면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 독일 내부에서는 사회 각 분야에 걸친 개혁의 부재에 돌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외국에서는 오히려 독일이 통일비용으로 인한 과중한 부담을 경제불황의 주 요인으로 보는 경향이다. 이 관계는 정계나 학계가 당연히 관심을 갖고 연구의 대상이 되어야 할 과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독일에서는 소위 ‘통일비용’에 대한 진지한 연구가 매우 빈약한 상태다.
그나마 지금까지 알려진 연구결과는 서로 상반된 주장을 펴고 있다. 현직 장관으로 동독지역 경제복구 책임을 맡고 있는 스톨페 장관에 의하면 연간 180억 유로가 연방정부에서 동독지역으로 투입되고 있으며, 지금까지의 전체 통일비용 규모는 2500억 유로라고 주장했다.
베를린 대학 교수 슈뢰더 박사는 이에 대해 강력히 반발했다. 정부측의 이러한 주장은 동독지역 시민의 일반적인 생각 즉 통일에 의해 서독에는 추가 비용부담이 거의 없었다는 통념을 부추기면서 실제 통일비용을 은폐하려는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이루어진 학계의 결과는 구동독 할레 (Halle)시에 있는 경제연구소에서 있었다. 여기서는 통일 부담금으로 1990년에서 2004년까지 1조 5천 억으로 발표됐다. 그러나 이 액수에서 동독이 지불하는 세금을 감해야 실제 지원액수가 나온다. 이 계산은 매우 복잡하다고 한다. 여기서 8-10%라는 세금을 제하면 실제 지원금은 1조 2천억 정도로 본다.
2003년도 동독지원금만을 보면 1000억 유로에 달한다. 문제는 이 액수와 위에 지적한 스톨페 장관의 발표 즉 180억 유로라는 액수와는 5배 이상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슈뢰더 박사는 정부의 발표는 실제와는 거리가 먼 동떨어진 산출방식에 근거를 두었다고 반박한다.
독일정부는 경제상황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결과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을 미화 (Schoenfaerberei)한데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제력의 상승으로 나타나는 수치는 동독지역의 실제 경제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근원은 서독의 지원금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또 정부는 동서독간 격차가 좁아지고 있다고 하지만 이 점 역시 할레연구소는 반박하고 있다.
경제인들은 동독경제가 속히 발전하기 위해서는 투자를 통한 지원이 따라야 했는데, 정부는 동독인들이 성급히 생활수준을 서독수준으로 향상되기를 바랬기 때문에 사회복지금으로 자본이 동독지역으로 전입된 것이 과오였다고 진단한다. 이로 인해 동독인들은 전형적인 ‘기초생활수급자’적 멘탈리티만 더욱 조장되었다고 슈뢰더 박사는 말한다. 통일시 동서독 화폐를 1:1로 교환해 주었듯이 사회보장제도 역시 1:1로 동독인에게 적용되었다. 결과적으로 취업자와 사회보장수급자간에 수입의 차이가 거의 없어졌다고 한다.
위에 지적했듯이 통일비용 산출은 정부와 학계간에 현격한 차이가 난다. 슈뢰더 박사는 정부가 고의적으로 통일부담액을 줄여서 발표하는 것은 동서독인간의 시기심 같은 위화감 조성을 우려한 때문이라고 직설적으로 말한다. 그는 또한 정부가 통일비용에 대한 신뢰성있는 진지한 연구를 지원하여 이를 정확히 파악해야 하는 일이 학자의 기본임무라고 강조한다. EU 보고서에 의하면 지난 10 여 년간 독일경제가 겪은 저성장의 원인은 직접간접으로 동독경제 지원의 목적으로 돈을 투입한 결과라고 분석했다. 즉 독일정부는 유럽 최하위권 경제 성장률과 통일비용은 직접적으로 연관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이 핵심을 도외시 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통일은 이루어졌어야 하고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실패작품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적어도 잠정적인 과도기를 두었어야 했다는 진단이다. 아직도 국민총생산의 5%가 동독지역으로 흘러 들어가는 지원자금이며, 동독은 자체 수요의 2/3만을 직접 생산하고 있다. 서독측은 경제에 따르게 될 문제점을 너무 가볍게 생각했다. 통일부담액을 알려고 하지도 않는 정부나 학
계가 신뢰감이 가는 경제정책을 제시할 수 있는 근거가 있는 것인지 의구심이 간다. [유럽리포트*2005]
지난 기사에서는 20여 년을 외채에 의존하며 서독과 사회복지정책의 우열경쟁을 벌였던 동독 경제의 심각성에 대해 보도했었다. 최근 동독정권이 무너지기 직전인 1989년 11월 초, 최고 정치기관인 당 중앙위원회 (Zentralkomitee)에서 벌어진 경제문제 토론상황이 알려졌다. 토론이라기보다 동독경제 실상을 있는 그대로 적나라하게 드러내 놓은 폭로의 현장이었다. 다음은 공산당 경제계획 및 재정문제 담당서기의 발표문이다.
“오늘 우리가 처해있는 어려움을 놓고 한마디로 그 원인을 지적해 본다면 1973년 이래 계속 분에 넘치는 과소비생활을 해왔다는 데 있다. 우리는 빚을 갚기 위해 또다시 새로 빚을 져야 했다. 여기서 빠져 나오려면 적어도 15년간 피땀 흘려 일해야 하며 생산보다 소비가 적어야 한다. 실생활을 통해 우리는 누구나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한계 내에서만 지출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만약 동독이 기업이었다면 벌써 부도 처분됐을 것이다. 국가지원으로 물가를 낮출 수는 있었지만 이를 위해 지불한 대가는 너무 컸다. 국가지원금은 불과 20년 사이에 8배 증가했다. 이로 인해 부채 증가 뿐 아니라 국가경제의 기반이 무너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재투자가 없어 생산업체는 낙후한 기술로 작업을 계속 했고 노동자들은 국가가 일방적으로 정한 과다한 책임계획량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즉 국가보조로 일정 기간 이윤을 낼 수 있었지만 이런 경제정책으로 동독이 부도사태에 달하리라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동독상품의 경쟁력에 대해 구체적인 숫자를 제시해 보면, 세계 시장가 5마르크 정도 되는 칩의 생산원가는 무려 5백여 마르크였다.”
동독경제 실상에 대한 이와 같은 구체적인 보고가 있자 중앙상임위원회원들은 놀라움과 분노, 절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 자리에서 문화계 출신의 한 중앙위원은 “우리는 모두 기만 당했다. 지금까지 계속 속아왔다. 오늘 회의내용은 나에게 너무 충격적이다. 나에게는 이제 모든 것이 파멸이다. 내 생이 파멸됐다. 어릴 적부터 당을 믿으라고 교육받은 나는 시키는 대로 행동했다. 나는 이 동무들을 믿었다.”고 했으며 당의 한 중앙위원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치위원들을‘범죄 집단’이라 부르고 이들을 모두 즉결 처분해야 한다고 요구하기까지 했다. 그는 목멘 소리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이 회의는 동독정권이 분해되기 직전에 일어난 일이다. 개개인의 꿈이 산산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이러한 특수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과격한 감정의 폭발이 있었고 독재국가에서 상상할 수도 없는 노골적인 국가권력에 대한 반발이 있었다.
만약 동독이 투명한 사회였다면 멸망직전에 다다를 정도의 비참한 경제사정에 대해 국민 모두가 정확히 알 권리가 보장되었을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국가 최고 권력기관인 중앙당위원까지도 국내정보에 이렇게 어두웠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일부 전문가들의 정부에 대한 경고가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체제유지에 불리한 내용은 국가기밀이라는 이유로 국민의 알 권리로부터 배제되었다. 최고 권력자는 의식적으로 문제의 심각성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국민에 대한 기만이며 권력자가 빠져있는 허황된 환상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모든 독재국가에서 벌어지는 전형적인 종말의 선언이기도 하다. 이것이 자기기만의 전형적인 표출이다.
그리고 한국의 IMF전후의 사정과 눈에 띄게 유사한 점이 있다는 것이 우리의 입맛을 쓰게 한다. 이것이 권위주의국가의 운명인 듯하다. [유럽리포트*1998]
2. 구 동독의 거품경제
동서 냉전시기, 동독의 위정자들은 ‘우리가 경제적으로는 서독에 뒤져 있지만 우리의 정치, 사회제도는 서독에 비해 두 단계 앞서 있다.’ 면서 사회주의 제도의 우월성을 국민에게 선전해 왔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와 경제의 양면경쟁에서 동구는 종국적으로 경제의 파탄으로 인해 이데올로기의 패배를 맛보게 되었다. 결국 대부분의 인간에게는 -무산대중에게도- 의식의 세계보다는 빵 문제가 더욱 중요한 일차적인 욕구의 대상이었음이 드러난 셈이다.
동독은 동구권 여러 나라와 달리 체제경쟁국인 서독과 가장 첨예한 이념적 대립상태에 놓여있는 전방국가로서 자연히 원칙노선에서 이탈하지 않는 엄격한 사회주의 체제를 실천해 나갔다.
끈질긴 사상교육으로 인간의 의식을 개혁하겠다는 집념과 인간의 무한한 물질에 대한 욕구와의 대립 속에서 서독의 경쟁 상대였으나 이제 패자로 드러난 동독의 실제 경제상황은 과연 어느 정도의 수준이었는가 하는 질문은 누구에게나 호기심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동독 경제력의 실상은 역사의 장이 바뀌고 여러 해가 지난 지금에 와서야 조금씩 그 베일이 벗겨지고 있다. 특히 동독정부는 국가경제자료를 최고 기밀사항으로 취급하여 왔다. 그러면서 그들이 발표한 자료는 서독인들에게는 신빙성이 미약한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이런 이유로 동독의 실제 경제력에 대한 정확한 파악에 큰 어려움을 겪어 온 것이 사실이다. 통독 후 여러 해가 지난 최근에 와서야 동독 경제에 대한 내부 진단이 일부 이루어지는 셈이다.
적어도 표면적으로 나타난 생활수준을 본다면 동독은 소련을 위시한 동구권내에서 월등하게 높은 생활수준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그 속사정은 달랐음이 지금 나타나고 있다.
동독 경제실태에 대해 지금 단계에서 확언할 수 있는 것은 동독 경제력이 서방측에서 가장 회의적이었던 전문가의 추정보다도 실제로 더 나빴다는 사실이다. 동독 집권층조차도 자신의 경제력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제 와서 작은 충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동독 국가경제의 심장부였던 경제기획위원회 책임자조차 당시 경제력 진단은 실제로 불가능했다고 실토하고 있다.
동독의 통계방법에는 수많은 부정확한 요소가 내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사회주의국가 영역 밖에서는 판매될 수 없거나 사회주의국가 내에서도 생산가 이하로밖에 판매될 수 없는 -질이 나쁘거나 수요가 없기 때문에- 상품조차도 생산통계에 잡혀 있었다는 것이다. 또 동독의 통계에는 계획적인 조작행위 (Manipulation)도 비일비재했다. 동독경제는 외부세계로부터 차단된 동구권 철의 장막 내에서만 유지될 수 있었고, 장벽이 무너짐과 동시에 경제도 동시에 붕괴된 결과를 초래했다.
동서독 간 경제력의 격차는 이미 1950년부터 시작되었다. 생산성에서 현격한차이가 생기기 시작했고 이 격차는 그 후 통일 시까지 점점 커져가기만 했다.
동독 경제가 처음부터 어려움을 겪게 된 직접적인 요인은 계획경제로 인해 경제가 전반적으로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던 상태에서 사회주의국가의 기본요건인 사회복지정책에 너무나 과다한 투자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데 있었다.
정부는 시민들에게 항시 관심과 비교의 대상이 되었던 서독의 높은 생활수준 향상에 어느 정도까지 보조를 맞춰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주의국가로서 당연히 서독보다 우월한 사회복지정책을 실현시켜야 한다는 강박감에 시달렸다. 사실 동독과 서독은 경쟁적으로 복지정책의 질을 높여가지 않을 수 없었다.
현재 여러 선진국이 고실업 상태에 돌입하면서 한편으로는 복지정책의 필요성과 다른 한편으로는 그 실현성의 한계점에 대해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다. 여기서 동독이 보여준 실계는 사회복지정책과 경제 효율성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좋은 본보기라고 전문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동독정부는 생산성 제고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국민의 생활수준을 낮출 엄두를 못 내고 외채를 얻어 무리한 투자를 강행했다. 즉 내 살을 베어 먹는 부채를 져서 미래를 대가로 치르며 연명한 셈이다 (lebte von der Substanz auf Pump und auf Kosten der Zukunft).
동독에 통계상 실업자가 없었다는 사실도 그 속을 들여다보면 허상에 불과했다. 예를 들면 동독의 대학행정만 보아도 교직원을 포함하여 40% 이상의 직원은 불필요한 인원이었다. 대단위 화학단지의 1만 2천명 고용인중 노후한 설비 보수공사에만 고용된 인원이 무려 4천명에 달했다고 한다.
1963년 당시 동독수상 울브리히트는 ‘서독 경제를 능가하자 (ueberholen)’ 는 구호를 내세웠다. 당시만 해도 동독의 생산성(Produktivitaet)은 서독에 비해 불과 25% 뒤져 있었으니 이런 구호가 나올 만도 했다. 그러나 20년 후 이 격차는 30%로 커졌고 89년 통독 시에는 40%에 달했다는 것이 동독 측의 공식적인 발표내용이었다.
70년대에 들어오면서 동독의 경제력은 과대평가되었다. 동독은 공산권내에서 가장 생활수준이 높은 것이 사실이었다. 70년대 세계은행은 동독을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인정하기까지 했다. 그 후에는 동독의 통계자료에 대한 신빙성에 의심을 품고 동독을 평가대상에서 아주 제외해 버렸다.
실제로 동독은 70년대 들어와 일시적이나마 일용품 공급이 좋아지고 이에 병행해서 사회복지정책도 강화해 나갔다. 그러나 이 성과는 자체 발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외국차관 덕분이었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이때부터 통일 시까지 동독 국민은 부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빚으로 연명해간 셈이다. 동독 정부는 서독에 비해 엄청나게 생활수준이 뒤지게 되자 민심을 무마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높은 생활수준을 허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외채는 1970년부터 1988년까지 무려 10배나 증가하여 1230억 동독마르크에 달했다. (서독화에 대한 환율은 4대1이었다) 동독의 멸망은 이와 같이 동독인이 빚더미 위에서 분에 넘치는 생활을 하면서(ueber die Verhaeltnisse leben) 가속화되었다.
게다가 동독이 외부에 발표한 공식통계자료는 전혀 신빙성이 없는 조작된 숫자에 불과했다. 한 예로 1988년에는 아파트 300만호 완공을 계기로 이 사실을 대대적인 선전 목적에 이용했는데, 실제 건설된 숫자는 200만호에도 미치지 않았다고 한다. 또 이중장부는 기업내부에서 거리낌 없이 행해졌다. 심지어는 국가경제계획 첫 단계부터 이중장부와 이중계획이 도입되었다.
동독 경제의 붕괴는 이미 통일 수년 전부터 피할 수 없는 기정사실로 인정되었는데 여기에는 1980년 국가가 무리하게 계획한 원유장사가 실패로 돌아가 15억 달러의 손해를 본 것도 크게 한 몫을 하였다. 사태가 심각해지면서 87년에는 허위 작성된 대외무역수치까지 발표하기에 이르렀으나 이미 대세는 기울어진 뒤였다.
1989년에 동독은 자체 외화수입으로는 외채의 원금, 이자 상환과 생필품 수입 등 꼭 필요한 총 외자 수요액의 35%밖에는 메워나갈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1990년 봄 한 동독 대외무역담당자는 동독이 모라토리움을 선포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동독을 이탈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물론 동독은 이 지불불능상태를 면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고 팔 수 있는 물건이라면 무엇이든지 팔아 넘겼다. 이 결과 내수용 소비품은 품귀현상이 일고 시민들이 보유하고 있는 현금은 쓸 데가 없어 남아돌아가는 기이한 역조현상을 나타냈다. 이러한 상황은 공산국가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도시의 상점 앞에 장사진을 이루고 있으면 지나던 사람도 상품이 무엇인지는 알아볼 생각도 않고 우선 줄에 끼어 선다. 내가 소유하는 상품은 현금보다 더 귀중하고 여기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는 가치체제가 형성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독에 친인척을 둔 서독인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선물보따리를 보냈는데 인기품목은 커피, 양말에서 시작하여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일용품이었다.
통독 직전에는 동독총리의 직접적인 개입으로 4백만 개의 여성 팬티를 수입하여 비상 국면을 넘긴 적도 있었다. 이와 같이 만성적인 상품 궁핍현상이 지속되었으나 서독에 친척을 둔 사람이나 정부, 당의 고위직에 있는 사람과 인맥(Beziehung)이 닿으면 많은 혜택을 얻는 사회주의 특권층도 형성되었다. 반면 개인이 자기능력에 따라 특권층으로 올라가는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동독 경제의 폐허화로 인해 서독 정부는 장벽이 무너진 1990년에는 서둘러 경제, 화폐통합을 택하는 이외에 다른 가능성(Alternativ)은 전혀 없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흥미 있는 사실은 장벽이 무너질 당시 서독 정부나 연방은행은 부도직전에 처해있는 동독 경제의 심각성을 전혀 예기치 못했고, 정확한 평가를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사실을 놓고 동독 정부의 통계발표를 통한 조작과 허구적인 미화작업 (Schoenfaerberei)이 성공한 것이라고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통일 전 서독 내 각 연구기관은 동독 경제 실태에 관한 조사 결과를 외부에 발표해 왔고 또 이들이 정치권에 대한 자문을 소홀히 한 것도 아니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어떤 이유로 동독 경제에 대한 그릇된 판단이 가능했는가 하는 의문은 아직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이것이 서독 정치권의 무능과 태만을 드러낸 것이라고 보아도 크게 반박의 여지가 없을 듯하다.
이제는 멸망한 동독의 정치행태와 경제를 한 묶음으로 보면서, 현재 한국이 당면하게 된 경제위기 과정과 동독 경제의 실상에서 많은 유사점이 발견된다는 점은 우리에게는 아이러니컬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사실이다.
외채에 의존하면서 높은 생활수준을 유지해온 사실, 권력층과 경제계가 일체를 이룬 국가주도 경제개발정책, 당장 눈앞에 나타나는 위신과 체면을 위해서 이중장부와 불투명한 자료를 만들어낸 속임수 등 경제를 악화시킨 주요 인자들이 두 나라에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투명성이 결여된 사회에서 있을 수 있는 눈가림식 정책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더 큰 재앙을 몰고 오게 된 것이다. 마치 정치 권력층과 경제가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는 권위적인 체제가 처하게 될 숙명적인 한계점을 엿볼 수 있는 듯하다. [유럽리포트*2002]
3. 동서독간의 비밀 “인신매매” 사업
동서독을 갈라놓은 장벽이 세워진 이후 양 진영 간에 벌어진 해프닝 가운데 인신매매는 아직도 흥미로운 사건으로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간 이 내용이 단편적으로 알려지긴 했지만 워낙 비밀리에 이루어진‘007 작전’이어서 제한이 있었다. 이번에 포츠담 대학에서 새로이 조사결과를 공개했다.
이 사건은 1963년부터 1989년 공산권 멸망 직전까지 서독정부가 동독 감옥에 투옥되었던 정치범 3만 3천명을 자유의 몸으로 석방시켜준 사건이다. 서독정부는 이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렀기 때문에 Freikauf (자유구매)라고 말한다. 동독 정부가 받은 대가는 30억 마르크 이상의 거액이다. 서독은 이와는 별도로 이산가족이 합치도록 도와준 것이 21만 5천 건이었다. 전체적으로 34억 마르크 이상을 동독 측에 지불했다. 대부분 현금을 피하고 현물로 교환했다.
그런데 공산권에서는 이념적으로‘정치범’이란 범죄는 존재할 수 없었다. 자기들의 사회는 완벽한 역사적 진실이 실현된 사회주의라는 허망한 상념에 빠진 망상이었다. 그러므로 과거 소련에서는 정치범을 정신병동으로 입원시켜 서방측의 맹렬한 비난을 받기도 했었다.
냉전 시 독일에서 ‘정치범’은 광의로 해석되어 망명시도, 망명지원, 반국가적 행위 혹은 정치권에 대한 모독 등이 죄목에 속했다. 서독 측 관점에서 볼 때는 이는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 등 기본권을 요구한 데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서독정부는 이들 정치적인 테러 판결에 의해 옥중에서 고통을 받는 동독인에 대한 인도적인 지원을 당연한 의무로 간주하여 왔다.
처음으로 동독 내 정치수감자를 처분하겠다는 발상은 60년대 초 베를린장벽을 세우기 전부터 거론되었다. 이때 동독수상 울브리히트와 고르바초프가 이 문제를 논의했으나 동독이 이를 거부했다. ‘우리가 할 일은 이들을 확신시키는 것’이라는 환상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동독의 경제사정이 차츰 악화되기 시작하면서 서독에 차관신청을 할 정도에 이르자 이념교육보다는 경제적 유용성을 앞세우게 된 것이다.
1961년 베를린장벽이 세워지자 당시 서독의 대 동독정책을 실패로 간주하게 되었다. 따라서 동독 정부와의 직접 협상을 거부해 오는 정책이 수정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해졌다. 이어 동독에 차관 가능성을 전달했으며 재정지출을 감수하면서라도 동독 내 정치범을 구제해야겠다는 인식이 강해졌다.
동서독 양측 변호사를 통해 정치범 석방이 처음으로 성사된 것은 1963년, 8명의 수감자를 20만 5천 마르크(10만 2,500 유로)에 넘겨받은 것이다. 그 이후의 Freikauf에는 종교계가 직접 관여하였으며 80명을 넘겨받을 수 있었다. 이어 884명이 서독으로 이주했고 이 가격 4만 마르크는 물품으로 대가를 치렀다. 동독인들에게 실생활의 어려움을 감소해 주며 동독정부가 직접 현금을 인수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이 사업은 극비작전으로 이루어졌다. 내용을 알고 있는 인물은 1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동독은 만약 이 사건이 국제사회에 알려짐으로써 받게 될 명예손상을 대단히 두려워하고 있었다.
60년대 중반까지 이 사업의 주도권은 교회에 있었다. 서독 정부 내부에서는 이 사업이 확장됨에 따라 서독측이 인도주의라는 미명하에 동독 측의 압력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우려감으로 인해 사업을 축소하려는 경향이 있었는데 정부를 잘 설득시킨 것은 종교계로서 이들의 노력으로 Freikauf가 유지되어 갔다.
70년대 초까지는 1년에 1천명 정도가 서독으로 이주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형량이 5년 이하, 즉 비교적 형량이 낮은 정치범도 포함되었다. Freikauf라지만 초기에는 감옥에서 해방되어도 서독이주가 불가능한 경우가 40%에 달했다. 동독에 가족이 거주하고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수감자들은 Freikauf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으므로 동독안전성으로부터 석방 후 동서독 어느 쪽을 택하겠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이들은 자기의 사상동향을 조사하려는 수법으로 의심하여 동독에 머물겠다고 답을 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한 수감자의 비극이 알려졌는데 그는 석방 후 이 사실을 알고 장벽을 넘어 탈출하려다 총에 맞아 사망한 것이다.
동독으로 석방된 인원이 늘면서 동독 정부는 서독정부에 대규모 사기행각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실제로 누구를 석방했는지 또 언제 석방했는지 등 기본적 집계자료를 신빙할 수 없었다. 가공인물을 석방자로 계산하기도하고 이미 석방된 자를 더하기도 했다. 일반 잡범을 정치범으로 합치기도 했다.
그러면서 70년대 중반부터는 Freikauf는 동서독 간에 확고한 ‘사업’으로 유지되어 나갔다. 그러나 서독정부 내부적으로 의견 차이는 계속되었다. 결국 ‘인신매매’ 자체에 대해 국가의 체면을 손상시킨다는 시각도 있었으나 인도주의적인 입장에서 중단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인신매매’에서 중대문제가 된 점은 이 ‘정치범’의 가격 즉 몸값에 대해 쌍방이 합의를 보는 문제였다. 초기에는 가격표를 작성했다. 이들을 몇 개의 그룹으로 분류하여 값이 정해졌다. 동독 정부가 가장 고가로 부르는 그룹은 형량이 높거나 의사, 엔지니어 직업인들이었다. 이들은 1인 당 기본 4만 마르크의 두 배인 8만 마르크로 책정되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16만~20만 마르크까지 값이 높아지기도 했다. 서독 첩보원이나 비밀조직원 등이 여기에 해당했다. 기타의 경우는 징역의 잔여연도에 따르기도 했다. 형량을 다 치러 곧 서방으로 넘겨줄 수 있으면 최저가격인 1만 1천 마르크로 흥정되었고 일반 범죄자는 대가 없이 넘겨받기도 했다. 이와 같이 개개인의 몸값을 놓고 쌍방이 합의점에 달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으며 경우에 따라 수 년이 지연되는 경우도 잦았다.
가격흥정에 지친 탓인지 70년대 중반부터는 몸값을 3개 부류로 분류하여 균일화함으로써 흥정도 쉬워졌고 1년에 1천 명 정도가 석방되는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동독 정권이 얻은 이익이란 인간매매의 수입이 국가 재정에 큰 보탬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서방 진영으로부터의 재정차관으로 부채 부담이 커짐에 따라 동독 정부에게는 이 사업이 중요한 재원이 되었다.
1984년과 1985년에는 1년에 2천명으로 증가했는데 이에 따라 동독의 수입은 배로 증가했지만 상거래 제도상에 모순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동독 입장에서 볼 때 역시 원래 인신매매의 의미와 목적, 즉 시민들의 탈 동독을 감소시키려는 의도와는 거리가 멀어져갔음을 깨달은 것이다.
동독 내에서는 ‘인신매매’가 차츰 소문이 나면서 일부 시민들은 단순히 서독으로 이주할 목적으로 범법행위를 저지르는 정도가 되었다. 즉‘서독이주(Ausreise)’를 정식으로 신청하면 2년이 걸리지만 범죄를 저지르면 1년 징역을 받고 다시 6개월 후에는 서독에 갈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었다. 또 동독 정부는 돈을 중요시하여 잠시 복역 후 서독으로 팔아 넘기기도 했다. 인신매매로 인한 국가의 권위손실이 명백해진 것이다.
동독 내부에서는 이 ‘물물교환’ 의 범위를 최소화하자는 소리도 있었으나 이때는 이미 동독의 경제사정 악화로 이 사업을 중단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는 ‘우리에게 아무 쓸모없는 범죄꾼들이 왜 우리의 빵을 축내야 하나? 나는 국가를 위해 경제위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열변을 토한 적도 있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슈타지는 서독 이주 희망자를 팔아넘기기 위해 구금한 것이 아닐까? 이런 추측을 입증할만한 단서도 있다. 슈타지 내부 문서에는 ‘구금자를 서독으로 석방해야 할 필요성은 우리 국가가 필요로 하는 것이 돈이기 때문’ 이라고 솔직히 피력했다는 문서가 나왔다.
서독으로 이주해온 동독인은 정치적으로 박해를 받아온 것은 물론 서독에서는 바닥에서 다시 시작한 인물들이다. 이들은 아직도 당시의 쇼크 상태에서 회복되지 못한 경우도 있다.
동독은 이 사업에서 재정적인 이득을 보아온 것이 사실이지만 동독인 자신의 기본 이념에 거역하는 행위를 자행한 것이었다. 또 서독 정부는 동독 정권과 협상을 지속해오면서 분단으로 인해 고통을 겪는 국민에게 도움을 준다는 정치 목표에 접근한 것이다. [유럽리포트*2004]
4. 메르켈 수상의 세 살 버릇
동독출신인 메르켈 수상(동독‘물리 아카데미’근무)은 통일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옛 버릇이 남아있다고 고백했다. 특히 물건을 살 때 필요한 것인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즉흥적으로 눈에 띄면 사는 버릇이 있다는 것이다. 동독에서는 모든 상품이 귀했으므로 눈에 띄는 물건은 사두어야 했다. 언제 다시 이 물건이 나올지 모르니까! 내가 불필요하면 물물교환이 가능하다.
또 아직도 동독시절의 식품을 사 먹는 것도 있다고 한다.
식품점은 동독에서 Kaufhalle (shopping hall)라고 했는데 서독식으로 Supermarket이라고 바꾸는데 15년이 걸렸다고도 한다.
[유럽리포트*2006]
5. 인간의 욕망
인간의 욕망과 사회부패는 자본주의의 특징인가? 독일에서 부패문제가 대두되면 대명사처럼 떠오르는 기업이 지멘스가 되었다. 기업 회계장부를 이중으로 하여 억대 비자금을 조성하여 이란, 아르헨티나 등에서 대형사업 입찰 시 수뢰한 혐의이다. 독일 세무서에서는‘유용한 지출’이란 명목으로 정식 지출로 인정되었었다. 이 사건이 자본주의의 대표적인 비리 사건으로 꼽힌다. 사회주의 하에서는 외양적으로 나타나듯이 부패가 없었을까? 내부를 보면 형태가 다를 뿐 비리의 온상이 될 만한 소지가 많았기 때문에 이런 의문이 가능해진다. 부정이나 직권남용 등이 금기사항이었으나 실제로는 널리 번져 있었다는 것이 전문가의 견해다. 국가기관에서 경제를 통제하는 상황에서 또 모든 상품이나 물자, 서비스가 턱 없이 부족함을 겪어야 하는 상황에서 유혹이 너무 컸으며 필요악이기도 했다. 사회주의 국가들은 자본주의 하에서의 생활관습 즉 이기주의, 사유자산에 대한 욕망과 도덕적 해이 등을 극복하기로 결의했다. 동독에서는 1950년대 초 국가적인 의결사항이었다. 동독정부는 간혹 비리관련자에 대해 전시용 재판(Schauprozess)을 한 적도 있었다. 1963년에는 경직된 체제로 인해 생산성이 극히 저조함을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경제체제를 고안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상품을 빼돌리는 행위나 물물교환이 시민들 간에 왕성해졌다. 그 후 호네커 시대에도 경제계획의 고삐를 조였지만 정부는 증가하는 부패현상을 국가사회주의에 기인한 체제의 약점이 아니라 경제안정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라는 억지 해석을 하게 되었다. 즉 기업이나 심지어 개인조차 암시장에서 물품조달을 하면서 이로 인해 경제흐름이 개선된다는 식이었다. 70년대 말에는 이미 사회주의 국영기업체 CEO들 간에는 시계, 술, 커피, 크리스탈 잔, 식사도구, 가죽제품, 진공청소기, TV, 면도기 등을 서로 교환한다는 정보가 수상에게까지 전해지면서 그는 매우 서글퍼했다는 것이다.
이런 물품들은 회사 경비에서 ‘사무용품’이란 명세서로 처리되었다. 일상적인 용품에 지나지 않았지만 동독에서는 특수 사치품에 속하는 물품으로서 특수층만이 누릴 수 있는 사치에 속했다. 예로 동 베를린의 정치위원들의 거주지에는 서방세계 물품 구매 상점이 있었는데 여기에 국가가 지원한 금액이 1년에 800만 마르크로 1인당 6만 4천 마르크라는 계산이 나왔다. 이 액수는 평균 동독임금의 4년 수입에 해당하는 액수이다. 경제전문가들은 이를 국가재산에 대해 부당하게 취득한 한 개인의 이득으로 본다.
그러나 권력층이 아닌 일반 서민들에게도 작은 규모의 부패는 번져가고 있었다. 시중에서 구할 수 없는 상품을 구하기 위해서는 내 직장에서 물물교환할 수 있는 물건을 들고 나와야 했다. 서비스의 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현금을 붙여 주는 것이 예사였으며 직장에서는 상사에게 현금을 주면 외출이 허락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 후 90년대 서독에 부패가 일시적으로 크게 증가한 것도 동독의 직간접적인 영향이었다고 보는 해석이 있다. 이와 같이 부패는 비개방적인 사회, 국가가 자원을 지배하고 대규모 공사의 결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나라에서 커져간다. 지멘스의 경우처럼 대규모 공사, 인프라구조 형성, 무기 구입 등이 부패의 요소가 되는 예이다. 동독의 경우 역시 국가간섭이 많은 나라에서 부패가 싹트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투명성기구 (Transparency International)에서 부패국가로 보는 나라는 시장경제가 작용을 못하는 아프리카, 남미, 일부 아시아국가 등이다. 경제학자 가운데는 국가의 간섭이나 관료주의가 심한 나라일수록 부패 가능성을 직접 관련시키기도 한다. 지금의 중국의 경우는 또 다른 사례가 되고 있다. 명목상 공산주의국가로 되어 있는 중국은 사유재산을 허용한 후 경제가 급속 성장하고 있다. 모든 분야에 대한 국가의 영향력 역시 절대적이다. 부패가 퍼질 수 있는 좋은 조건이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게다가 열정적인 공산주의자였던 중국인의 물욕은 자본주의자들의 물욕과 차이를 찾아 볼 수 없다고 한다.
[유럽리포트*2005]
6.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딜레마
통일 20년을 맞아 과거 동독 경제정책에 대한 관심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동독에 거주하던 대다수 시민들에게 동독은 어두운 감옥으로 간주되었으며, 서독의 일부 지식인들에게는 동독이 ‘더 좋은 독일 땅’으로 간주되어 왔었다. 부정적인 면이 있기는 했으나 사회주의국가라는 사실만으로 많은 결함을 덮어 주었다. 동독은 자본의 세력을 극복했고 누구에게나 직장과 아파트를 주었으며 시민들은 대부분 같은 혜택을 국가로부터 받았다. 19세기, 20세기 사회주의는 많은 시민들에게 매력적인 사회제도라고 여겨졌다. 자본주의란 냉정하고 노동자를 착취하며 사회혼란만 가져온다고 인식되었다. 게다가 자본주의 경제에 거의 규칙적으로 닥치는 크고 작은 불황은 마르크스 경제이론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듯했다. 반대로 사회주의는 국가계획에 의해 안전하고 평화스럽고 물욕을 극복한 미래를 약속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돌이켜 보건대 이는 이론에 불과한 이상향에 지나지 않았다. 현실은 달랐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이상향을 그리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독일 알렌스바흐(Allensbach) 연구소 설문조사에 따르면 동독시민의 반 수 이상은‘사회주의는 아이디어가 좋았다. 단지 실제 운영이 나빴다’는 데 동의했고 서독에서는 30%가 이에 동의했다. 그렇다면 사회주의의 실패를 전적으로 무능한 지도자의 탓으로 돌릴 수 있는 것일까? 정답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아무리 능력 있는 인물도 계획경제 하에서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 학자는 오스트리아의 미제스 교수였다. 당시 시장경제주의자와 사회주의 경제학자 간에 열띤 공방을 벌이게 된 토론에서 그는 사회주의 하에서는 합리적인 기업회계가 불가능한 것이 사회주의 체제결함의 관건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초기 마르크스 이론가들은 계획경제 운영에서 실제 부닥칠 구체적인 문제점에 대한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했다. 문제의 복잡성을 완전히 과소평가한 것이다. 심지어 레닌은 국가경제체제를 우체국을 운영하는 수준으로 여겼다.『국가와 혁명』 이라는 저서에서 그는 모든 시민은 국가 운영체제에서 노동자나 사무원으로 종사한다며 또 이들의 업무에 대해 용이하게 감독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레닌은 회계와 감독의 문제점은 자본주의자들이 최대한으로 간소화해 놓았다고 보았다. 여기서 그의 유명한 ‘신뢰는 좋다. 그러나 감독을 받는 것이 더욱 좋다. (Vertrauen ist gut, aber Kontrolle ist besser!)’는 어구도 나왔다. 독일에서는 속담처럼 일상화된 말이다.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불신이 깔려있는 구절이기도 하다. 레닌은 누구나 감독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회계는 4가지 기본 계산법에만 능하면 충분하다고 과소평가했다. 이때 미제교수는 비엔나에서 소련경제의 혼란상을 보고 있었다. 그의 공격 초점은 사유재산과 이윤의 철폐로 노동인구에 동력 부여가 사라진다는 진부한 주장이 아니라, 사유재산과 시장이 없으면 현실적인 시장가격이 형성되지 않으며 이로 인해 여러 종류의 상품부족 현상이 일게 된다는 지론을 편 것이다. 국영화 된 기업에서는 자원의 합리적인 투입을 할 수 있기에는 방향감각을 잃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했다. 따라서 경제계획자는 마치 어둠 속을 헤매는 현상이 일게 되며 이것이 사회주의의 근본문제라고 지적했다. 그 후 좌파 이론가들 간에는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일부 학자들은 새로운 모델로 ‘음지물가’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이 계산을 시도하기도 했다. 또 시장사회주의 (Marktsozialismus)를 도입하여 일선 기업을 이용한 상품수요를 정확히 파악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이에 대해 오스트리아 학자는 꿈 같은 이야기라며 비웃고 있었다. 동독경제의 시련의 연속을 본다. 초기에는 계획경제에서도 강한 중앙집권적인 형태를 도입했다. 그러나 생산성은 서독에 비해 3분의 1이나 뒤지는 결과를 낳았다. 70년 대 초 이미 경제위기는 심각한 수준에 달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수상 울브리히트는 소련에서 개발된 자유주의적인 발상을 도입하려 했다. 이 제도에서는 국가는 주요품목에 대해서만 중앙집권적 계획이 이루어지고 하부층에서는 국가가 요구하는 생산량이 아니라 이윤 (Gewinn)이 실적의 척도가 된다는 것이었다. 즉 시장경제의 기반이 결여된 상황에서 시장경제의 매카니즘을 도입하려 한 것이다. 집단소유제도나 국가의 가격책정제도에는 변화가 없었다. 따라서 이러한 시도는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이 일었다. 실제로 경제는 오히려 붕괴단계에 이르렀으며 생산과정에 심각한 차질이 생겼다. 이에 1970년 울브리히트 수상은 모스크바에서 한 연설에서 어느 정도 경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가능한 한 자본주의국가에서 부채를 지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공표했으나 이로 인해 그는 그 직후 권력에서 물러나야 했다. 후계자 호네커는 개혁의 방향을 다시 거꾸로 돌려 나갔다. 그러면서 국민에게는 소비와 사회안전망을 확장해 나갔다. 그 결과 국가재정은 더욱 좀먹어 들어갔으며, 70년 대 오일쇼크를 겪은 후 80년대 초 국제금리가 오르자 부채는 감당하지 못할 정도에 이르렀다. 당시 수십억에 달하는 서독정부의 보증이 아니었다면 국가부도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사회주의경제는 최종적으로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이 비극의 장면은 거의 10년이나 이어졌으며 정치적인 변화가 사회주의라는 실험의 막을 내리는 촉진제 역할을 했다. [유럽리포트*2000]
7. 통일 20년
통일기념으로 서독 대도시 15세 학생들이 단체로 동독견학을 갔다. 마치 외국에 가는 듯한 오해가 있지 않을까 조심했지만 생각보다 자유스러운 여행이었다고 했다.
동독인들은 케이크를 많이 먹는다. ‘(서독에는 요즘 줄어든 관습이다.) ‘집들이 깨끗하고 예쁘고 아담하다.’(통일 후 동독도시는 새로 건축하듯 단장을 했다.) ‘전차가 많아 흥미로웠다’, ‘사람들이 더 친절하다.’, ‘거리에서 마주치면 서서 지나는 자리를 양보한다.’(서독에는 점차 사라져가는 미덕) ‘인사할 때 악수를 하고 포옹하는 인사가 잦다.’(서독에서 악수는 글로벌 관례에 따라 차츰 줄어든다.) ‘생활이 더 전통적이다. 일례로 식사 시에는 가족이 함께 모여 식사한다.’ 등의 소감이 있었다.
동독박물관 방문도 인상적이었다. 동독 정권하에서 핵무기 반대 유인물을 돌려 감옥살이를 한 부인의 설명도 있었다. 고문방법은 빈 병 위에 앉기, 취침방해, 겨울에 밖에서 찬물에 쭈그리고 앉기, 앉아서 찬물로 샤워하기 등이었다. 통일 직전 교회를 중심으로 매주 있었던‘월요 데모 (Montagsdemonstration)’를 찍은 비디오도 인상적이었다.
이런 동독이 멸망한지 20년밖에 안되었다는 사실이 학생들은 믿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유럽리포트*2011]
8. 독일통일과정을 회고하는 바이겔 전 재무장관
독일 통일 당시의 서독 바이겔 재무장관이 당시를 회고하는 인터뷰를 가졌다. 그에게는 부채장관 (Schuldenminister)라는 별명이 붙었었다. 통일비용이 너무 방대했기 때문에 재무장관은 부채를 걸머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그는 당시 정치가들은 동독을 흡수하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는데 문제가 있었다고 피력했다.
사실상 현재도 통일비용을 정확히 산출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지금까지 2조 유로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통일 당시 즉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는 통일비용을 70억 ~ 1000억 마르크 (30억 ~ 500억 유로)로 추산했었다.
‘우리는 동독경제의 실제상황에 대해 너무나 무지했다.’ 그는 한 마디로 ‘모든 것이 제멋대로 식의 사회주의였다.’고 회고했다. “회계장부를 제대로 작성한 기업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기업을 정리하거나 민영화하는 과정에서는 이것이 가장 중요한 자료인 것이다.”
통일과정에서 외부로 부터 가장 논란이 된 것은 동독 경제 청산작업을 맡은 신탁통치 기관 (Treuhandanstalt)이었다. 급작스럽게 설립된 이 기관의 CEO로 임명된 로베더는 불과 1 년 후 적군파 (Rote Armee Fraktion: 68운동에 뿌리를둔 테러단체)에 의해 뒤셀도르프 저택에서 암살되었다.
이 기관에는 하부조직의 경험있고 유능한 인물을 구할 수 없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애가 되었다. 불과 3, 4년 정도의 기간을 위해 유능한 인재가 자기 직장을 떠난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바이겔 장관도 이 점을 꼬집었다. 그는 동독 기업을 민영화하는데 쓸만한 인재가 없었으며 주요 요직을 맡은 인물들은‘수의사와 수학자와 종교인’뿐이었다고 하소연을 털어 놓았다. 즉 동물의 병 진단을 하듯 동독기업 진단을 내리고 경영 마인드가 없는 수학자들은 숫자만으로 계산했고 종교인들이 마지막 기업 장례식을 도맡았다는 이야기다.
민영화 작업은 빠른 속도로 이루어져야 했다. 동독기업의 생산성은 서독기업의 27%에 지나지 않았으며 동독상품 가운데 어느 정도 경쟁력이 있는 상품이라고는 광학제품, 일부 철강과 선박 분야뿐이었다. 제품생산을 해도 더 이상 시장이 없었으므로 시간이 흐를수록 국가부담은 증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국가는 속히 손을 떼야 하는 처지였다.
대부분의 동독기업들은 공장대지가격을 일부 받는 정도 아니면 1마르크라는 상징적인 가격으로 팔려나갔고 여기에 국가 보조금 지원이 따른 것이다. 기업운영을 계속한다는 조건이었으나 이들은 대부분 곧 폐업의 운명에 처해졌다.
이렇게 진행된 졸속 통일과정에서 부정비리 행위가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서독 측의 관리감독 아래 있는 동독보다도 더욱 극단적인 예가 동구 공산국가에서 나타났는데 이 과정을 겪으면서 벼락부자들을 양산해 낸 것이다. 러시아에서 중국에 이르기까지 예외가 없었다. 그리고 이 갑부들은 예외 없이 과거 정권과 밀착되어 있던 권력층에 속해 있던 인물들이었다.
국영기업체를 민영화하는 경우는 전 세계적으로 8천여 건이 이루어져 수없이 많았다고 할 수 있지만 국가권력의 공백상태에서 민영화를 진행한다는 것은 전례가 없는 과정이었다. [유럽리포트*2014]
9. 동독은 불법국가인가?
모든 독재국가는 불법국가(Unrechtsstaat)인가? 독재국가였던 동독을‘법치국가 (Rechtsstaat)’로 인정할 수 없다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법치’ 를 부정하여 ‘법치를 하지 않은 국가’에 대해서 이를 곧 ‘불법국가’ 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이 문제를 놓고 독일의 각 정당인들 특히 좌파정당(Die Linke) 내에서 논란이 빚어지고 있다. 직접 계기가 된 것은 동독지역 튀링겐 주 정부가 앞으로 좌파, 사민당, 녹색당의 연정으로 구성될 것으로 예측되면서 이 세 정당의 예비회담에서 동독의 불법국가 여부가 쟁점으로 오른 것이다. 지난10월 3일에는 독일통일기념 연설에서 전 국회의장 티어세는 ‘동독에는 자유선거가 없었고 야당이 없었고, 사법기관의 독립성이 보장되지 않았으며, 사상의 자유와 여행의 자유가 없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할 때 불법국가가 아니고 무엇인가?’ 라는 의미 있는 해석을 가했다. 티어세는 과거 동독 학술 아카데미 문화부에서 근무하였으나 정치적으로는 엄격하게 ‘무관심‘을 지켜온 가톨릭 신자다. 역시 동독출신인 현 독일 대통령 요아힘 가웈(Gauck)이나 메르켈 수상 역시 최근 동독은 ‘불법국가’라는 정의를 내렸다. 또 좌파당에서도 ‘불법국가‘라는 정의를 통과시킨 상황이다. 그러나 일부 좌파정당 정치인들 가운데는 ‘법치국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불법국가‘라고 칭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는 정치인들도 소수 있다. 대표적인 인물은 의회의 좌파원내대표 귀지 (Gysi)이다. 그는 동독에서 변호사로 활약하면서 반체제인사의 변론도 도맡았었지만 통일 후에는 그가 동독 비밀경찰 요원으로 활동했었다는 비난을 받고 법정소송이 자주 있었으나 최종적인 확고한 증거물은 나타나지 않았으며 달변가로 인정받는 그의 정치생명은 계속 이어져 왔다. 그는 ‘법치국가의 부정형’ 과 ‘불법국가’ 를 동일시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대표적 정치인이다. 불법국가라는 단어는 법률적이거나 혹은 정치학적인 전문용어가 아니라 냉전시대에 사용하던 개념으로 보는 극단적인 견해를 갖는 인물도 있지만 어쨌든 경멸적인 의미를 갖는 단어임에는 틀림이 없다. [유럽리포트*2014]
10. 통일과 통일비용에 무관심했던 독일
서독정부는 동독의 경제력에 무관심
통일 전 냉전 시 서독에서는 ‘통일’이란 단어는 자주 거론되는 개념이 아니었다. 통일의 가능성이란 전적으로 전승국의 영향력에 달려 있으므로 국제 정치적인 변화과정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독일에서 ‘통일’을 논한다는 것은 서독에 의한 ‘흡수통일’로 이해되었으므로 동독 정권은 ‘통일’에 대해 극심한 거부감을 가져왔다. 통일론자는 2차 대전의 패배에 대한 보복주의자 (Revanchist)라는 선전공세에 막 부닥치게 되었다. 그러므로 ‘통일’(Wiedervereinigung)이란 단어 사용은 매우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또한 ‘통일’을 사용할 때는 단어의 어원에서 유래되어 풍기는 어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이 단어의 어원은 ‘하나’(ein)이며 이 단어를 동사화한것이 ‘통일’이다. 따라서 ‘통일’은 동적이며 능동적인 단어이다. 그런 이유에서 반드시 ‘통일’을 논할 때는 오히려 ‘Einheit’ 가 사용되었다. 이는 순간의 정적 상태를 묘사하는 개념으로서, ‘하나’라는 단어를 ‘하나임, 통일’로 명사화한 정적인 단어이다.
그만큼 ‘통일’은 무질서하게 사용되는 개념이 아니었다. 통일은 흡수통일 즉 보복적인 무력을 전제된 것이다. 그만큼 통일에 대한 담론에 현실성을 부여하지 않았다.
따라서 서독 정계를 볼 때 보수계에서 일부 미미하게 통일을 논했을 뿐, 좌파나 동독정권자는 통일을 거부해 왔으며 통일이 담론의 대상이 되지도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통일에 필연적으로 따르게될 자기의 권력상실에 대해 심한 공포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사활을 건 정치목표는 동독정권의 외교적인 인정에 두었다.
서독 정부에는 ‘통일부’라는 부서도 없었다. ‘독일국내문제 부’(Ministerium fuer Innerdeutsche Angelegenheiten)가 있을 뿐이었다. 서독정부에는 통일이 일차적인 목표가 아니었다. 통일보다 더욱 절실하며 시급한 과제는 장벽으로 동서독에 갈라진 부모형제간의 상호방문이나 개인적인 생필품지원 같은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의 지원이었다.
따라서 서독정부는 통일에 대한 대비가 없었다. 통일을 전제로 하는 일체의 활동은 추진되지 않았다. 오히려 말로만 내세우는 ‘통일’ 보다는 장기적인 안목에서 자유세계의 진면모를 부각시키는데 주력했다. 따라서 요즘 한국에서 논의되고 있는 ‘통일비용’ 같은 사항은 정계는 물론 학계에서조차 전혀 연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통일비용에 대한 무관심은 차치하고라도 더욱 놀라운 것은 동독 경제현실에 대해 너무나 어두웠다는 사실이다. 동독경제가 낙후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었으며 동독을 다녀온 시민들이 사정을 전하곤 했다. 그러나 막상 통독 후 나타난 동독의 실상은 너무나 놀라웠다. 동독경제의 실상은 전혀 예상치 못할 정도로 몰락직전의 위급한 상황이었다. 단지 놀라운 것은 서독측에서는 자기 형제 국가인 동독의 경제사정에 대해 너무나 무지한 상태였다는 사실이다. 정계는 물론 학계 역시 마찬가지였다.
공산권은 원래 국내 모든 사항에 대해 대외 비밀로 했다. 그러나 1970년에 200만 명이 그리고 1973년에는 800 만 명이 동독을 왕래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서독측의 직무태만으로 볼 수 밖에 없다 하겠다.
동독의 경제력
동독경제의 비참한 정도가 국가의 존폐를 염려할만한 수준이었으나 대외적으로는 이러한 심각성을 은폐하는 데는 성공한 셈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서독의 정계나 학계에서 근본적인 관심이 있었다면 통일 후의 충격과 당혹감을 면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여기에도 한가지 문제점은 따른다. 만약에 연구기관이나 서독의 정부기관이 동독경제에 대한 자료수입을 시도했다면 ’일급비밀사항’에 저촉되어 동서독간에 정치문제로까지 커졌을 것이다.
동독의 경제력에 대해서는 80년대 한 때 세계 11번 순위라는 보도가 널리 알려졌었다. 소련은 물론 동유럽의 모든 공산권 중에서 역시 독일인의 능력을 과시하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런데 이 랭킹은 동독이 받아드린 대외차관을 반영하면서 이를 근거로 한 잘못된 통계였던 것으로 통일 후 알려졌다. 서방세계를 대표한다는 가장 권위 있는 전문기관의 통계마저 이 정도의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이 수치가 아닐 수 없다.
통일 후 외부에 드러난 동독경제의 후진성은 놀라웠다. 도로사정이 열악하다는 것은 알려져 있었다. 냉전시 동독정권은 서독인이 서베를린으로 가기 위해 동독지역을 통과해야 한다. 동독정부는 이 통행료를 톡톡히 받아냈다. 일부는 서독정부로 하여금 아우토반 건설비용을 부담하도록 했다.
일반 도로사정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악감을 금치 못하게 했다. 지방으로 가면 히틀러 시대 도로를 그대로 이용하고 있었고 국유화된 아파트 역시 수 십 년을 수리하지 못한 경우가 허다했다. 에너지는 만성적으로 부족했고 전화를 소유한다는 것은 주요 권력층 근무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에 속했다. 2기통 자동차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출생신고와 동시에 구매신청을 한다는 우스개 말이 돌았다.
투자를 하지 못한 생산공장들은 2차 대전 당시 수준의 상품을 생산했으며 화학공장 역시 히틀러 시대 기술과 시설을 사용했다. 공장에서 시설보수에 소요된 인원이 생산직 인원을 능가했다. 게다가 환경 오염해결에는 전혀 관심조차 없었다.
통일 직후부터 독일정부는 동독지역의 인프라 구성에 대대적인 투자를 시작했다. 거의 폐허화 된 나라를 송두리째 뒤집어엎어 놓은 셈이다. 지금의 동독은 전국이 깨끗하고 현대적으로 단장된 전원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정부의 투자결과 통일 직후 약 3, 4년간 독일은 전에 없는 호경기를 맞을 정도였다. 이는 통일에 의한 반짝 경기였다. 그러나 통일 8년 후인 98년에 이미 EU의 모든 나라가 독일경제를 앞지르기 시작했다. 프랑스, 이태리, 홀란드, 영국 등 수 십 년 간 독일에 많이 뒤지던 국가들이 독일을 추월했고, 이제는 이태리, 스페인, 폴투갈 과 구 공산권 국가만이 독일을 추격중이다. 그나마 이태리는 현재 독일과 거의 같은 수준에 달했으며 스페인은 4년 후면 독일을 추월할 것으로 추정된다는 놀라운 보도다.
이와 같이 유럽에서 경제대국이던 독일경제가 유럽에서 가장 낮은 경제성장을 면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 독일 내부에서는 사회 각 분야에 걸친 개혁의 부재에 돌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외국에서는 오히려 독일이 통일비용으로 인한 과중한 부담을 경제불황의 주 요인으로 보는 경향이다. 이 관계는 정계나 학계가 당연히 관심을 갖고 연구의 대상이 되어야 할 과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독일에서는 소위 ‘통일비용’에 대한 진지한 연구가 매우 빈약한 상태다.
그나마 지금까지 알려진 연구결과는 서로 상반된 주장을 펴고 있다. 현직 장관으로 동독지역 경제복구 책임을 맡고 있는 스톨페 장관에 의하면 연간 180억 유로가 연방정부에서 동독지역으로 투입되고 있으며, 지금까지의 전체 통일비용 규모는 2500억 유로라고 주장했다.
베를린 대학 교수 슈뢰더 박사는 이에 대해 강력히 반발했다. 정부측의 이러한 주장은 동독지역 시민의 일반적인 생각 즉 통일에 의해 서독에는 추가 비용부담이 거의 없었다는 통념을 부추기면서 실제 통일비용을 은폐하려는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이루어진 학계의 결과는 구동독 할레 (Halle)시에 있는 경제연구소에서 있었다. 여기서는 통일 부담금으로 1990년에서 2004년까지 1조 5천 억으로 발표됐다. 그러나 이 액수에서 동독이 지불하는 세금을 감해야 실제 지원액수가 나온다. 이 계산은 매우 복잡하다고 한다. 여기서 8-10%라는 세금을 제하면 실제 지원금은 1조 2천억 정도로 본다.
2003년도 동독지원금만을 보면 1000억 유로에 달한다. 문제는 이 액수와 위에 지적한 스톨페 장관의 발표 즉 180억 유로라는 액수와는 5배 이상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슈뢰더 박사는 정부의 발표는 실제와는 거리가 먼 동떨어진 산출방식에 근거를 두었다고 반박한다.
독일정부는 경제상황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결과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을 미화 (Schoenfaerberei)한데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제력의 상승으로 나타나는 수치는 동독지역의 실제 경제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근원은 서독의 지원금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또 정부는 동서독간 격차가 좁아지고 있다고 하지만 이 점 역시 할레연구소는 반박하고 있다.
경제인들은 동독경제가 속히 발전하기 위해서는 투자를 통한 지원이 따라야 했는데, 정부는 동독인들이 성급히 생활수준을 서독수준으로 향상되기를 바랬기 때문에 사회복지금으로 자본이 동독지역으로 전입된 것이 과오였다고 진단한다. 이로 인해 동독인들은 전형적인 ‘기초생활수급자’적 멘탈리티만 더욱 조장되었다고 슈뢰더 박사는 말한다. 통일시 동서독 화폐를 1:1로 교환해 주었듯이 사회보장제도 역시 1:1로 동독인에게 적용되었다. 결과적으로 취업자와 사회보장수급자간에 수입의 차이가 거의 없어졌다고 한다.
위에 지적했듯이 통일비용 산출은 정부와 학계간에 현격한 차이가 난다. 슈뢰더 박사는 정부가 고의적으로 통일부담액을 줄여서 발표하는 것은 동서독인간의 시기심 같은 위화감 조성을 우려한 때문이라고 직설적으로 말한다. 그는 또한 정부가 통일비용에 대한 신뢰성있는 진지한 연구를 지원하여 이를 정확히 파악해야 하는 일이 학자의 기본임무라고 강조한다. EU 보고서에 의하면 지난 10 여 년간 독일경제가 겪은 저성장의 원인은 직접간접으로 동독경제 지원의 목적으로 돈을 투입한 결과라고 분석했다. 즉 독일정부는 유럽 최하위권 경제 성장률과 통일비용은 직접적으로 연관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이 핵심을 도외시 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통일은 이루어졌어야 하고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실패작품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적어도 잠정적인 과도기를 두었어야 했다는 진단이다. 아직도 국민총생산의 5%가 동독지역으로 흘러 들어가는 지원자금이며, 동독은 자체 수요의 2/3만을 직접 생산하고 있다. 서독측은 경제에 따르게 될 문제점을 너무 가볍게 생각했다. 통일부담액을 알려고 하지도 않는 정부나 학
계가 신뢰감이 가는 경제정책을 제시할 수 있는 근거가 있는 것인지 의구심이 간다. [유럽리포트*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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