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백마고지의 영웅 임익순 대령 회고록 내 심장의 파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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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1.4 후퇴와 514 고지
1월 1일 새벽 2시경부터 중공군의 대공세가 시작되었다. 나의 연대는 악조건을 무릅쓰고 오후 3시경 까지 진지를 고수했다. 그 때에는 이미 좌측 우군연대와 우측 미군연대는 철수했고 나의 연대는 거의 포위상태였다. 사단도 이동했는지 통신이 두절 된지도 이미 오래되었다. 비행기 연락으로 후퇴하기 시작한 것이 오후 3시 조금 지나서였다.
나는 남북으로 뻗은 6백 미터의 능선을 따라서 후퇴했다. 어느덧 밤이 되었다. 앞서 가던 전위소대가 물밀 듯이 돌아왔다. 중공군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다. 쌓여있는 눈이 빛을 발한 덕분에 주위를 살펴보니 눈에 보이는 놈은 단 두 놈 뿐이었다. 아마도 산 밑에 있는 부대의 경계초병인 듯 했다. 이놈들에게 발각되면 퇴로가 완전히 차단되고만다. 발각되기 전에 두 놈을 소리없이 없애야했다. 나의 옆에 있던 상사는 힘도 세고 민첩한 사람이었다. 그에게 한 놈을 맡으라고 하고 다른 한 놈은 내가 해치우기로 했다. 마침 입고있던 하얀색 파카가 좋은 위장이 되었다.
한참을 포복자세로 적초병에게 접근하고 돌을 던져 그들의 주의를 유도했다. 소리를 따라 가는 놈에게 번개같이 달려들어 대검으로 목을 찔렀다. 적중했는지 내 얼굴에 뜨끈한 액체가 뿌려지는 듯 했다. 동시에 그 자는 나무토막처럼 아무런 소리도 못내고 나동그라졌다. 옆의 상사도 성공적으로 해치웠는지 대검을 씻으며 나를 보고 힐긋 웃었다. 나는 순간 알 수 없는 전율을 느끼면서 나도 모르게 나무아미타불 하며 합장을 했다. “고맙다. 네가 죽음으로해서 우리의 많은 장병이 무사하게 탈출할 수 있게되었구나.” 하며 다시 염불을 외어주었다.
그곳을 빠져나오니 산등성이도 약간 낮아지고 앞에는 개활지가 어렴풋이 보였다. 내리막길이라 누군지 나를 밀어내고 앞으로 질러갔다. 철모를 쓰지 않아서 군인은 아닌 듯 했다. 이상한 예감이 들기에 그를 불러세웠다. 목에는 태극기를 감고 군대 작업복을 입은 종군기자처럼 보였으나 아무리 보아도 수상했다. 미안하지만 좀 참아달라고 하고 그를 묶어서 호송했다. 나의 예상대로 그는 우리부대가 후퇴하는 틈바구니에 끼어 침투하는 간첩이라는 것이 후에 밝혀졌다.
개활지에 내려섰으나 표고는 많이 높지않았다. 살펴보니 지형으로 보아 6사단본부가 있는 덕정으로 보였다. 그리로 갈까 했으나 이시간에 사단본부가 그곳에 있을 수가 없는 상황이 아닌가 하고 자세히 살펴보니 뿔피리소리가 들려왔다. 적이 들어가 있음이 분명했다. 무전기를 열었더니 사단장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우리의 현황과 위치를 알리고 적정 등을 자세하게 보고했다. 또한 덕정 일대와 그의 외곽을 포격해줄 것을 요청했다. 잠시 후 다시 신무기였던 105mm 박격포탄이 덕정의 중심지에 퍼부어졌다.
소총 사거리로는 좀 먼 거리였지만 나의 연대도 일제 사격을 퍼부었다. 물론 80mm, 60mm, 박격포, 자동화기까지 모두 동원했다. 쫒기던 상황에서 의외의 전과를 올리고 동시에 적의 진격을 지연시켰다. 우리는 재정비를 하고 다시 행군을 시작했다. 그 때 덕정에 있던 적은 적군의 선봉대였다고 들었다. 의정부 북쪽 국도에서 우군을 만났지만 고문관을 잃었다. 그는 500 능선에서 동두천쪽으로 내려가야한다고 고집부렸다. 동두천은 이미 적이 들어와있어 안된다고 극구 말렸으나 그는 고집을 꺽지않고 골짜기로 내려갔다. 그후 휴전까지 그의 소식이 없었고 유엔군 사령부에서는 특별지시가 내려졌다. 고문관은 한국의 지리와 상황을 잘 아는 한국군의 지휘관의 지시를 받으며 행동하라는 내용이었다.
서울 동북방의 창동에 연대를 집결시키고 점검해보았더니 다행히 손실이 크지 않았다.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얼어붙은 광장교 부근의 한강을 건너 천호동에서 일박하고 다음 날 눈 내리는 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행군을 계속했다. 길가에는 피안민 대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있었다. 그 중 가슴이 아팠던 것은 5,6 살 쯤 되어 보이는 고아원 아이들 70여명이 단 한 명의 보모의 인솔을 받으며 얼어붙은 눈길을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었다.
때마침 나의 연대 보급수송대가 도착했다. 아이들을 트럭 위에 나누어 태워 후송해주었다. 그 때 꼬마들이 지금은 40여 살 된 장년들이 되었을 것이다. 그 뿐아니었다. 70살이 넘어보이는 노인이 지팡이에 의지해 힘겹게 걸어가고 있었다. 피난민 중에는 노인도 어린이도 환자들도 있었다. 가다가 죽는 한이 있어도 공산당의 학정에서 벗어나겠다는 의지하나로 피난길에 나선 사람들이었다.
나는 서울을 벗어날 때 똑똑한 하사관 한 명을 민간인으로 위장시켜 서울에 남겨두고 최후까지 서울을 관찰하다가 탈출하여 오라고 지시했었다. 그가 나중에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서울은 거의 비어 유령도시와 같다고 표현했다. 훗날 들은 이야기다. 텅 빈 서울에 들어온 중공군 사령관이 김일성에게 서울에 들어와서 어떻게 했기에 이렇게 사람들이 다 떠나고 죽음의 도시가 되어있느냐고 문책을 했다고 한다. 이정도로 유령도시가 될 정도로 사람들은 서울을 떠나 피난길에 올랐다. 제1차 후퇴 때와 비교해 날씨도 더 추웠고 눈이 많이 내려 걷기가 힘들었다. 또 쉬고 자는 일도 고생스러웠을 것이다.
그 참상은 눈 뜨고는 보지 못할 지옥이라고 해야했다. 나는 보급품의 이동을 끝낸 차량을 총동원해 피난민 수송에 전력을 다 했다. 일차적으로는 곤경에 처한 동포들을 구한다는 것이었고 이차적으로는 작전에도 관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중공군이 그들 틈에 섞여서 남하한다면 우리의 후방까지도 무난히 침투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 번 후퇴에서 뼈저리게 느낀 바가 있었다.
사단장도 피난민 후송작전에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평택, 안성, 장호원을 잇는 선에 방어선을 구축했으나 적은 약 20km 전방까지 와서는 더 이상 내려오지 못했다. 그들의 길어진 보급선을 우리 공군이 차단했기 때문이었다. 해빙기인 2월부터 적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기회를 놓칠세라 맹추격을 가했다.
나의 연대는 작전임무를 끝내고 이천 남방엣 집결하고 재정비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미군 9 군단장이 왔다. 그는 이천 북방의 514 고지를 공격하려고 하는데 한국 6사단에서 1개 연대를 배속시켜 달라는 말이었다. 장도영 사단장은 19연대를 주겠다고 했다. 우리는 그날 밤으로 미군 수송대로 이천 북쪽까지 갔다. 그 때 이천은 완전히 파괴되어 허허벌판의 상태였다.
눈 속에서 날을 새고나니 새벽에 9군단장인 모아 중장이 왔다. 자기네 사단지역의 한 편을 방어할지 514 고지를 공격할지 선택하라고 했다. 나는 서슴치않고 514고지를 공격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 날로 공격을 개시했다. 공병과 전차 각 1개 중대와 대소 야포가 무수히 배속되었다. 사실상 전투단 편성이었다.
514 고지는 50m 정도되는 독립고지였으나 정상부분이 미국 서부영화에 나오는 병풍이 둘러선듯한 모습을 한 지형으로 완전하게 구축된 진지는 포격이나 공중공격에도 끄떡없다. 난공불락의 요쇄인 것이다. 그래서 미 5연대가 기능을 상실할 정도로 손해를 입은 것이었다. 또한 그 고지는 전략상으로도 중요했다. 그 고지만 점령하면 남북한강이 합수되는 양수리 지점까지 거의 무저항으로 진격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첫날 1개 중대병력으로 수색공격을 해보니 정상의 절벽아래까지는 어려움 없이 진출할 수 있었으나 그 절벽에 닿자 적의 수류탄 공격은 그 위력이 막강했다. 중간까지 내려와서 방어하기로 하고 그 날 밤을 지새웠다. 날이 밝아 정석대로 공격을 개시했으나 결과는 어제와 같았다. 수차례 맹공격을 가했으나 별다른 진전이 없이 저녁나절이 되어서 산골짜기에 그늘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지도에도 표시되어있지 않은 능선을 하나 발견했다. 태양이 위에서 비치면 보이지 않는 그런 능선이었는데 목표고지와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즉시 예비대대로 그 능선을 따라 공격을 개시했다. 오후 7시가 되어 드디어 고지를 점령하고 5색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다음날 일찍이 9군단장이 찾아왔다, 그는 역시 듣던대로 우수한 연대라고 기뻐하며 우리에게 찬사를 보냈다. 그는 그 후에도 한국 장성들만 만나면 19연대 미스터 임을 연발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리곤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애석하게도 여주상공에서 헬기사고로 작고했다.
이상이 유명한 514 고지 전투의 개략이다. 이어서 북진을 하는 동안 용문산 전투와 가평 점령 등의 전과도 있었다. 그러던중 38도선 상에 있는 가평 북방 치암리라는 곳이 있었다. 이고에서도 내 연대의 교묘한 우회작전으로 적의 군단 본부까지 포위공격하여 포로 약 1천 명과 군마 200필 정도를 노획하였고 눈물의 38선을 다시 돌파하고 화천 발전소를 점령했다. 사단은 예비사단이 되었고 나에게는 보병학교 입교령이 내려졌다. 그 해 1월 15일부로 나는 대령이 되어있었다.
22. 보병학교
1951년 3월초에 나는 보병학교 고등군사반에 입교했다. 보병학교 고등군사반이라는 곳은 연대에 대한 교육을 중점으로 하고 사단의 개념을 약간 배우는 곳이었다. 나처럼 연대장을 1년이상 했고 전투경험도 많은 자가 다시 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을까 라는 생각도 했으나 참모총장의 권유도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일선에서 고생했으니 잠시 후방으로 가서 쉬라는 그의 뜻도 있었고 지금까지 나의 군대경험을 정산하는 좋은 기회로 삼기로 했다.
그 당시 유능한 교관들은 거의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없었고 보조교관들이 강의를 담당했다. 그들은 교본에 적힌대로 앵무새처럼 잘도 떠들어댔으나 질문시간이 되면 변변하게 답변을 해주지는 못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설명하는 원칙을 내가 경험한 실전상황과 비교해가며 보충설명을 해주었다. 전투병과가 아닌 장교들도 이해가 잘 된다고 좋아했다. 나 자신도 배울 점이 많았다. 내가 전선에서 싸우면서 성공했거나 실패한 사례들이 그 원리원칙에 꼭 들어맞는 것을 발견했다.
나의 전투가 성공했던 것은 원칙에 맞는 작전을 했던 것이고 실패를 했던 것은 원칙에 어긋나는 작전을 했기 때문이었다. 여러 가지 배움에 대한 말들이 생각났다. 학문은 죽는 날까지 해도 다 하지 못한다는 말, 세 살짜리 어린아이에게서도 배울 점이 있다는 말, 배워서 남에게 주지 않는다는 말 등 끝이 없다. 졸업성적도 우등권에 들었다. “남이 잘한 것을 시기하지 말고 노력해서 그 보다 잘하도록 하라.”는 교장의 훈시말씀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긴장의 연속이었던 나의 군대생활이 이곳에 와서 조금은 여유도 생기고 생각할 시간도 생겼다. 나는 30살이 넘은 만학도였으나 젊은이들과 겨루면서 열심히 했다고 생각된다. 전원 60명 중 6등으로 졸업을 했다.
나의 보직은 남들보다 9일 앞서 결정되었다. 9사단 30연대장이었다. 육군본부나 후방근무를 맡기려고 했으나 9사단장 김종오 장군이 육본 인사국장으로 계시다가 처음 야전사단장으로 나가며 나를 데려가기를 요청했다. 이를 육본이 거절하자 “인사국장으로 있던 내가 장교 한 사람 요청하는데 거절하기냐.”며 강요한 것이었다. 그래서 공석중인 30연대장으로 내가 내정된 것이었다.
졸업식 전날 송별회가 열렸다. 시내 어느 부잣집 넓은 사랑채를 빌려 반주와 함께 식사 정도로 끝내자고 했다. 공부하느라 주머니 사정이 좋지않았지만 유종의 미를 거두자는 생각이었다. 넓직한 대청마루에 50여 명이 모여서 내일의 작별을 아쉬워하며 석별의 잔을 들었다.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돌연 한 무리의 젊은 여자들이 기타를 맨 청년들과 몰려왔다. 약간 술기운이 돈 우리들은 놀라기도 했지만 의아해 했다.
아무리 보아도 거리의 여자나 술집여자들은 아닌 듯 싶었다. 그 때 잘 아는 젊은 친구가 자기의 아내와 함께 들어와 설명을 했다. 이 지역의 처녀회 회원들인데 몇 달동안 고생한 여러분의 춤파트너가 되어주기 위해 왔다고 그랬다. 약 15명 쯤 되어 보였다. 춤을 추는 장교는 불과 10명 내외였으나 모두들 싫어할 이유는 없었다. 이내 모두가 어울려서 기타연주에 맞추어 춤판이 벌어졌다. 춤솜씨는 서툴렀지만 잠시나마 유쾌한 시간을 보내고 헤어졌다.
그러나 기분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지난 번 병원에서 퇴원하고 부산에 갔을 때 일이 생각났다. 전방에서는 장병들이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는데 후방의 젊은이들은 춤이나 추고 있단 말인가? “장년층들도 춤을 못 추면 행세를 못한다.”고 말한 젊은이가 생각났다. 이런 일에 환멸을 느껴진 나는 주어진 휴가도 남긴 채 전선으로 갔다. 차라리 야전 천막 속에서 포성을 들으며 지새우는 것이 더 바람직한 일이라고 판단했다.
김종오 사단장에게 신고하니 반가워하면서도 미안해했다. 후방에서 편하게 있을 사람을 자기 욕심으로 데려와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러나 나는 그 반대였다. 내가 만일 후방에 그대로 있었다면 얼마 못가 숨통이 터져 죽어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4. 백마고지와 나
약 20여 년간의 군인생활에서 잊을 수 없는 전투가 있다면 바로 백마고지 전투일 것이다. 이 전투는 세계적으로도 유명세를 떨쳤었다. 전투 당시 펼쳤던 작전내용들은 미국 군사학교에서 전문교재로도 사용되었고 우리나라 초등학교 교과서에는 용감한 전쟁이야기로 수록되기도 했다. 소설이나 단행본으로 출판되기도 하고 라디오와 TV를 통해 여러 차례 방송되기도 했다. 그러나 모두가 객관적인 시각으로 내용이 다루어져 그 진실한 이야기는 미처 소개되지 않았다. 나는 그 전투에서 최초로 적을 맞이한 부대장이었으며 최후로 그 고지를 탈환한 부대장으로 내가 체험한 그대로를 여기에 기록한다.
8월 추석날이었다. 비교적 한가한 분위기였고 전선도 소강상태가 계속되고 있었다. 나는 지리산 토벌작전 이후부터 추석이 되면 그동안 나와 함께 싸우다 전사한 무명용사의 영전에 햇곡식과 햇과일을 차려놓고 조촐한 위령제를 지내왔었다. 그 해 추석에도 어김없이 연대 지휘소 뜰 한편에 소형천막을 치고 미리 준비한 제물을 차려놓고 조용한 마음으로 추도식을 거행하고 있었다.
“뜻을 못다 이루고 먼저 간 영령들이여, 고이 잠드소서.” 하며 명복을 빌었다. 추도식을 막 마무리하려고 하던 차에 일원 대대장 K소령으로부터 보고가 들어왔다. 내용인즉, 중공군 간부처럼 보이는 자가 귀순해 와서 속히 사령관과 만나게 해달라고 그런다는 것이었다. 나는 물론 그를 속히 후송하라고 지시하고 사단장 김종오 장군에게 보고했다.
연대에 도착한 그 중공군 간부는 내일 밤에 군단병력 규모로 내가 배치되어있는 진지에 공격을 해올 계획이라고 했다. 당시에는 백마고지라는 명칭이 아직 없었으므로 지명이 구체적으로 명명되지는 않았지만 나의 연대가 배치되어있는 그 고지를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를 사단에 후송한 뒤 참모들과 작전회의를 열었다. 일단은 그가 진술한 내용을 믿기로 하고 우선 그 고지의 명칭을 정하기로 했다. 그 고지의 생김새와 그간 적의 포격을 맞아 벌거벗은 산등이 하얗게 드러날 정도가 되어버렸으니 ‘백마고지’로 하자고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이렇게 해서 ‘백마고지’라는 지명이 생겨난 것이다. 우리는 세부적인 작전을 계획하고 만반의 대응책을 마련했다.
다음날 그 고지로 나갔다. 장병들도 이미 그 사실을 다 알고 있었고 사기도 높았다. 산병호의 분대장과 소총수들은 자기분대의 사계를 잘 파악하고 있었고 자신들의 앞에 나타나는 적을 절대로 그대로 두지 않겠다는 결의가 얼굴에 뚜렷하게 나타나있었다. 탄약도 최대한 많이 지급되었고 야포와 기갑부대 등도 이미 도착하여 전열을 갖추고 있었다.
나는 백마고지 배사면에 큼직한 호를 하나 마련했다. 그곳을 나의 무덤으로 삼을 예정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그 호 속에서 지냈다. 다시 말해 연대의 OP(관측소)인 셈이었다. 적포의 사정거리 안이었다. 고문관도 한사코 나와 함께 있겠다고 버티었다. 그러나 그 날은 적의 공격이 없었다. 항공정찰에 의하면 적은 많은 수가 집결해있다고 했다.
‘오늘 밤에는 틀림없이 오겠지.’라고 추측하고 낮에 전원 잠을 자게하고 충분한 양의 급식을 했다. 예상대로 그날 밤 9시쯤부터 적의 포격이 시작되었다. 포격이 끝나자 보병부대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완강하게 구축된 우리 진지는 적의 포탄에도 끄떡하지 않았다. 전원 일등사수인 우리 용사들은 용감하게 싸웠다. 사격에 자신감이 넘치는 사병들은 두려울 게 없었다. 노출된 적병들은 우리 사병들의 좋은 먹잇감이 되고 말았다.
어느 병사는 교통호 언덕에 걸터앉아 백발백중의 사격술을 과시하기도 했다. 치열하고 처참한 전투상황이었지만 그들은 마치 공기총으로 참새를 잡듯 재미나게 사격에 열중했다. 중공군은 그날 밤이 지나고 새벽까지 공격해왔다. 우리 측은 새벽녘에 인접부대와 접촉선에서 일 개 소대 구간이 무너졌다.
나는 즉시 예비대로 그곳을 방어하고 침투해 들어가 약 30명의 중국놈 졸개를 생포했다. 날이 밝자 적의 공격이 멈추고 나는 일선으로 나갔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우리의 손해는 경미한 수준이었다. 반면 우리 진지 철조망 앞으로 포현하기 어려울 정도도 많은 중공군 사상자가 골짜기를 메우고 있었다. 무기도 무수하게 널려져있었으나 나가서 수거해 올 수는 없었다. 적의 저격이 무척 심했기 때문이다.
<귀 떨어진 분대장>
내가 격전지를 살펴보며 인접부대와 접촉지점 가까이 갔을 때였다. 머리를 온통 붕대로 감은 병장 한 명과 마주쳤다. 부상이 심해 보여 “어디를 다쳤느냐?”고 물으니 그는 “귀가 하나 떨어져나갔다.”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는 그 분대 부분대장으로 분대장이 부상을 당해 후송되자 분대장으로 분대를 지휘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나와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다는 듯 서둘러 분대원을 집합시켰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분대원이 열대여섯 명이나 되는 것이었다. 철모를 보니 이웃연대 사병들이었다. 어젯밤에 적으로부터 쫓길 때 그들의 분대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 귀가 떨어진 분대장은 M1 총을 거머쥔 채 부대원 한 사람 한사람에게 위치를 정해주면서, “저 옆에 보이는 소나무에서 이쪽 바위까지가 너의 사계다.”라며 일일이 사계를 부여하고 있었다. 나는 나의 부하 가운데 이런 우수한 군인이 있다는 사실이 은근히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귀가 떨어져 나가는 부상을 입은 자를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옆에서 수행하던 중대장에게 분대장을 보임하라고 지시하고 분대장은 그 자리에서 하사로 진급시킨 후 후송시켰다.
때마침 그곳에 도착한 C신문사의 P기자는 그 일을 특종으로 보도했었다. ‘귀 없는 분대장’ 이야기는 한동안 전후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나는 그를 장교로 교육시킬 생각으로 신상조사를 해보았더니 고아출신으로 시골 어느 농가에서 머슴살이를 하던 청년으로 자기의 이름도 제대로 쓰지 못한다는 보고였다. 나는 ‘최후의 승리는 우리의 것’이라는 생각에 다시 확신을 가졌다. 그러한 군인이 있는 한 우리는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승리할 것이라는 다짐을 곱씹으며 나의 호로 돌아왔다.
<11중대 화랑들>
백마고지 주봉에서 앞쪽으로 전초진지가 있었다. 나의 연대 11중대가 나가서 사주방어 진지에서 전초임무에 임하고 있었다. 그 고지는 적의 진지에서부터 백마고지 주봉에 이르는 능선으로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가 칼날처럼 날카롭고 협소해 한 사람이 지나가기에도 위험한 지형이었다. 적의 공격이 있던 날도 끝까지 사주방어를 하며 적이 근접해오는 것을 저지하고 있었다. 중대장은 “옥쇄를 각오하고 진지를 사수하겠다.”고 보고를 한 이후 무전연락이 단절되었다.
나는 여러 차례의 진내 포격을 명했다. 눈물을 머금고 아군의 머리 위에 포사격을 명한 것이다. 진내사격이었다. 그것은 아군의 진지가 있는 지상 약 1백 미터 상공에서 포탄이 터지는 포술이다. 벙커 안에 있는 아군은 어느 정도 안전하지만 공격을 하느라 노출되어있는 적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포탄의 파편으로 많은 사상자가 나올 수밖에 없는 사격이다. 그날 밤에 주봉을 사수한 것도 11중대의 전초진지 사수가 크게 공헌한 덕이었다.
다음날 아침에 그 진지에서 모두가 철수했을 때의 상황은 전사자 10여명, 부상자 50여명과 생존자 27명이었다. 일반적으로 부대원의 삼분의 일 이상이 손해를 당했을 때 그 부대는 전투불능으로 전락되는 것이 상례인데도 11중대는 삼분의 이 이상 손해를 보면서도 최후까지 임무를 수행한 것이다.
나의 용감한 화랑들이여! 그들은 “옥쇄를 각오하며 최후까지 고도의 사격술을 마음껏 발휘했다.”고 어느 하사관이 말했다. 고도의 사격술로 자신을 살리고 임무를 완수한 것이었다. 몇 해 전 모 TV 방송사의 주선으로 백마고지 앞을 방문해 그 당시 용사들과 재회를 하고 환담을 나눈 일이 있다. 격세지감이 들었다. 그 고지에 올라가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비무장지대 안에 들어있어 먼발치로 그저 올려다보기만 했다.
부대 교대를 한 나의 연대는 적의 공격이 없는 우측에 1개 대대를 배치하고 주력은 사단 예비대로 정하고 재정비에 들어갔다. 나의 용감한 용사들은 밤을 지새우고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자기들끼리 적을 몇 놈 사살했다며 한창 자랑을 하며 쉴 생각도 하지 않고 무기 정비에 열중했다. 우리의 충성스러운 용사들이여, 그대들 머리 위에 영광이 있으라.
<피스톤 작전>
진지교대를 하던 날 밤에 적은 또 사단병력으로 야습을 해왔다. 아군은 여지없이 백마고지 주봉과 능선 절반쯤을 빼앗기고 내려왔다. 그러나 다음날 새벽부터 반격이 개시되었다. 밤새도록 적의 후방을 폭격기로 강타했고 날이 밝자 제트 전투기의 적진 폭격이 감행되었으며 그 다음으로 아군의 사나운 야포공격이 이어졌다. 연대박격포 사격이 끝나자 지상 보병부대는 기다시피 고지를 향해 올라갔다. 오후 2시까지 구부능선을 향해 걸었다. 직선거리로 1킬로미터 쯤 되었다. 구부능선에서부터 치열한 공방전이 시작됐다. 얼마 후에 적이 물러갔다. 우리는 고지를 탈환한 것이다.
사병들은 환호하며 국기를 흔들며 능선 위에서 만세를 부르며 날뛰었다. 그 때 적의 야포사격이 폭풍우처럼 쏟아져 내렸다. 아침부터 하루 종일 기어 올라간 고지에서 10분도 채 안되어 뛰어 내려와야 했다. 그리고 적은 다시 고지를 점령했다.
이런 상황이 십여 차례나 반복되었다. 같은 시각에 같은 상황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것을 ‘피스톤 작전’이라고 불렀다. 칭찬인지 비꼬는 말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같은 형태로 상황이 반복되면서 인명과 재산의 소모만 일삼는 일이었다. 이렇게 10여 일이 지난 어느 날 나는 사단장의 호출을 받고 사단으로 갔다.
상황실 앞에 미군 10군단장이 서있고 그 앞에 체구가 조그마한 김종오 장군이 서있었다. 군단장은 한국군을 철수하라는 것이었다. 가까이에 와있는 미군 사단을 투입해 공격하여 고지를 탈환하겠다는 것이다. 그때 사단장의 심사가 매우 착잡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를 불렀구나.’ 하고 생각하니 갑자기 어깨가 무거워지면서 김 장군이 측은해졌다. 사단장은 나를 보고 “어찌하면 좋겠냐?”고 물었다. 나는 거침없이 “내일 11시까지 완전 탈환한다.”고 말씀하라고 했다.
“가능하겠느냐?”는 사단장의 질문에 “공격하는 동안 모든 지휘권을 나에게 위임하십시오.”라고 말했다. 미군 군단장은 그 말을 듣고 돌아갔다. 나는 즉시 전 연대를 한 곳에 집결시켰다. 소와 돼지를 사다 사병들을 배불리 먹였다. 삼국지에 나오는 대목 같지 않은가?
나는 중대장 이상의 장교를 모아놓고 말했다. “백마고지의 영원한 탈환과 우리 연대의 흥망은 내일의 일전에 달렸다. 여러분들은 다음과 같은 나의 지시를 명심하고 그대로 행동해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내일 있을 공격은 아무런 지원도 없이 우리 연대 독자적인 작전이니 재삼 명심하라.”고 하고 세 가지 원칙을 지시했다.
1. 9부 능선에 도착하면 과감한 돌격으로 고지를 탈환한다.
2. 신속한 동작으로 각자 자신을 은폐하며 재편성한다. 적포로부터 피한다.
3. 재편성이 끝나면 왕성한 경계로 적의 역습을 막는다.
그리고 나는 사전 공중공격이나 포사격은 일체 하지 않기로 했다. 이상의 세 가지 원칙을 각 지휘관들이 명심한듯했다. 그날은 장병들 모두 배불리 먹고 편하게 쉬며 잠도 잤다.
다음날은 계획을 행동으로 옮겼다. 공중폭격도 없고 포사격도 없으니 적은 우리가 포기했다고 생각했는지 경계를 심하게 하지 않은 듯했다. 나의 용감무쌍한 용사들은 명령이 떨어지자 산골짜기를 누비며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9시 반에 돌격이 시작되었고 10시에 고지를 점령, 탈환했으며 그때부터 적의 포격과 역습을 막아냈다. 우리는 고지를 완전히 탈환한 것이다. 그러나 우군 연대들은 앞에 있는 전초기지를 탈환하는데 3일이나 걸렸다. 이렇게 우리는 백마고지를 영원히 되찾은 것이다.
우리의 전쟁역사에 길이 빛나는 백마고지 전투는 이렇게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그 전투에서 산화된 영령들의 명복을 빈다. 그 후 한미군 전략전문가들은 연대장의 임기웅변의 용병술을 높이 평가한다고 말했고 미국 사관학교의 연구교재로도 채택되었다고 한다. 당시 미국대통령 아이젠하워는 나에게 외국인에게 수여하는 최고훈장인 ‘Legion of Merit(LOM)’ 훈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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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새벽 2시경부터 중공군의 대공세가 시작되었다. 나의 연대는 악조건을 무릅쓰고 오후 3시경 까지 진지를 고수했다. 그 때에는 이미 좌측 우군연대와 우측 미군연대는 철수했고 나의 연대는 거의 포위상태였다. 사단도 이동했는지 통신이 두절 된지도 이미 오래되었다. 비행기 연락으로 후퇴하기 시작한 것이 오후 3시 조금 지나서였다.
나는 남북으로 뻗은 6백 미터의 능선을 따라서 후퇴했다. 어느덧 밤이 되었다. 앞서 가던 전위소대가 물밀 듯이 돌아왔다. 중공군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다. 쌓여있는 눈이 빛을 발한 덕분에 주위를 살펴보니 눈에 보이는 놈은 단 두 놈 뿐이었다. 아마도 산 밑에 있는 부대의 경계초병인 듯 했다. 이놈들에게 발각되면 퇴로가 완전히 차단되고만다. 발각되기 전에 두 놈을 소리없이 없애야했다. 나의 옆에 있던 상사는 힘도 세고 민첩한 사람이었다. 그에게 한 놈을 맡으라고 하고 다른 한 놈은 내가 해치우기로 했다. 마침 입고있던 하얀색 파카가 좋은 위장이 되었다.
한참을 포복자세로 적초병에게 접근하고 돌을 던져 그들의 주의를 유도했다. 소리를 따라 가는 놈에게 번개같이 달려들어 대검으로 목을 찔렀다. 적중했는지 내 얼굴에 뜨끈한 액체가 뿌려지는 듯 했다. 동시에 그 자는 나무토막처럼 아무런 소리도 못내고 나동그라졌다. 옆의 상사도 성공적으로 해치웠는지 대검을 씻으며 나를 보고 힐긋 웃었다. 나는 순간 알 수 없는 전율을 느끼면서 나도 모르게 나무아미타불 하며 합장을 했다. “고맙다. 네가 죽음으로해서 우리의 많은 장병이 무사하게 탈출할 수 있게되었구나.” 하며 다시 염불을 외어주었다.
그곳을 빠져나오니 산등성이도 약간 낮아지고 앞에는 개활지가 어렴풋이 보였다. 내리막길이라 누군지 나를 밀어내고 앞으로 질러갔다. 철모를 쓰지 않아서 군인은 아닌 듯 했다. 이상한 예감이 들기에 그를 불러세웠다. 목에는 태극기를 감고 군대 작업복을 입은 종군기자처럼 보였으나 아무리 보아도 수상했다. 미안하지만 좀 참아달라고 하고 그를 묶어서 호송했다. 나의 예상대로 그는 우리부대가 후퇴하는 틈바구니에 끼어 침투하는 간첩이라는 것이 후에 밝혀졌다.
개활지에 내려섰으나 표고는 많이 높지않았다. 살펴보니 지형으로 보아 6사단본부가 있는 덕정으로 보였다. 그리로 갈까 했으나 이시간에 사단본부가 그곳에 있을 수가 없는 상황이 아닌가 하고 자세히 살펴보니 뿔피리소리가 들려왔다. 적이 들어가 있음이 분명했다. 무전기를 열었더니 사단장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우리의 현황과 위치를 알리고 적정 등을 자세하게 보고했다. 또한 덕정 일대와 그의 외곽을 포격해줄 것을 요청했다. 잠시 후 다시 신무기였던 105mm 박격포탄이 덕정의 중심지에 퍼부어졌다.
소총 사거리로는 좀 먼 거리였지만 나의 연대도 일제 사격을 퍼부었다. 물론 80mm, 60mm, 박격포, 자동화기까지 모두 동원했다. 쫒기던 상황에서 의외의 전과를 올리고 동시에 적의 진격을 지연시켰다. 우리는 재정비를 하고 다시 행군을 시작했다. 그 때 덕정에 있던 적은 적군의 선봉대였다고 들었다. 의정부 북쪽 국도에서 우군을 만났지만 고문관을 잃었다. 그는 500 능선에서 동두천쪽으로 내려가야한다고 고집부렸다. 동두천은 이미 적이 들어와있어 안된다고 극구 말렸으나 그는 고집을 꺽지않고 골짜기로 내려갔다. 그후 휴전까지 그의 소식이 없었고 유엔군 사령부에서는 특별지시가 내려졌다. 고문관은 한국의 지리와 상황을 잘 아는 한국군의 지휘관의 지시를 받으며 행동하라는 내용이었다.
서울 동북방의 창동에 연대를 집결시키고 점검해보았더니 다행히 손실이 크지 않았다.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얼어붙은 광장교 부근의 한강을 건너 천호동에서 일박하고 다음 날 눈 내리는 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행군을 계속했다. 길가에는 피안민 대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있었다. 그 중 가슴이 아팠던 것은 5,6 살 쯤 되어 보이는 고아원 아이들 70여명이 단 한 명의 보모의 인솔을 받으며 얼어붙은 눈길을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었다.
때마침 나의 연대 보급수송대가 도착했다. 아이들을 트럭 위에 나누어 태워 후송해주었다. 그 때 꼬마들이 지금은 40여 살 된 장년들이 되었을 것이다. 그 뿐아니었다. 70살이 넘어보이는 노인이 지팡이에 의지해 힘겹게 걸어가고 있었다. 피난민 중에는 노인도 어린이도 환자들도 있었다. 가다가 죽는 한이 있어도 공산당의 학정에서 벗어나겠다는 의지하나로 피난길에 나선 사람들이었다.
나는 서울을 벗어날 때 똑똑한 하사관 한 명을 민간인으로 위장시켜 서울에 남겨두고 최후까지 서울을 관찰하다가 탈출하여 오라고 지시했었다. 그가 나중에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서울은 거의 비어 유령도시와 같다고 표현했다. 훗날 들은 이야기다. 텅 빈 서울에 들어온 중공군 사령관이 김일성에게 서울에 들어와서 어떻게 했기에 이렇게 사람들이 다 떠나고 죽음의 도시가 되어있느냐고 문책을 했다고 한다. 이정도로 유령도시가 될 정도로 사람들은 서울을 떠나 피난길에 올랐다. 제1차 후퇴 때와 비교해 날씨도 더 추웠고 눈이 많이 내려 걷기가 힘들었다. 또 쉬고 자는 일도 고생스러웠을 것이다.
그 참상은 눈 뜨고는 보지 못할 지옥이라고 해야했다. 나는 보급품의 이동을 끝낸 차량을 총동원해 피난민 수송에 전력을 다 했다. 일차적으로는 곤경에 처한 동포들을 구한다는 것이었고 이차적으로는 작전에도 관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중공군이 그들 틈에 섞여서 남하한다면 우리의 후방까지도 무난히 침투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 번 후퇴에서 뼈저리게 느낀 바가 있었다.
사단장도 피난민 후송작전에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평택, 안성, 장호원을 잇는 선에 방어선을 구축했으나 적은 약 20km 전방까지 와서는 더 이상 내려오지 못했다. 그들의 길어진 보급선을 우리 공군이 차단했기 때문이었다. 해빙기인 2월부터 적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기회를 놓칠세라 맹추격을 가했다.
나의 연대는 작전임무를 끝내고 이천 남방엣 집결하고 재정비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미군 9 군단장이 왔다. 그는 이천 북방의 514 고지를 공격하려고 하는데 한국 6사단에서 1개 연대를 배속시켜 달라는 말이었다. 장도영 사단장은 19연대를 주겠다고 했다. 우리는 그날 밤으로 미군 수송대로 이천 북쪽까지 갔다. 그 때 이천은 완전히 파괴되어 허허벌판의 상태였다.
눈 속에서 날을 새고나니 새벽에 9군단장인 모아 중장이 왔다. 자기네 사단지역의 한 편을 방어할지 514 고지를 공격할지 선택하라고 했다. 나는 서슴치않고 514고지를 공격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 날로 공격을 개시했다. 공병과 전차 각 1개 중대와 대소 야포가 무수히 배속되었다. 사실상 전투단 편성이었다.
514 고지는 50m 정도되는 독립고지였으나 정상부분이 미국 서부영화에 나오는 병풍이 둘러선듯한 모습을 한 지형으로 완전하게 구축된 진지는 포격이나 공중공격에도 끄떡없다. 난공불락의 요쇄인 것이다. 그래서 미 5연대가 기능을 상실할 정도로 손해를 입은 것이었다. 또한 그 고지는 전략상으로도 중요했다. 그 고지만 점령하면 남북한강이 합수되는 양수리 지점까지 거의 무저항으로 진격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첫날 1개 중대병력으로 수색공격을 해보니 정상의 절벽아래까지는 어려움 없이 진출할 수 있었으나 그 절벽에 닿자 적의 수류탄 공격은 그 위력이 막강했다. 중간까지 내려와서 방어하기로 하고 그 날 밤을 지새웠다. 날이 밝아 정석대로 공격을 개시했으나 결과는 어제와 같았다. 수차례 맹공격을 가했으나 별다른 진전이 없이 저녁나절이 되어서 산골짜기에 그늘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지도에도 표시되어있지 않은 능선을 하나 발견했다. 태양이 위에서 비치면 보이지 않는 그런 능선이었는데 목표고지와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즉시 예비대대로 그 능선을 따라 공격을 개시했다. 오후 7시가 되어 드디어 고지를 점령하고 5색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다음날 일찍이 9군단장이 찾아왔다, 그는 역시 듣던대로 우수한 연대라고 기뻐하며 우리에게 찬사를 보냈다. 그는 그 후에도 한국 장성들만 만나면 19연대 미스터 임을 연발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리곤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애석하게도 여주상공에서 헬기사고로 작고했다.
이상이 유명한 514 고지 전투의 개략이다. 이어서 북진을 하는 동안 용문산 전투와 가평 점령 등의 전과도 있었다. 그러던중 38도선 상에 있는 가평 북방 치암리라는 곳이 있었다. 이고에서도 내 연대의 교묘한 우회작전으로 적의 군단 본부까지 포위공격하여 포로 약 1천 명과 군마 200필 정도를 노획하였고 눈물의 38선을 다시 돌파하고 화천 발전소를 점령했다. 사단은 예비사단이 되었고 나에게는 보병학교 입교령이 내려졌다. 그 해 1월 15일부로 나는 대령이 되어있었다.
22. 보병학교
1951년 3월초에 나는 보병학교 고등군사반에 입교했다. 보병학교 고등군사반이라는 곳은 연대에 대한 교육을 중점으로 하고 사단의 개념을 약간 배우는 곳이었다. 나처럼 연대장을 1년이상 했고 전투경험도 많은 자가 다시 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을까 라는 생각도 했으나 참모총장의 권유도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일선에서 고생했으니 잠시 후방으로 가서 쉬라는 그의 뜻도 있었고 지금까지 나의 군대경험을 정산하는 좋은 기회로 삼기로 했다.
그 당시 유능한 교관들은 거의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없었고 보조교관들이 강의를 담당했다. 그들은 교본에 적힌대로 앵무새처럼 잘도 떠들어댔으나 질문시간이 되면 변변하게 답변을 해주지는 못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설명하는 원칙을 내가 경험한 실전상황과 비교해가며 보충설명을 해주었다. 전투병과가 아닌 장교들도 이해가 잘 된다고 좋아했다. 나 자신도 배울 점이 많았다. 내가 전선에서 싸우면서 성공했거나 실패한 사례들이 그 원리원칙에 꼭 들어맞는 것을 발견했다.
나의 전투가 성공했던 것은 원칙에 맞는 작전을 했던 것이고 실패를 했던 것은 원칙에 어긋나는 작전을 했기 때문이었다. 여러 가지 배움에 대한 말들이 생각났다. 학문은 죽는 날까지 해도 다 하지 못한다는 말, 세 살짜리 어린아이에게서도 배울 점이 있다는 말, 배워서 남에게 주지 않는다는 말 등 끝이 없다. 졸업성적도 우등권에 들었다. “남이 잘한 것을 시기하지 말고 노력해서 그 보다 잘하도록 하라.”는 교장의 훈시말씀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긴장의 연속이었던 나의 군대생활이 이곳에 와서 조금은 여유도 생기고 생각할 시간도 생겼다. 나는 30살이 넘은 만학도였으나 젊은이들과 겨루면서 열심히 했다고 생각된다. 전원 60명 중 6등으로 졸업을 했다.
나의 보직은 남들보다 9일 앞서 결정되었다. 9사단 30연대장이었다. 육군본부나 후방근무를 맡기려고 했으나 9사단장 김종오 장군이 육본 인사국장으로 계시다가 처음 야전사단장으로 나가며 나를 데려가기를 요청했다. 이를 육본이 거절하자 “인사국장으로 있던 내가 장교 한 사람 요청하는데 거절하기냐.”며 강요한 것이었다. 그래서 공석중인 30연대장으로 내가 내정된 것이었다.
졸업식 전날 송별회가 열렸다. 시내 어느 부잣집 넓은 사랑채를 빌려 반주와 함께 식사 정도로 끝내자고 했다. 공부하느라 주머니 사정이 좋지않았지만 유종의 미를 거두자는 생각이었다. 넓직한 대청마루에 50여 명이 모여서 내일의 작별을 아쉬워하며 석별의 잔을 들었다.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돌연 한 무리의 젊은 여자들이 기타를 맨 청년들과 몰려왔다. 약간 술기운이 돈 우리들은 놀라기도 했지만 의아해 했다.
아무리 보아도 거리의 여자나 술집여자들은 아닌 듯 싶었다. 그 때 잘 아는 젊은 친구가 자기의 아내와 함께 들어와 설명을 했다. 이 지역의 처녀회 회원들인데 몇 달동안 고생한 여러분의 춤파트너가 되어주기 위해 왔다고 그랬다. 약 15명 쯤 되어 보였다. 춤을 추는 장교는 불과 10명 내외였으나 모두들 싫어할 이유는 없었다. 이내 모두가 어울려서 기타연주에 맞추어 춤판이 벌어졌다. 춤솜씨는 서툴렀지만 잠시나마 유쾌한 시간을 보내고 헤어졌다.
그러나 기분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지난 번 병원에서 퇴원하고 부산에 갔을 때 일이 생각났다. 전방에서는 장병들이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는데 후방의 젊은이들은 춤이나 추고 있단 말인가? “장년층들도 춤을 못 추면 행세를 못한다.”고 말한 젊은이가 생각났다. 이런 일에 환멸을 느껴진 나는 주어진 휴가도 남긴 채 전선으로 갔다. 차라리 야전 천막 속에서 포성을 들으며 지새우는 것이 더 바람직한 일이라고 판단했다.
김종오 사단장에게 신고하니 반가워하면서도 미안해했다. 후방에서 편하게 있을 사람을 자기 욕심으로 데려와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러나 나는 그 반대였다. 내가 만일 후방에 그대로 있었다면 얼마 못가 숨통이 터져 죽어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4. 백마고지와 나
약 20여 년간의 군인생활에서 잊을 수 없는 전투가 있다면 바로 백마고지 전투일 것이다. 이 전투는 세계적으로도 유명세를 떨쳤었다. 전투 당시 펼쳤던 작전내용들은 미국 군사학교에서 전문교재로도 사용되었고 우리나라 초등학교 교과서에는 용감한 전쟁이야기로 수록되기도 했다. 소설이나 단행본으로 출판되기도 하고 라디오와 TV를 통해 여러 차례 방송되기도 했다. 그러나 모두가 객관적인 시각으로 내용이 다루어져 그 진실한 이야기는 미처 소개되지 않았다. 나는 그 전투에서 최초로 적을 맞이한 부대장이었으며 최후로 그 고지를 탈환한 부대장으로 내가 체험한 그대로를 여기에 기록한다.
8월 추석날이었다. 비교적 한가한 분위기였고 전선도 소강상태가 계속되고 있었다. 나는 지리산 토벌작전 이후부터 추석이 되면 그동안 나와 함께 싸우다 전사한 무명용사의 영전에 햇곡식과 햇과일을 차려놓고 조촐한 위령제를 지내왔었다. 그 해 추석에도 어김없이 연대 지휘소 뜰 한편에 소형천막을 치고 미리 준비한 제물을 차려놓고 조용한 마음으로 추도식을 거행하고 있었다.
“뜻을 못다 이루고 먼저 간 영령들이여, 고이 잠드소서.” 하며 명복을 빌었다. 추도식을 막 마무리하려고 하던 차에 일원 대대장 K소령으로부터 보고가 들어왔다. 내용인즉, 중공군 간부처럼 보이는 자가 귀순해 와서 속히 사령관과 만나게 해달라고 그런다는 것이었다. 나는 물론 그를 속히 후송하라고 지시하고 사단장 김종오 장군에게 보고했다.
연대에 도착한 그 중공군 간부는 내일 밤에 군단병력 규모로 내가 배치되어있는 진지에 공격을 해올 계획이라고 했다. 당시에는 백마고지라는 명칭이 아직 없었으므로 지명이 구체적으로 명명되지는 않았지만 나의 연대가 배치되어있는 그 고지를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를 사단에 후송한 뒤 참모들과 작전회의를 열었다. 일단은 그가 진술한 내용을 믿기로 하고 우선 그 고지의 명칭을 정하기로 했다. 그 고지의 생김새와 그간 적의 포격을 맞아 벌거벗은 산등이 하얗게 드러날 정도가 되어버렸으니 ‘백마고지’로 하자고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이렇게 해서 ‘백마고지’라는 지명이 생겨난 것이다. 우리는 세부적인 작전을 계획하고 만반의 대응책을 마련했다.
다음날 그 고지로 나갔다. 장병들도 이미 그 사실을 다 알고 있었고 사기도 높았다. 산병호의 분대장과 소총수들은 자기분대의 사계를 잘 파악하고 있었고 자신들의 앞에 나타나는 적을 절대로 그대로 두지 않겠다는 결의가 얼굴에 뚜렷하게 나타나있었다. 탄약도 최대한 많이 지급되었고 야포와 기갑부대 등도 이미 도착하여 전열을 갖추고 있었다.
나는 백마고지 배사면에 큼직한 호를 하나 마련했다. 그곳을 나의 무덤으로 삼을 예정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그 호 속에서 지냈다. 다시 말해 연대의 OP(관측소)인 셈이었다. 적포의 사정거리 안이었다. 고문관도 한사코 나와 함께 있겠다고 버티었다. 그러나 그 날은 적의 공격이 없었다. 항공정찰에 의하면 적은 많은 수가 집결해있다고 했다.
‘오늘 밤에는 틀림없이 오겠지.’라고 추측하고 낮에 전원 잠을 자게하고 충분한 양의 급식을 했다. 예상대로 그날 밤 9시쯤부터 적의 포격이 시작되었다. 포격이 끝나자 보병부대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완강하게 구축된 우리 진지는 적의 포탄에도 끄떡하지 않았다. 전원 일등사수인 우리 용사들은 용감하게 싸웠다. 사격에 자신감이 넘치는 사병들은 두려울 게 없었다. 노출된 적병들은 우리 사병들의 좋은 먹잇감이 되고 말았다.
어느 병사는 교통호 언덕에 걸터앉아 백발백중의 사격술을 과시하기도 했다. 치열하고 처참한 전투상황이었지만 그들은 마치 공기총으로 참새를 잡듯 재미나게 사격에 열중했다. 중공군은 그날 밤이 지나고 새벽까지 공격해왔다. 우리 측은 새벽녘에 인접부대와 접촉선에서 일 개 소대 구간이 무너졌다.
나는 즉시 예비대로 그곳을 방어하고 침투해 들어가 약 30명의 중국놈 졸개를 생포했다. 날이 밝자 적의 공격이 멈추고 나는 일선으로 나갔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우리의 손해는 경미한 수준이었다. 반면 우리 진지 철조망 앞으로 포현하기 어려울 정도도 많은 중공군 사상자가 골짜기를 메우고 있었다. 무기도 무수하게 널려져있었으나 나가서 수거해 올 수는 없었다. 적의 저격이 무척 심했기 때문이다.
<귀 떨어진 분대장>
내가 격전지를 살펴보며 인접부대와 접촉지점 가까이 갔을 때였다. 머리를 온통 붕대로 감은 병장 한 명과 마주쳤다. 부상이 심해 보여 “어디를 다쳤느냐?”고 물으니 그는 “귀가 하나 떨어져나갔다.”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는 그 분대 부분대장으로 분대장이 부상을 당해 후송되자 분대장으로 분대를 지휘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나와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다는 듯 서둘러 분대원을 집합시켰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분대원이 열대여섯 명이나 되는 것이었다. 철모를 보니 이웃연대 사병들이었다. 어젯밤에 적으로부터 쫓길 때 그들의 분대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 귀가 떨어진 분대장은 M1 총을 거머쥔 채 부대원 한 사람 한사람에게 위치를 정해주면서, “저 옆에 보이는 소나무에서 이쪽 바위까지가 너의 사계다.”라며 일일이 사계를 부여하고 있었다. 나는 나의 부하 가운데 이런 우수한 군인이 있다는 사실이 은근히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귀가 떨어져 나가는 부상을 입은 자를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옆에서 수행하던 중대장에게 분대장을 보임하라고 지시하고 분대장은 그 자리에서 하사로 진급시킨 후 후송시켰다.
때마침 그곳에 도착한 C신문사의 P기자는 그 일을 특종으로 보도했었다. ‘귀 없는 분대장’ 이야기는 한동안 전후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나는 그를 장교로 교육시킬 생각으로 신상조사를 해보았더니 고아출신으로 시골 어느 농가에서 머슴살이를 하던 청년으로 자기의 이름도 제대로 쓰지 못한다는 보고였다. 나는 ‘최후의 승리는 우리의 것’이라는 생각에 다시 확신을 가졌다. 그러한 군인이 있는 한 우리는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승리할 것이라는 다짐을 곱씹으며 나의 호로 돌아왔다.
<11중대 화랑들>
백마고지 주봉에서 앞쪽으로 전초진지가 있었다. 나의 연대 11중대가 나가서 사주방어 진지에서 전초임무에 임하고 있었다. 그 고지는 적의 진지에서부터 백마고지 주봉에 이르는 능선으로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가 칼날처럼 날카롭고 협소해 한 사람이 지나가기에도 위험한 지형이었다. 적의 공격이 있던 날도 끝까지 사주방어를 하며 적이 근접해오는 것을 저지하고 있었다. 중대장은 “옥쇄를 각오하고 진지를 사수하겠다.”고 보고를 한 이후 무전연락이 단절되었다.
나는 여러 차례의 진내 포격을 명했다. 눈물을 머금고 아군의 머리 위에 포사격을 명한 것이다. 진내사격이었다. 그것은 아군의 진지가 있는 지상 약 1백 미터 상공에서 포탄이 터지는 포술이다. 벙커 안에 있는 아군은 어느 정도 안전하지만 공격을 하느라 노출되어있는 적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포탄의 파편으로 많은 사상자가 나올 수밖에 없는 사격이다. 그날 밤에 주봉을 사수한 것도 11중대의 전초진지 사수가 크게 공헌한 덕이었다.
다음날 아침에 그 진지에서 모두가 철수했을 때의 상황은 전사자 10여명, 부상자 50여명과 생존자 27명이었다. 일반적으로 부대원의 삼분의 일 이상이 손해를 당했을 때 그 부대는 전투불능으로 전락되는 것이 상례인데도 11중대는 삼분의 이 이상 손해를 보면서도 최후까지 임무를 수행한 것이다.
나의 용감한 화랑들이여! 그들은 “옥쇄를 각오하며 최후까지 고도의 사격술을 마음껏 발휘했다.”고 어느 하사관이 말했다. 고도의 사격술로 자신을 살리고 임무를 완수한 것이었다. 몇 해 전 모 TV 방송사의 주선으로 백마고지 앞을 방문해 그 당시 용사들과 재회를 하고 환담을 나눈 일이 있다. 격세지감이 들었다. 그 고지에 올라가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비무장지대 안에 들어있어 먼발치로 그저 올려다보기만 했다.
부대 교대를 한 나의 연대는 적의 공격이 없는 우측에 1개 대대를 배치하고 주력은 사단 예비대로 정하고 재정비에 들어갔다. 나의 용감한 용사들은 밤을 지새우고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자기들끼리 적을 몇 놈 사살했다며 한창 자랑을 하며 쉴 생각도 하지 않고 무기 정비에 열중했다. 우리의 충성스러운 용사들이여, 그대들 머리 위에 영광이 있으라.
<피스톤 작전>
진지교대를 하던 날 밤에 적은 또 사단병력으로 야습을 해왔다. 아군은 여지없이 백마고지 주봉과 능선 절반쯤을 빼앗기고 내려왔다. 그러나 다음날 새벽부터 반격이 개시되었다. 밤새도록 적의 후방을 폭격기로 강타했고 날이 밝자 제트 전투기의 적진 폭격이 감행되었으며 그 다음으로 아군의 사나운 야포공격이 이어졌다. 연대박격포 사격이 끝나자 지상 보병부대는 기다시피 고지를 향해 올라갔다. 오후 2시까지 구부능선을 향해 걸었다. 직선거리로 1킬로미터 쯤 되었다. 구부능선에서부터 치열한 공방전이 시작됐다. 얼마 후에 적이 물러갔다. 우리는 고지를 탈환한 것이다.
사병들은 환호하며 국기를 흔들며 능선 위에서 만세를 부르며 날뛰었다. 그 때 적의 야포사격이 폭풍우처럼 쏟아져 내렸다. 아침부터 하루 종일 기어 올라간 고지에서 10분도 채 안되어 뛰어 내려와야 했다. 그리고 적은 다시 고지를 점령했다.
이런 상황이 십여 차례나 반복되었다. 같은 시각에 같은 상황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것을 ‘피스톤 작전’이라고 불렀다. 칭찬인지 비꼬는 말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같은 형태로 상황이 반복되면서 인명과 재산의 소모만 일삼는 일이었다. 이렇게 10여 일이 지난 어느 날 나는 사단장의 호출을 받고 사단으로 갔다.
상황실 앞에 미군 10군단장이 서있고 그 앞에 체구가 조그마한 김종오 장군이 서있었다. 군단장은 한국군을 철수하라는 것이었다. 가까이에 와있는 미군 사단을 투입해 공격하여 고지를 탈환하겠다는 것이다. 그때 사단장의 심사가 매우 착잡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를 불렀구나.’ 하고 생각하니 갑자기 어깨가 무거워지면서 김 장군이 측은해졌다. 사단장은 나를 보고 “어찌하면 좋겠냐?”고 물었다. 나는 거침없이 “내일 11시까지 완전 탈환한다.”고 말씀하라고 했다.
“가능하겠느냐?”는 사단장의 질문에 “공격하는 동안 모든 지휘권을 나에게 위임하십시오.”라고 말했다. 미군 군단장은 그 말을 듣고 돌아갔다. 나는 즉시 전 연대를 한 곳에 집결시켰다. 소와 돼지를 사다 사병들을 배불리 먹였다. 삼국지에 나오는 대목 같지 않은가?
나는 중대장 이상의 장교를 모아놓고 말했다. “백마고지의 영원한 탈환과 우리 연대의 흥망은 내일의 일전에 달렸다. 여러분들은 다음과 같은 나의 지시를 명심하고 그대로 행동해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내일 있을 공격은 아무런 지원도 없이 우리 연대 독자적인 작전이니 재삼 명심하라.”고 하고 세 가지 원칙을 지시했다.
1. 9부 능선에 도착하면 과감한 돌격으로 고지를 탈환한다.
2. 신속한 동작으로 각자 자신을 은폐하며 재편성한다. 적포로부터 피한다.
3. 재편성이 끝나면 왕성한 경계로 적의 역습을 막는다.
그리고 나는 사전 공중공격이나 포사격은 일체 하지 않기로 했다. 이상의 세 가지 원칙을 각 지휘관들이 명심한듯했다. 그날은 장병들 모두 배불리 먹고 편하게 쉬며 잠도 잤다.
다음날은 계획을 행동으로 옮겼다. 공중폭격도 없고 포사격도 없으니 적은 우리가 포기했다고 생각했는지 경계를 심하게 하지 않은 듯했다. 나의 용감무쌍한 용사들은 명령이 떨어지자 산골짜기를 누비며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9시 반에 돌격이 시작되었고 10시에 고지를 점령, 탈환했으며 그때부터 적의 포격과 역습을 막아냈다. 우리는 고지를 완전히 탈환한 것이다. 그러나 우군 연대들은 앞에 있는 전초기지를 탈환하는데 3일이나 걸렸다. 이렇게 우리는 백마고지를 영원히 되찾은 것이다.
우리의 전쟁역사에 길이 빛나는 백마고지 전투는 이렇게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그 전투에서 산화된 영령들의 명복을 빈다. 그 후 한미군 전략전문가들은 연대장의 임기웅변의 용병술을 높이 평가한다고 말했고 미국 사관학교의 연구교재로도 채택되었다고 한다. 당시 미국대통령 아이젠하워는 나에게 외국인에게 수여하는 최고훈장인 ‘Legion of Merit(LOM)’ 훈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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